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 이런 문장에 밑줄을 긋고 있는 내가.

 

“여길 떠나야겠어요.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순 없어요.”

“왜 안 되죠? 전에도 그런 말을 했었죠?”

“나는 당신이 제이콥의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당신이 제이콥의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제이콥의 손』130-131쪽)


제이콥을 공통의 친구로 두고 있는 남녀 두 사람이 열정적인 포옹을 풀면서 나누는 대화다. (대사 간 문장은 생략했다.) 치유의 능력을 지닌 제이콥으로부터 그 신비한 혜택을 받은 두 사람. 두둥- (170쪽 남짓 되는 책의 줄거리를 읊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나. 씁-)


올더스 헉슬리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만남이다. 공동의 작업이 어떠했을지, 내가 흠모하는 이 둘의 친분에 관한 이야기도 어디선가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같은 시기 가까운 곳에 살아 서로 만나고 우정 또는 악연을 나누었던 작가들 이야기가 나는 참 좋다. 어제 읽은 『공중전과 문학』(W. G. 제발트, 문학동네)에서도 알프레트 안더쉬와 막스 프리쉬(프리슈)의 불화가 살짝 나왔었다.

 

 

안더쉬는 기본적으로 항상 후방에 있는 남자였다. 그러니 1970년대 초에 그가 스위스 인이 된 것도 당연한 귀결이다. 그가 꼭 망명해야 했던 건 아니었다. 그는 스위스로 귀화하는 과정에서 티치노 주의 이웃 막스 프리쉬와 몇 년간 불화를 빚었다. 프리쉬가 안더쉬 자신이 추진하는 바를 지지해주지는 못할망정 폄훼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인데, 프리쉬는 어느 곳에선가 이렇게 썼다. “그[안더쉬]는 스위스를 좋아한다. 하지만 스위스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공중전과 문학』193-194쪽)

 

제발트가 논문에서 서슬 퍼렇게 비판하는 안더쉬, 읽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는 속이 후련하다기보다 내가 다 아플 정도의 독서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위장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이승우 작가의 말이 기억났는데, 그 ‘외투’를 뚫어보는 무시무시한 날카로움이었다. 속이 후련해지기 위해선 이런↓ 책을 읽어볼 필요가 생긴다.

 

이 불화는 명예욕과 이기심, 르상티망과 원한에 시달리는 내면생활에 대한 통찰 그 이상을 제공한다. 문학작품은 내면생활을 감싼 외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저급한 안감은 어디에서나 드러나는 법이다. (『공중전과 문학』194쪽)


‘저급한 안감’이라니 후덜덜이다. 안더쉬는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푸셰(『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리브로)를 연상케 하는 인물인데, 츠바이크가 푸셰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 했다면 제발트는 조금도 봐주는 면이 없이 아주 혹독하다. 당시 안더쉬 비평은 양쪽으로 나뉘었고, 좋게 평가하지 않았던 편에는 라이히라니츠키도 있었다.


장편소설 『빨강머리 여인』의 발표로 안더쉬 작품의 구성과 문체상의 결점을 더 이상 묵과하기 어렵게 되자 비평계는 비로소 두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쾨펜이 그 책을 “금세기의 가장 읽을 만한 소설”이라고 칭송한 반면, 라이히라니츠키는 거짓말과 키치의 밥맛 떨어지는 조합이라고 썼다. (『공중전과 문학』151-152쪽)


『작가의 얼굴』의 멋지고 중후한 라이히라니츠키 옹의 '거짓말과 키치의 밥맛 떨어지는 조합'이라는 거침없는 언어구사라니... 더 좋아지고 만다. 『작가의 얼굴』을 보다가 꼭 읽어보고 싶게 된 사람이 다름 아닌 막스 프리쉬였는데, 제발트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 반갑기 그지없다. 라이히라니츠키가 저음의 첼로로 프리쉬를 연주하니 제발트가 날카로운 바이올린으로 안더쉬를 답해오는 독서심포니. 

 

 

 


 

 

그러니 이는 고통의 이야기들이다. 물론 당연히 프리슈가 말하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다. 많은 것을 감추려 했고, 그래야만 했다. 그는 암시와 생략의 대가다. 휴지(休止)는 그의 최고의 표현수단에 든다. 그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 절제하는 미덕을 지킬 줄 알았다. 그런 식의 자기 폭로는 과시욕과 무관하며, 프리슈의 고별사는 감상에 빠지지도, 엄살을 부리지도 않는다. 『몬타우크』는 불안의 작가가 쓴 사랑의 책, 하나의 시적 결산이다. (『작가의 얼굴』279쪽)


 

다시 헉슬리와 이셔우드로 돌아와서, 두 거장의 그렇게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작은 소품에 나는 묘하게 매료되었는데,『싱글맨』의 그림자가 제이콥에게도 드리워져 풍기는 고즈넉하고 허전한 분위기가 취향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1950년대 캘리포니아 모처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겠거니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이, 어서 오게나 크리스.”

“올더스, 그간 별 일 없었지요? 저, 제이콥이 샤론을 치유하고 나서 말입니다...”


첫 밑줄의 문장이 이상하다기보다, ‘나는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가 더 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라면 이런 대화문을 좋아하겠구나, 하는 잠깐 멈춤. 책과 나 사이에 불쑥 끼어드는 청객(請客). ‘불쑥’이라고 썼지만 실은 내내 마음속에 있다가 저런 문장을 핑계로 발화되는 그.

그를 초대하기 전의 나는 이런 문장을 눈 여겨 보았던 것이니,


“그만 해요!”

제이콥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면서 날카롭게 말한다. 그의 말투는 마치 얼굴을 철썩 때리는 것 같다.

(『제이콥의 손』149쪽)


그의 눈으로 또 나의 눈으로 읽게 되는 『제이콥의 손』. 제이콥이 내게 와서 “치유되고 싶어요?”라고 물어본다면, 내 마음속 경미한 우울증을 떠올리며 “아니오.”라고 답할 것 같다. 이 약간의 우울함이 바로 그를 생각하는 힘이며 이 책 저 책을 미로 삼아 떠돌게 하는 내 존재이유일지도 모르니까. 병을 치유해버리고 나면 나는 도대체 더 어떻게 망가질지 모른다. 옳다, 오늘 하루 온 힘으로 그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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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1-11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너무나 지적인 글이다.. 근사해요. 에르고숨님한테 반했습니다.

에르고숨 2013-11-11 13:44   좋아요 0 | URL
지적인 글인지는 몰랐는데욤... 지적질이라면 몰라도요. 고맙습니다. 다락방 님의 수많은 팬들 어쩌시려고 그런 말씀을;; 물론 아무도 모르시겠지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