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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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이 ‘미친’ 여자가 갇히는 공간이라면 지하실은 ‘미친’ 여자가 활동하는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앞의 미침은 그리 취급당하는 것이고 뒤의 미침은 자처하는 걸 거다. 미쳤다는 평판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 102세 베르트를 만난다. 한 세기가 베르트의 지하실에 묻혀있다. 102년의 폭력 표본실 혹은 상징이랄까. 베르트가 겪은 여러 번의 결혼과 여러 번의 폭력과 여러 번의 응징. 저 비슷비슷한 결혼을 왜 하는 걸까, 라고 묻기보다는 남편들이 벌이는 폭력이 별 상상력이랄 것도 없이 이런 모습이어서, 라고 여겨야 할 터다.


하지만 뤼시엥은 설득력 있는 반대 논리를 펼치는 대신, 보다 충격적인 논리를 선택했다. 즉 베르트의 따귀를 갈겼다. 부족한 지성을 크게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여자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선조들의 방식이었다. 남자들은 늘 그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바꾸겠는가? (101)


남자 사업가이든 요리사이든 약사이든 심지어 예술가이든 부인에게 행하는 폭력은 전형적이기도 하지. 물리적 폭력, 언어폭력, 무시, 억압, 하대. 또... 혹은 동정. “제 좋은 평판으로 당신의 나쁜 평판을 희석해주고 싶어요.”(309) 꿈 깨셔라. “전 당신의 좋은 평판이 필요 없어요, ㅇㅇ. 전 지금의 제가 부끄럽지 않거든요.”(309) 아이 돈트 니드 어 프린스 되겠다. 안다. 지하실 해골들이 처음부터 특별히 악한 사람들은 아니었을 지도. 가정이라는 울타리(과연 누구, 무엇으로부터?) 안에서 표변하는 모습이 끔찍한 거다. 바꿔 말하자면 친밀한 사람을 힘으로 비존중으로 무시로 대하는 자는 악한 사람이 맞다.


30년대 나치 소년이 범하는 강간과 이후 부부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폭력이 무어 그리 다를까. 한 몸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이미 전쟁이며, 베르트는 운 좋게 무기를 갖췄을 뿐이다. 적만 있는가 하면 아니다, 동지와 후배도 있어서 보호해주고자 했다. 동지애와 사랑을 잊지 않고 들려준 건 작으나마 따뜻한 희망이다. 지하실 무의식이 설쳐댈 수 있는 장은 물론 소설이다. 가벼운 터치로 그린 응징 픽션에 부디, 총 맞은 것처럼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하실 소설 내가 좋아한다. 답답하고 분노가 치미는 게 다락방이라면, 지하실은 통쾌하거든. 게다가 그곳이라면 응당 갖추게 마련인 요건, 포도주가 있잖은가. 할머니의 묘약, 밀주.

 

“건배, 할머니.”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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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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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옷을 보고 있자니 (…) 코스튬에 코스튬이 이어진다. 그것 하나하나가 장난, 그에 대한 장난이다. 신사 레스, 작가 레스, 관광객 레스, 힙스터 레스, 식민주의자 레스. 진짜 레스는 어디에 있을까? 사랑을 두려워하는 청년 레스는? 25년 전의 완전 진지한 레스는? 글쎄, 그 사람은 하나도 챙겨 오지 않았다. 그 모든 세월이 지난 지금 레스는 그 사람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45)


‘하나도 챙겨 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레스를 보았다.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를 안다고 해도 레스 자신이 챙겨올 수 없었을 사람, 청년 레스 말이다. 중년 작가 레스가 하나도 챙겨 오진 못하고, 다만 하나씩 솔솔 흘리며 우리에게 꼬리치는, ‘마음이 약한 사랑꾼’ 진짜 레스를 다 보고 말았다. 책 전체가 레스의 쉰 살 생일파티 초대장 같기도 하다. 그, 왜, 어떤 생파에서는 생일 당사자의 지난 날 슬라이드를 틀어주기도 하고 그러지 않는가. 지금 모습이 되기 전에, 혹은 지금 모습이 되기 위해 지나왔던, 지나왔어야만 했던 시간들. 자, 우리는 지금 레스의 생파 손님이 되었다.


