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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이란 같은 시대 사람들이 잊고 싶어 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다.'

에릭 홉스봄의 말이다. 이 말이 너무 좋았던 나머지 최근 쓰는 글의 한 모퉁이에 슬쩍 기록해두었다. 여기서 '전문적으로'라는 말을 '끈질기게'로 바꾸고 역사가를 '소설가'라고 바꾸어 적으면 그것도 꽤 괜찮은 문장이 된다. 


한강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작가가 나라는 독자보다 앞서 울고 있다는 생각에 불편할 때가 많았다. 눈물범벅으로 얼굴이 엉망이 된 채 글 속에서 울고 있는 작가를 보며 난 아직 그런 무게의 슬픔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하고 죄책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녀의 작품 중 '작별'이 좋았던 이유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작별에서의 주인공은 어느날 갑자기 눈사람이 되었지만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오열하지도, 큰 아쉬움을 보이지도 않는다. 카프카의 '변신'과 유사한 느낌이지만 주인공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무덤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슬픔은 대사로 나타나지 않고 냉기 가득한 풍경으로 느껴진다.


이번 작품인 '작별하지 않는다'가 그녀의 '작별'이란 작품과 대비되는 것도 우연은 아닌 듯 하다. 그녀의 전작인 '작별'이 정말로 작별해야 하는 어떤 이들에겐 너무 큰 슬픔으로 다가와서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작품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최근에 있었던 붕괴 및 추락 사고들과 오래도록 우리 마음에서 작별이 되지 않는 세월호 이야기. 무덤덤한 작별이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어떤 작별이든 작별할 때의 감정은 수 년, 수십 년을 뛰어서도 생각이 나곤 하니까.


소설의 내용 중 이 책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은 '잘려진 손가락 안으로 찌르는 주사 바늘'이다. 그녀의 말처럼 그건 보고 싶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보게 되고, 봐야 하는 장면들이다. 우리의 역사엔 너무나 많은 불행이 있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끔찍한 과거의 역사를 흔하디 흔한 일상을 바라보듯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잘려진 손가락들이 피 흘리며 있다는 것을. 


조금 아쉬운 점은 뒷부분에서 너무나 많은 내용을 알리려고 한 나머지, 소설을 마지막까지 끌고 온 감정선이나 분위기가 끊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또한, 왜 설명의 대상이 주인공이어야 하는지 설득이 되지 않은 감이 있었다. 하지만 신선한 자극과 함께 깨달음을 줬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었다.


2

에뒤아르가 미소를 지었다. 알아들은 걸까? 베로니카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 연애 지침서에 따르면, 사랑은 그렇게 대놓고 고백하는 게 아니었다. 특히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남자에게는. 

하지만 그녀는 계속했다. 잃을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 파울로 코엘료,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中



나보다 앞서 많은 의사들이 그 연구를 했고, 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은 사회적 합의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죠. 달리 말하자면, 대다수 사람들이 어떤 것을 올바르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올바른 게 되는 거죠.

- 같은 책 中



자그마치 13년 전에 읽고 다시 읽었다. 그때의 감상평을 보니 '하루를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싶다'라고 적어두었다. 13년 간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지냈는가 생각해보니 그렇지 못한 날들이 더 많다. 특히 직장인이 된 후 주말을 기다리며 평일을 견뎌내는 삶을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죽음은 여전히 내게 가장 매력있는 소재다. 사후 세계가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도 한 몫 하지만, 그보다는 유한한 삶에서 왜 '살아있는' 선택이나 도전을 하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더 크다. 13년 전에 읽을 땐 사랑을 고백하는 베로니카의 모습에 가장 감명을 받았었다. 유한한 삶에서 왜 사랑을 위해 나 스스로를 내던지지 못하는가, 라는 자책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13년 간 나는 남들이 반대하는 사랑을 해보기도 하고,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조섞인 결론을 짓기도 하고, 사랑을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기도 하면서 사랑에 관해서는 크게 후회없는 삶을 산 것 같다. 물론 앞으로의 생에서 또 많이 배울 것들이 있겠지만.


그러면 이제 내 물음은 사랑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다. 베로니카가 원래라면 하지 못할 고백의 말을 쏟아낸 것처럼 내가 용기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있을까. 지금으로선 소비가 있겠다. 죽음 앞에 하고 싶은 일이 고작 소비인가, 싶지만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하면 얇지만 따뜻할 연한 노랑빛의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러플 모양의 장식이 달린 베이지색 부츠를 신은 채 을지로의 어두컴컴한 바에서 내가 좋아하는 재즈곡을 틀어달라고 요청한 채 보고싶은 사람들을 한 명씩 부르겠다. 비싸서 홀짝 거리며 마시던 술들을 원없이 마시면서, 죽는다는 소리는 하지 않고 잔을 부딪치고 낄낄거리며 쓸 데 없는 소리로 떠들겠다. 써놓고 보니 코로나 때문에 가지 못한 술자리들이 좀 그리운 모양이다.


벌써 3월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의 1/6이 지난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각오로 좀 더 치열하게 하고 싶은 일들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삶의 동력이 필요한 요즘, 이 책을 다시 만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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