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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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옷을 보고 있자니 (…) 코스튬에 코스튬이 이어진다. 그것 하나하나가 장난, 그에 대한 장난이다. 신사 레스, 작가 레스, 관광객 레스, 힙스터 레스, 식민주의자 레스. 진짜 레스는 어디에 있을까? 사랑을 두려워하는 청년 레스는? 25년 전의 완전 진지한 레스는? 글쎄, 그 사람은 하나도 챙겨 오지 않았다. 그 모든 세월이 지난 지금 레스는 그 사람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45)


‘하나도 챙겨 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레스를 보았다.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를 안다고 해도 레스 자신이 챙겨올 수 없었을 사람, 청년 레스 말이다. 중년 작가 레스가 하나도 챙겨 오진 못하고, 다만 하나씩 솔솔 흘리며 우리에게 꼬리치는, ‘마음이 약한 사랑꾼’ 진짜 레스를 다 보고 말았다. 책 전체가 레스의 쉰 살 생일파티 초대장 같기도 하다. 그, 왜, 어떤 생파에서는 생일 당사자의 지난 날 슬라이드를 틀어주기도 하고 그러지 않는가. 지금 모습이 되기 전에, 혹은 지금 모습이 되기 위해 지나왔던, 지나왔어야만 했던 시간들. 자, 우리는 지금 레스의 생파 손님이 되었다.


쉰 살이라고 불리면 화들짝 놀라며 아직 며칠 남았다고, 벌써 ‘노인’은 아니라고(124) 손사래 치는 중년이 되기 전에, 그러니까 20대 레스는 40대 로버트를 만나 사랑하였다. 레스가 40대가 되었을 때에는 20대 프레디를 만나 사랑하였다. 그리스 식 사랑법에 따르면 마지막 하나가 남았겠다만…… 아니다, 아니다. 지금은 고대가 아니잖은가. 우리는 마흔아홉 살 현대인 레스에게 건배하고 있는 중이다. 마흔아홉 살 레스를 ‘꼬마’라 부르는 로버트가 있는가 하면 20대 레스를 ‘어른’이라 부르던 프레디도 있는 법이다. 그, 왜, 내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였던 거 같은 거. 내 연상 띠 동갑 연인 화가는 지금도 나를, 40대 나를 만나면 아기라 부를 것…… 아니 레스 얘기하자. 요는, 처음부터 느긋한 쉰 살이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나 나처럼, 상상할 수 없었던 나이에 다들 처음 도착하는 거다.


“거의 쉰 살이 되다니 이상하지 않아요? 이제야 겨우 젊게 사는 법을 안 것 같은 기분인데.”

“맞아요! 외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같다니까요. 커피를 마시려면, 술을 마시려면,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제야 알아냈는데. 근데 떠나야 하는 거죠.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고.” (187-188)


떠난다는 애인을 놓아주기 위해 내가 떠났던 길. 그러나 알고 보니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나희덕 <푸른 밤> 중) 이 거창한 여행기+슬라이드는 어쩌면 긴 연애편지일지도 모른다. 슬라이드를 펼쳐 보여주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첫 문장에서부터 존재감을 과시하나 영리하게 숨어 있는 호스트, 아니 화자 말이다. “네가 원하는 건 뭐니?”라는 지긋지긋한 물음에 대한 긴 답. “레스!”라는 짧은 문장을 풀어쓰면 이 책이 된다. 누군가가 레스에게 쓴 연애편지이자 그리어가 독자에게 쓴 연애편지. 그렇다, 반했다. ‘사랑꾼’ 레스에게 혹은 그리어에게. ‘풀잇서’ 상(115)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이 듦에 대한 사색과 사랑과 유머가 한 가득, 계단을 오르는 레스의 등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우연히 보게 된 그리어 사진에서는 회색 슈트를 입고 있던데 (괄호 안에 꼭 49라고 써야 할 듯) 마치, 능청스럽고도 편안하게 쉰 살을 받아들인 사람 같아 보이더군. 이 책으로 진한 생파를 벌인 덕일까. 어서 와, 쉰 살은 처음이지? 가 아니라 먼저 가 있어, 나도 곧 갈게. 레스의 손사래 덕분에 내 쉰 살도 가뿐할 것만 같다. 이만 줄이면서 다만 덧붙이고 싶은 말, 생축.


“누군가를 만나기엔 난 너무 늙은 걸까요, 로버트?”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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