쉰 살이라고 불리면 화들짝 놀라며 아직 며칠 남았다고, 벌써 ‘노인’은 아니라고(124) 손사래 치는 중년이 되기 전에, 그러니까 20대 레스는 40대 로버트를 만나 사랑하였다. 레스가 40대가 되었을 때에는 20대 프레디를 만나 사랑하였다. 그리스 식 사랑법에 따르면 마지막 하나가 남았겠다만…… 아니다, 아니다. 지금은 고대가 아니잖은가. 우리는 마흔아홉 살 현대인 레스에게 건배하고 있는 중이다. 마흔아홉 살 레스를 ‘꼬마’라 부르는 로버트가 있는가 하면 20대 레스를 ‘어른’이라 부르던 프레디도 있는 법이다. 그, 왜, 내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였던 거 같은 거. 내 연상 띠 동갑 연인 화가는 지금도 나를, 40대 나를 만나면 아기라 부를 것…… 아니 레스 얘기하자. 요는, 처음부터 느긋한 쉰 살이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나 나처럼, 상상할 수 없었던 나이에 다들 처음 도착하는 거다.


“거의 쉰 살이 되다니 이상하지 않아요? 이제야 겨우 젊게 사는 법을 안 것 같은 기분인데.”

“맞아요! 외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같다니까요. 커피를 마시려면, 술을 마시려면,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제야 알아냈는데. 근데 떠나야 하는 거죠.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고.” (187-188)


떠난다는 애인을 놓아주기 위해 내가 떠났던 길. 그러나 알고 보니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나희덕 <푸른 밤> 중) 이 거창한 여행기+슬라이드는 어쩌면 긴 연애편지일지도 모른다. 슬라이드를 펼쳐 보여주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첫 문장에서부터 존재감을 과시하나 영리하게 숨어 있는 호스트, 아니 화자 말이다. “네가 원하는 건 뭐니?”라는 지긋지긋한 물음에 대한 긴 답. “레스!”라는 짧은 문장을 풀어쓰면 이 책이 된다. 누군가가 레스에게 쓴 연애편지이자 그리어가 독자에게 쓴 연애편지. 그렇다, 반했다. ‘사랑꾼’ 레스에게 혹은 그리어에게. ‘풀잇서’ 상(115)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이 듦에 대한 사색과 사랑과 유머가 한 가득, 계단을 오르는 레스의 등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우연히 보게 된 그리어 사진에서는 회색 슈트를 입고 있던데 (괄호 안에 꼭 49라고 써야 할 듯) 마치, 능청스럽고도 편안하게 쉰 살을 받아들인 사람 같아 보이더군. 이 책으로 진한 생파를 벌인 덕일까. 어서 와, 쉰 살은 처음이지? 가 아니라 먼저 가 있어, 나도 곧 갈게. 레스의 손사래 덕분에 내 쉰 살도 가뿐할 것만 같다. 이만 줄이면서 다만 덧붙이고 싶은 말, 생축.


“누군가를 만나기엔 난 너무 늙은 걸까요, 로버트?”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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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의 집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7
윌리엄 호프 호지슨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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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코스믹 호러’이긴 하네요. 장황하고 예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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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이들
P. D. 제임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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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에서 알파로. 삭막한 종말 속 사랑과 희망이네요. 영화와는 꽤 다르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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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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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글 140자까지 입력할 수 있습니다. 더 긴 내용의 리뷰는 “마이리뷰 쓰기”를 이용해주세요.) 네.

0. 이런 시치미 뚝 작가 같으니. 머리말 읽고 나서 재미 삼아 위키백과에서 ‘젬블라’ 검색해봤다. ‘머나먼 북쪽의 나라. 예전 왕정국가. 1915년에 태어난 카를 친애왕의 마지막 통치 기간 1936~1958년을 끝으로 젬블라공화국이 됨. 외국으로 도피한 친애왕은 1959년 암살자 그라두스에 의해 살해될 뻔 했다가 가까스로 모면함. 이후 행적은 묘연하나 소문은 무성하여 러시아 망명 작가가 됐다는 설, 영화를 제작한다는 설, 연극연출가로 활동한다는 설, 젬블라로 귀환했다는 설, 정신병원에 수감됐다는 설 등이 있다’고 되어 있다. (거짓말이다. 젬블라를 치면 ‘젬피라 람자노바’로 바로 잡아 찾아준다. 젬피라 람자노바는 ‘러시아 록그룹 젬피라의 리더’다. 그러니까 젬블라는 나보코프의 '몰바니아'다. 실로로 님, 보고 계신가.)


