새로운 빈곤 -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퓨어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수영 옮김 / 천지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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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노동이 인간의 최고 의무이자 도덕적 품위의 선행조건이며 법과 질서를 보증하는 것이고 빈곤이라는 불행의 치료제라는 신성화는 지난날 노동집약적인 산업과 공명했다. 노동집약적 산업은 생산을 증대하기 위해 더 많은 노동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합리화되고 인원을 감축한 자본집약적, 그리고 지식집약적 산업은 노동력을 생산성 향상의 방해물로 본다. p129.

오늘날 노동윤리는 ‘의존’이란 개념을 불명예로 전환시키는 도구이다. p158

지금까지 읽은 바우만의 책 중에서 가장 좋았다. 물론 후기 산업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 이른바 ‘잉여적 존재’를 지칭하는 ‘쓰레기’라는 단어가 주는 불편함이 이 책에서도 반복되긴 하지만.

어쨌건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치의 핵심에 신빈곤(the new poor) 현상이 있는 듯하다. 바우만은 근대 산업 사회의 역사적 이행 과정에서 ‘빈곤’의 의미가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지고 유지되는지를 이 책에서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읽고 나서 그동안 의심스러웠거나 궁금했던 것들, 예컨대 요즘 정치권이 돌아가는 방식, 범죄 뉴스가 다뤄지는 방식에 대해 통찰력을 갖게 됐다.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근대가 ‘생산자 사회’에서 ‘소비자 사회’로 이행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인간을 정의하는 핵심 규범이었던 ‘노동윤리’가 지금은 가난을 범죄화하고 탈정치화하는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신자유주의적 정부는 공공성을 해체하고 복지 기능을 삭제함으로써 ‘작은 정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민영화의 필연적 결과인 빈곤을 비가시화하고 이에 대한 사회의 윤리적 책임을 소거하기 위해 규제 권력(policing power)을 키우는 ‘큰 정부’라는 것. 여기서 바우만이 주목하는 건 ‘빈곤’에 대한 내러티브, 즉 ‘극빈층’, ‘가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수사학이 변화했다는 점이다.

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민영화를 추진하는 이 정부에서 유달리 ‘법과 질서’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 언론에서 아동 성폭력 사건이 교묘하게 계층혐오의 언어로 둔갑하는 이유(전자팔찌, 김길태 사건을 떠올려보라), 고시원을 혐오시설로 간주하여 반대하는 주민들, 각종 사회 문제가 결국 ‘불법화’, ‘범죄화’로 귀결되는 현상,...책을 읽으면서 이런 것들이 떠올랐고, 바우만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상당 부분 명료하게 정리되었다.

또한 최근 정책 이슈에서 ‘낯설게’ 등장한 ‘기초소득’에 대한 논의의 지적 배경에 대해 이해하게된 것도 이 책에서 얻은 수확이다. 빈곤에 대한 정책적 대안으로 기초소득이나 누진소비세가 거론되고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빈곤에 대한 사유방식의 변화이다. ‘개인의 소득 자격이 실제 소득을 벌어들이는 능력과 다를 수 있다’는 시각, 임금노동을 중시했던 노동윤리 시대의 논리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지위와 존엄성을 중시하는 시각, 정책의 변화는 그러한 사유의 혁명 혹은 전환을 통해서 가능할테니까.

최근 접한 신빈곤 개념 중에서, ‘인간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없는 상태’라는 인문학적 정의(유아사 마코토)가 가장 마음에 들었었다. 사실 사회과학적 설명은 왠지 썰렁하거나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책은 읽으면서 꽤 짜릿했다. 1925년에 태어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바우만, 노년에 많은 사람에게 큰 지적 통찰을 줄 수 있는 책을 낼 수 있다는 것, 참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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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가?방가! 

코미디 | 한국 | 110 분 | 개봉 2010.09.30 육상효 김인권(방가), 김정태(용철), 신현빈(장미), 칸 모하마드 아사두즈만(알리), 나자루딘(라자)...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2648  

결론부터 말하면, 난 참 재미있게 봤다. 요즘처럼 불쾌하게 시리어스한 일들이 천지빼까리일 때, 특히 웃음 코드가 절실하다. 매사에 진지 모드로 임하면 번아웃되기 십상. 그러니, 웃으면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재주꾼들이 그 재능을 발휘해주면 좋겠다는 생각.

육상효 감독의 영화는 처음인데, 참말로 재치있는 분일세! 누구 말대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술자리를 함께 하고플 듯. 국문학 전공자답게 언어의 유희가 웃음을 자아내고, 그것이 영화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된다. “이래봬도...얼굴로 먹고 살아요”라는 광고 문구도 그렇고, “방가? 방가!”라는 제목도 그렇고, 여기 저기 현실 패러디와 의미심장한 pun으로 가득하다. 현대의 한국판 인간 사냥, 역전된 추노라고 할 수 있는 ‘단속’이라는 기표마저 엉뚱하고도 발랄하게 비틀어버린다. 누군가 40자평에 ‘웃기긴 정말 웃기지만 맘 놓고 웃기에는 살짝 미안한 영화’라고 했던데,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웃으면서 미안할 수도, 속상할 수도, 씁쓸할 수도, 화가 날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재미’와 ‘웃음’이 모든 걸 압도한다. 그런데 그 웃음의 재료가 바로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말도 안 되게 천박하고 폭력적인 현실이다. 그 억압적 권력을, 부조리한 현실을 웃음거리가 되면, 그 현장은 긍정적인 정치학의 분위기로 가득하게 된다. 그래서 좋았다. 극장을 나오면서도 웃을 수 있어서. 웃음 끝에 복잡한 뒷맛이 있어서 더 짜릿하다.

