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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에세이집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9월을 맞으면서 꼭 읽어보고 싶었다. 9월, 하면 이제는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사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가 막히게 티비화면에 포착된 그 비극을 말함이다.
그런데 아룬다티 로이의 명연설문에서 9월은 2001년의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걸 눈물이 쏙 빠지게 더듬고 있다. 칠레 9ㆍ11(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 팔레스타인의 9ㆍ11(1922년, 영국의 신탁통치 선포)을 비롯하여 미국과 동맹국들이 저지른 수많은 패악질 이후 지나온 숱한 9월들 말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글은 미국 현지에서, 그것도 무려 2002년에 행한 연설인데 괄호 속 간결하게 박힌 ‘박수’와 ‘웃음’ 뿐 아니라 글에 다 기록되지 않은 ‘눈물’이 얼마나 많았을지 가히 상상이 가는 명문이다.
그중에서 첫 (박수)가 등장하는 부분은 여기다. 민족주의에 대한 통찰.
이런저런 종류의 민족주의는 20세기에 일어난 대부분의 집단학살의 원인이었습니다. 국기(國旗)라는 것은 정부가 처음에는 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데 사용하고, 그 다음에는 죽은 자들을 위한 수의(壽衣)로 사용하는 색깔 있는 천 조각입니다.
(사진출처:해커스AP뉴스받아쓰기카페)
수전 손택의 ‘바보’와 완전히 상응하는 바로 그 바보, (“슬퍼할지언정 바보는 되지 말자.”) 지금 우리 주류 언론들이 하고 있는 짓. 어쩌면 책이 낡지 않은 게 아니고 우리가 낡은 건지도 모르겠다.
책에 실린 8편이 모두 10여 년 전에 행해지거나 쓰인 연설과 기고문인데 미국 제국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비판을 기저에 깔고 있는 그것들에 먼지가 앉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가령 세계화에 대한 지적을 보면.
‘자유 시장’이 훼손하고 있는 것은 국가의 주권이 아니라 민주주의입니다. 빈부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저 보이지 않는 주먹이 더욱 큰 역할을 합니다.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줄 ‘달콤한 거래’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다국적기업들은 관련 개발도상국의 국가기구-경찰, 법원, 때로는 군대-로부터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이러한 거래를 추진하거나 프로젝트를 실행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계화’는 가난한 국가에서 인기 없는 구조개혁을 밀어붙이고,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충성스럽고, 부패하고, 가급적 권위주의적인 정부들로 구성된 국제적 연합체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일러스트출처:한국경제)
또한 이 책의 현재성이 우리에게 특히 더 가까이 다가오는 지점은 첫 장인데, 인도에서 대대적으로 행해져오던 댐 삽질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로이는 댐 건설을 반대하다가 어이없게도 ‘법정 모욕’ 이유로 기소되기도 했다.
“50년대에는 댐이 환상적인 기술공학의 위업처럼 보였다는 것이 짐작이 가요, 하지만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이제, 어떻게 지금도 그게 환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자연의 복잡한 과정에 이렇게 대규모로 간섭하는 것은 거미줄에 장화를 신고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물을 내려 보면서 거기에 시멘트를 쏟아 붓는 장면을 상상하라고 가르치니 도대체 이게 무슨 문명인가요?”
훌륭한 글이 이렇게 오랜 현재성을 갖는 것, 그것에 감동하는 것이 과연 벅차기만 한 일인가. 바보는 되지 않아야겠고 분노는 쌓이고. 로이가 주는 답은 ‘저항하라’이다. 말과 행동으로 하는 저항만큼 매일을 살아가는 방식으로도. ‘고통스럽고 또한 기쁘게’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저항하며 살기를 말함이렷다.
‘작가 겸 활동가’라는 명칭에서 ‘침대 겸 소파’가 연상되는가? 로이는 그렇단다. 아룬다티 로이는 그저tout court 작가다. 문장이 낡지 않는, ‘아픈 눈을 뜨고 있는’ 아름답고 강한 작가.
“나의 경우처럼, 평화롭다고 추정되는 상황 가운데에서 한 작가가 불행하게도 조용한 전쟁에 마주치게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일단 그것을 보고 나면, 그걸 안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본 다음에는 입 다물고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발설하는 것만큼이나 정치적인 행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침저녁 낯선, 아마 일 년 전에 익숙했을 그 바람이다. 이번에는 마치 대단한 노력으로 9월을 내가 끌어다 놓는 기분으로 맞아본다(무슨 말인가? 달력을 어제 미리! 넘겨 놓는 놀라운 부지런함으로 이 달을 마중했다는 사실에 다름 아니다).
문득 발 시린 가차 없는 가을에 이번엔 결코 놀라지 않겠다는 듯이.
9월이여, 오라. 살아내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