시인 존 셰이드가 있고 주석자 찰스 킨보트가 있다. 시인은 죽었고 주석자는 살았다. 살아남은 이가 유고시(詩)에 머리말, 주석, 색인을 달아 출판했는데 그게 소설이다. 시는 아름답고 주석은 장황하다. 평론가인양 온갖 무게는 다 잡아놓고, 이런 거짓말쟁이 사기꾼 미치광이 과대망상 전직 왕 주석자 찰스 킨보트를 보셔라. 아아, 그에 비하면 나의 실로로 님은 얼마나 소박한지! 소설도 아니고 무려 여행에세이로 분류되어, 지금은 그나마 품절인 명작(클릭) 저자 (중 한 명) 이시다.


돌아와서, 1. 거짓말쟁이 사기꾼 주석자 킨보트에 대해. 믿을 수 없는 화자가 펼쳐놓는 이야기를 읽을 때 어떠신지. 화자의 장황설에 비해 화자가 무심히 지나치는 주변인들의 작은 행동이나 대사가 오히려 힘을 갖는다. 실상은 이렇다는 힌트 같은 것. 화자에 완전히 의존하지 말고 상황을, 전체 그림을 보라는 식의 안전한 거리감을 선사 받는 느낌이다. 목소리는 하나이나 다성곡(多聲曲)이 되는 셈이다. 주성(主聲)이 알고 보면 끊임없이 다른 곳을 가리키려 하는 장치로 등장, 끝내는 어리둥절해하는 독자를 보고 말겠다는 작가의 의지랄까. 자신이 셰이드 유작 주석자로서 유일하게 적합한 절친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시인의 정서본을 획득하는 공교로운 사건까지, 존재유무를 알 길 없는 이문(異文)과 젬블라어 번역을 덕지덕지. 독자를 희롱하거나, 평론가를 풍자하거나 하여튼 성공한 어리둥절함이다. 진짜인 척 쌓아올린 시종 허구, 그야말로 성공한 ‘소설,’ 그것도 끝내주게 재미있는 추리물이 되어 버린 주석서다.


2. 미치광이 과대망상 이웃 킨보트에 대해. 무섭다. 그러면서 조금은 안쓰럽고 우습다. 노시인에 대한 존경은 순수하나 정도가 집착 수준이어서, ‘작업 중인 그가 보고 싶어 달뜬 욕망은 말도 못하게 괴롭고 통제할 수도 없어서, 자존심은 생각지 않고 몰래 엿보는 데 온 정신을’(112) 쏟는다. 건물 동서남북으로, 그리고 창문을 통해서 시인을 관찰하는 모양새가 어찌나 집요한지 잠시 동안은 알랭 로브그리예가 온 줄 알았다.


그 집의 남쪽 면을 보고 싶으면, 우리 집 차고 뒤쪽으로 내려가 튤립나무 뒤에 서서 활 모양으로 휜 내리막길 도로 너머로 환히 불 밝힌 소중한 창문들을 바라보면 되었다. 그는 그 창문들에 블라인드를 치는 법이 없었다(그녀는 항상 가렸다). 반대편을 보고 싶으면, 나의 경호원인 검은 노간주나무들이 별과 불길한 전조, 아래쪽 도로의 외로운 가로등이 드리운 창백한 불빛 한 조각을 감시하며 서 있는 우리 집 정원의 제일 높은 곳까지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면 되었다. (113, 강조는 나)