주연을 맡은 김인권의 연기도 좋았다. 해운대에서도 그랬지만 ‘이 한 몸 던져서 대중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캐릭터. 앞으로도 응원하고픈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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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하는 뇌 - 여자의 뇌를 자극하는 화장의 비밀
모기 겐이치로 & 온조 아야코 지음. 이근아 옮김 / 김영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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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뇌’ 관련 서적들이 뜨고 있는 모양이다. 제목에 ‘뇌’가 포함된 신간들의 마케팅은 대부분 자기 계발 담론에 편승한 듯하다. “이제 아름다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똑똑해지기 위해서 화장하라!”라고 말하는 이 책의 표지 마케팅도 마찬가지. 점점 썰렁해지는 출판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인 듯하지만, 어쨌든 통속적인 제목과 마케팅에 비해 내용은 의외로 충실하다. 책을 읽으면서 광고와 책의 내용이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어 좀 황당한 기분이 들기도.

뇌과학자 저자 2명이 여성의 ‘화장’ 행위가 자아의 형성, 인지적 기능, 사회성에 미치는 영향 등을 분석한 책. 화장이라는 행위와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여성성에 대한 사회과학적 논의(주로 비판적인)는 많이 읽어봤지만, 뇌과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책은 처음이다. 화장품 회사의 펀드로 진행된 연구이기에 이 연구 자체가 결국 화장품 마케팅에 도구적으로 활용되기 위한 건 아닌가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과학자인 저자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발휘하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는 한 표를 던지고 싶다. 화장이 높은 수준의 지적 활동이라는 점, 그것이 인간의 사회성을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라캉의 거울 이론, 시몬느 드 보봐르의 <제2의 성>, 심지어 일본의 고대 신화까지 동원하여 이야기의 얼개를 짜고 있다. 과학적 개념과 인문학적 지식이 자연스럽게 교차되면서 하나의 새로운 내러티브가 만들어지는 것.

일본 학자가 쓴 책을 읽을 때 이런 현상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쌓인 거대한 ‘앎’의 역사 토대 위에서 사유의 깊이가 나온다는 느낌. 그래서 이야기가 탄탄하고 깊이 우러난 느낌을 준다. 학자들이 외국으로 유학을 가지 않고도 자국 내에서 석학이 나올 수 있는 구조와 문화적 분위기가 부럽다. 일본 내의 지적 기반과 토대에 대한 승인과 자부심이 엿보인다. 그래서 서구의 지식을 인용하더라도 거기에 끌려가지 않고 끌어온다는 느낌을 준다.

한편으로 이 책이 주장하는 내용만 보면 대단히 일본적인 텍스트임에는 분명하다. 저자들이 화장이라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 감춤의 미학과 여성성을 결부시켜 찬양하는 태도, 이 모두 인공적인 것에 뿌리를 둔 일본의 미학적 전통을 연상시킨다. 어쨌거나 외모를 가꾸는 행위의 긍정적인 측면만 부각시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은 남는다. 사람들이 화장하고 성형수술을 하는 이 거대한 흐름은 점점 더 옳고 그름의 잣대로만 평가할 수 없는 복잡한 영역으로 가는 듯하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러한 행위를 통해 어떻게 새롭게 구성되고 있는가를 주목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들에 따르면 화장하면 할수록 지적으로 감성적으로 성숙해지고 사회성도 발달하고 성숙한 사회가 된다. 개인, 나아가 사회 전체의 메타 인지력, 사회적 지성이 발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장이 일상화되고 화장 기술이 발달한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된다고 넌지시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외부의 기준에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는 인간의 자아를 설명할 때 마냥 좋게만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 남의 눈치를 보는 행위에서 사회성 발달만 긍정적으로 평가했지, 자아의 ‘소외’라는 요소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게 이 책의 흠이라면 흠이다. (화장업계의 돈줄이 연구 결과물에 어떻게든 작동한 게야!) 뭐, 그렇다고 화장에 관한 모든 저서가 화장 행위의 양면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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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26674
http://www.imdb.com/title/tt0082280/

그는 감독이 영화를 만들고 관객이 영화를 관람할 때 '본다'와 '느낀다'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려면 언어적으로 설명하기보다 보는 이들이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 이 때의 느낌이란 시각적 자극을 준다는 뜻이 아니라 감각을 일깨운다는 뜻이다.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mzine/read.nhn?section=main&office_id=001&article_id=0002352850

오구리 고헤이 감독이 2008년 한국에 왔을 때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라고. "감각을 일깨운다"...내 몸에 뭔가 와서 탁 치는 소리가 들린다. 자극이 어느 지점에서 촉발되었건 결국 깨달음은 몸에서 일어나는 진동과도 같은 것. <진흙강>은 일본의 전후 1955년을 배경으로 1981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감독의 첫 번째 영화라고 하는데, 첫 작품 부터 이런 '메이사쿠'를 만들다니, 놀라울 뿐.

