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륙의 내륙에는 표시된 것이 거의 없었다. 철도도, 도로도, 도시도 없었고, 당시의 지도제작자들은 이런 텅 빈 공간에 으르렁거리는 사자나 입을 쩍 벌린 악어와 같은 이국적인 동물을 그려 넣기를 좋아했으므로, 해변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시원(始原)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콩고 강 대신 거대한 땅을 구불구불 기어가는 뱀을 그려 넣었다. 물론 이제는 지도가 표시들로 빽빽했다. 하얀 부분은 암흑의 땅이 되어 있었다(The white patch had become a place of darkness). 여전히 대부분 기록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식민주의의 역사를 통틀어 이른바 콩고의 개발보다 더 어두운 장(章)은 없다. -『토성의 고리』, 142쪽
『토성의 고리』와 『콩고의 판도라』에서 교차하는 이름은 로저 케이스먼트, 20세기 초 벨기에가 콩고에 온갖 패악질을 해대던 무렵 콩고주재 영국 영사로 있던 인물(1864~1916)이다. 원주민에 대하여 백인상인들이 벌이던 노동착취와 만행을 세상에 고발했고, 아일랜드 독립투쟁에 몸담은 이유로 (케이스먼트는 아일랜드 태생) 1916년 생일 한 달 전에 사형에 처해졌다.
아담 호크쉴드가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당시의 참상을 되살려 낸 책이 『레오폴드왕의 유령』(무우수, 2003)인데 지금은 절판이라 무척 아쉽다.
콩고, 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단연 『암흑의 핵심』. 아니나 다를까 조지프 콘래드와 로저 케이스먼트는 콩고에서 만난 적이 있다. 제발트의 멋지고 멋진! 『토성의 고리』 5장도 바로 그 둘의 조우 사실을 티비 다큐멘터리에서 보다가 가물가물 잠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몇 시간 뒤, 먼동이 틀 무렵 무거운 꿈에서 깨어나 소리없는 상자에서 화상조정용 영상이 떨리는 것을 보았을 때, 기억에 남은 것은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가 케이스먼트를 콩고에서 만났으며, 열대기후 탓에, 그리고 그들 자신의 욕심과 탐욕 탓에 타락해가는 유럽인들 가운데 오직 그만을 올곧은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이 프로그램의 첫 부분에 언급되었다는 것뿐이었다. -『토성의 고리』, 125쪽
여행자가 걸핏하면 피곤해서 잠들거나 아프면서 먼 과거를 ‘회상’하곤 하는 이 작품은 정말이지 걸작이 아닐 수 없는데, 이 책 속에 숨겨진 보물들은 두고두고 읽으며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하여, 졸면서 시작한 5장은 자연스럽게 코르제니오프스키(콘래드의 원래 이름)의 삶과 자취로, ‘콩고의 어두운 비밀을 간직한’ 벨기에의 ‘추함’으로, 다시 케이스먼트의 행적으로 이어진다.
(…)이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바로 케이스먼트의 동성애가 그에게 사회계급과 인종의 벽을 넘어서 권력의 중심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속적인 억압과 착취, 노예화와 불구화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주었다는 것이다. -『토성의 고리』, 161쪽
저 ‘…’에는 ‘검은 일기’ 스캔들이 있다. 케이스먼트가 기록한 자신의 동성애 관계 연대기인 이 일기장은 국가와 사법부의 비방과 왜곡이 더해져 오랫동안 진위여부가 밝혀지지 않다가 1994년에야 케이스먼트가 직접 쓴 것임이 확실해졌다. 검은 일기와 하얀 일기, 번역되어 나오면 좋겠다.
케이스먼트의 형이 확정되었을 때 감형운동을 한 사람 중에는 코난 도일도 있었다니 과연 세기의 재판이었을 듯, 심지어 <로저 케이스먼트의 재판>이라는 책도 찾아진다. 1916년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봉기와 영국의 진압, 그에 이어 처형되는 '순교자' 15인에다 케이스먼트를 더해 예이츠는 ‘아 열여섯 사람이 총살당하기 전에 / 우리가 마음껏 이야기를 나누었더라면’으로 시작하는 「Sixteen Dead Men」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러니 이 정의롭고도 비극적인 인물이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의『콩고의 판도라』에 조연(거의 카메오 수준이라고 해야할까)으로 슬쩍 등장하는 장면이 더욱 확대되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화자(토미, 작가)가 피고인 측의 버전만 듣는 것이 객관성 담보에 장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자각을 하고 고소인들 중 한 명을 만나러 가는데, 그 사람이 바로 케이스먼트인 것.
케이스먼트는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만한 인물이었다. 성격 역시 호쾌했다. ‘저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어.’라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유형이었다. -『콩고의 판도라』, 308쪽
산체스 피뇰은 케이스먼트를 단 5분간 출연시키는 중에 토미의 무릎을 슬쩍슬쩍 건드리는 제스처를 넣었는데, 그의 동성애 기질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듯하다. 이 문제의 5분은 또한 케이스먼트가 우루과이로 떠나기 전에 잠깐 짬을 낸 시간이며 배를 타기 위해서는 독일 잠수함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설정을 덧붙였다가 ‘물론 독일 잠수함의 허락을 받았다.’라고 맺는다. 다름 아니라 훗날 케이스먼트가 아일랜드 독립투쟁을 위하여 독일에 도움을 청했던 사실(거절의 답변을 들고 독일잠수함을 타고 아일랜드로 돌아온다) 때문에 과거 유능했던 외교관이었음에도 반역죄를 선고받게 되었던 것이다. 짧은 장면에 허구와 함께 조목조목 넣은 역사적 암시도 아주 재미있다.
작품 속 작가인 토미가 초반에 깔아놓은 이런 의미심장한 문장에서부터 알아봤다.
나로서는 아무런 생각조차 없었다. 그는 나를 능숙한 글쟁이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전기라고는 써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장르가, 이른바 전기와 증언을 절충한 새로운 장르가 열릴 시점이었다. 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그가 그랬다고 믿는 것이다. -『콩고의 판도라』, 67쪽
제목을 잊고 한참을 읽다가 아주 나중에 가서야 아, 이 소설의 제목은 이것일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기막힌 작품이다. 판도라의 상자 이제 직접 열어보시라. 암호는... (이 페이퍼의 제목이 힌트 되겠다.)
『토성의 고리』로 다시 돌아와서, 제발트의 화자가 전하는 케이스먼트의 보고서 내용 중.
돈을 향한 탐욕으로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라면 콩고 강 상류를 올라가면서 한 민족 전체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모습을, 성서에 기록된 수난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끔찍하고 심장을 찢는 온갖 사례들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백인 감독관들이 매년 수십만 명의 사역노예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손과 발을 자르는 등 불구로 만들고, 권총으로 사살하는 등의 행위가 규율 유지를 위해 콩고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처벌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라고 케이스먼트는 강조했다. -『토성의 고리』, 154쪽
그리고 『콩고의 판도라』에서 밀림 원정대의 흑인 조력자 '페페'의 대사.
“우리 할아버지는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 분입니다. 백인들은 항상 똑같더군요. 처음에는 선교사들이 와서 지옥을 운운하며 공갈을 칩니다. 다음에는 상인들이 와서 모든 걸 훔쳐가고, 그다음에는 군인들이 옵니다. 다들 나쁜 놈들인데, 나중에 오는 놈들이 앞서 왔던 놈들보다 더 잔인하다는 겁니다. (…)” -『콩고의 판도라』, 2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