아니나 다를까 ‘블라인드’는 로브그리예 <질투>(클릭)의 원제 ‘La jalousie’ 단어가 갖는 세 번째 뜻이다. 블라인드 틈을 통해 부인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남편의 시선이 따갑던 작품 말이다. ‘(그녀는 항상 가렸다)’까지 넣은 걸로 보아, <창백한 불꽃>(1962)보다 몇 년 앞선 <질투>(1957)를 오마주한 게 아닐까 한다, 는 말은 나의 주석이다.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화자만 있는 게 아니라 미덥지 못한 독자도 있는 법.) 또한 셰이드가 쓰는 시에 자신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망상이 곳곳에 드러난다. ‘6월 중순경 마침내 나는 내 머릿속에서 타오르는 찬란한 젬블라를 그가 시를 통해 재창조하리라고 확신했다.’(104) 결과물을 보고나서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된 후에도 응, 아니야, 응, 하지만 여전히 그래. 자위하고 자족한다. 어디에서? 어김없이 ‘시 속 여기저기에서, 무엇보다 특히 가치를 따지기 어려운 소중한 이문들에서.’(366) 누구도 확증할 수 없는 그 이문들 말이다. (-->1. 거짓말쟁이 사기꾼 주석자 킨보트 참조)


3. 전직 왕 킨보트에 대해. 젬블라의 혁명을 피해 국외 도피했다. 문학애호가. 옷장에서 비밀 통로를 발견한 걸로 보아 판타지물 꽤 읽었을 듯한데 고전에 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자랑한다. 자신이 젬블라어로 번역하던 미국 시인을 곁에 두게 된다. 전직 왕답게, 모든 게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한다. (-->2. 미치광이 과대망상 이웃 킨보트 참조) 또한 전직 왕답게, 줄곧 암살의 표적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암살자 그라두스를 너무나 외롭게 내버려 둔 듯하나, 미덥지 못한 독자가 아직 읽지 않은 독자의 재미를 빼앗아 버릴 수는 없겠다.


미덥지 못한 독자가 재미 삼아 검색해본 젬블라가 러시아를 은유하는가. 글쎄. 위키백과의 친절한 수정으로 젬피라를 알게 된 건 기쁘다. (더불어 다시 한 번 몰바니아 안내서도 추천하는 바다.) 노시인 셰이드는 나보코프 자신이기도 한가. 글쎄. 프로콜 하럼의 ‘A Whiter Shade of Pale (Fire)’은 창백한 불꽃Pale Fire의 시인 셰이드Shade를 오마주한 노래다. (거짓말이다. 미덥지 못한 독자가 좋아하는 노래일 뿐. 제목의 Shade와 Pale이 <창백한 불꽃>과 연관된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각 잡고 독자를 놀려보리라는 나보코프에 반하기는 했다. 어때, 이래도 재미없어? 곳곳에 숨겨놓은 수수께끼는 다 찾았나? 하듯, 사랑하는 시인을 만들고 아름다운 시를 만들고 저물어가는 왕정국가와 혁명을 만들고 마지막 왕을 만들어 꼼짝없이 놀려먹으려는 현란한 글 솜씨에는 그래, 놀아나야 하는 거다. 두 번, 세 번,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듭 새로 놀아나기 위해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번역이 얼마나 까다로웠을지 상상도 못하겠다. 비록 미덥지 못한 독자이지만 일개 독자의 처지여서 이렇게 행복할 수도 없다. (스파시바.) 해설에서 옮긴이가 거론해준 베라 나보코프의 번호 붙인 편지글이 나는 참 좋던데. 젬블라에 대한 부연 설명을 요구하는 출판사에 보낸 거절 답변, 그 중에서도 7번이 이렇다.


그리고 아마도 이 제안은, 책의 가장 마지막 줄이자 가장 결정적인 줄, 중단된 미완성의 삶을 암시하며 녹아서 사라져가는 지평선, “젬블라, 머나먼 북쪽의 나라”, 시행이나 주석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는 이 마지막 줄에 가장 참담한 영향을 줄 것입니다. (429)


하여, 미덥지 못한 독자 주제에 장난기까지 발동하여 몰바니아 안내서 못지않은 젬블라 안내서를 써보려다 그만둔다. 문화면에는 이런 게 자리할 뻔. ‘젬블라의 국민가수는 젬피라 람자노바다. 머나먼 북쪽의 나라 젬블라를 검색하면 늘 등장하는 대표 얼굴로, 잊힌 마지막 왕 카를의 행적에 대해서는 관련어 나보코프로 안내한다.’ (-->0. 이런 시치미 뚝 작가 같으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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