자막이 없어서 (그것도 중반부터 보기 시작하여) 내용의 디테일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자막 없이 그냥 분위기를 감상하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흑백 영화가 주는 독특한 분위기가 가미되어 어쩐지 불교적 색채가 느껴진다. 전후 10년이 지난 1955년은 본격적인 경제성장이 가속화될 무렵이다. 전후와 근대화가 교차되는 1955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의 몇몇 장면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일본 영화들의 데자뷰를 경험했다. 예를 들면, 마지막 장면. 키이치의 배가 어디론가 끌려가는 걸 목격한 주인공 노부오가 강가를 따라 그 배를 절박하게 따라가는 장면. 친구 키이치의 이름을 처음에는 무력하게,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부르다가, 더 이상 그 배를 따라갈 수 없게 되자 다리 위에 서서 큰 소리로 부르는 장면. 그러나 친구 키이치도, 그의 누나 긴코도, 그들의 어머니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배는 점점 멀어져 가는 장면. 딱, 나루세 미키오의 미다레루(1964)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켰다. 또한 노부오의 친모를 만나기 위해 교토로 가는 기차에서 노부오의 아버지가 읽는 신문 기사 "이제 전후에서 근대화로 나아가야할 때"라는 글귀도 그렇고.

전후의 상처는 봉인되고, 근대화는 더욱 가속화된다. 따라가려고 하지만 따라잡을 수 없는 것과 멀어져 가는 것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을 줌인 한 듯한 영화. 영화는 궁금증을 자아내지만 말해주지 않는다. 말에 깔려 죽은 남자의 시신을 보면서 "10년 전에 내가 죽었어야 했다"고 되뇌인 노부오 아버지의 상처에 대해서도, 키이치의 아버지의 생사에 대해서도, 그외 부모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에 대해서도...

이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된 것. 왜 그렇게 일본 영화, 드라마, 소설에 '봉인'과 '밀실' 메타포가 많은지를. 단지 일본이 섬나라이기 때문에 유래된 일종의 폐소공포증만은 아닐터. 놀라운 것은 그것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

오구리 고헤이 감독 영화를 더 찾아보고 싶네. 일본인 아버지와 재일 교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재일 교포 아내를 두고 있다는데. 마음이 가기 시작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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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한가운데
The Color Of Lies, Au Coeur Du Mensonge, 1999

지난 주말, EBS에서 방송. 영어 제목은 “거짓말의 빛깔”이지만, 원제로는 EBS의 제목이 더 적절하다. 영화에서 데자뷰를 경험하고 나서 호기심에 이끌려 이리 저리 자료를 뒤지다 보면, “아하! 역시 그랬구나!” 싶을 때가 많다. 내 경우엔 동시대, 특히 동시대의 트라우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서, 혹은 동일한 감독의 영화에서 데자뷰를 경험했다. 이 영화는 중반에 대학 때 보았던 “도살자(The Butcher, Le Boucher, 1969)”가 딱 떠올랐다. 그럼 그렇지! 알고 보니 끌로드 샤브롤 감독의 영화였어!

한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누가 진범인가를 둘러싸고 마을 사람들 간에 서로에 대한 의심과 경계가 시작된다는 것, 그러면서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고...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하나의 예외적 사건이 구조화된 일상적 거짓과 위선 속에서 발생하면서, 그 거짓의 에너지가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오는 형식을 취한다는 것. 대학 때 일부러 프랑스 문화원에 찾아가서 비디오테잎을 빌려와 봤던 <도살자>는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서 그때도 다소 ‘고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음. 하지만 거짓과 폭력의 관계를 조명한 내러티브가 꽤나 인상적이었고, 특히 거짓이 가져오는 파괴적 에너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주로 이 감독이 취하는 방식은 그 압력의 취약한 고리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폭력의 당사자가 되는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방식)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 강렬해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도살자>와 <거짓말의 한가운데>는 1960년대 말, 1990년대 말이라는 30년의 시간의 간격을 두고 있지만, 이야기 구조가 유사하다.

사족 1. 스컬리를 닮은 여배우가 형사 반장으로 나옴(목소리는 영 아님). 패배적이고 음울한 분위기의 미술 선생님 역을 맡은 남자 주인공이 매력적이었음. 이름이 자끄 갱블랭이구먼. 처음 보는 배우인데,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 살인범으로 의심받는 다소 복잡하고 여린 성격의 미술가 역에 잘 어울렸음.
사족 2. 프랑스엔 애연가들이 많아 그런지 담배 피는 장면이 유독 많음. 그런데 이걸 꼭 모자이크 처리해야 하는 거냐? 꼭 그래야 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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