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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무슨 말을 ㅣ 필립 K. 딕의 SF걸작선 2
필립 K. 딕 지음, 유영일 옮김 / 집사재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과학 소설을 읽는 이유, 아마도 본격소설 특히 우리 나라 여성작가들의 답답한 내면세계에서 벗어나서 보다 확장된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혹은 새롭고 낯선 이야기에 대한 갈망, 미래에 대한 호기심, 우주적 영역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을 엿보고 싶은 마음...
아직 과학 소설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뭔가 매끄럽지 않아 보이는 번역 탓인지 이번 작품은 그다지 흡인력 있게 읽히지 않았다. 특히 '죽은 자가 무슨 말을'이 그렇다. 단편집의 표제로 쓰일 만큼 대표작인 듯 한데 문장이 영 매끄럽지가 않았고 분량에 비해 긴장감이 떨어지면서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미디어를 통제해서 권력을 잡는 그런 내용인 것 같기는 한데. 미디어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특히 잘못 사용할 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예견하는 작품인 것 같은데 졸면서 읽은 탓인지 제일 지루했다는 느낌이다.
반면 "두번째 변종"은 몇 년 전에 다른 작품집에서 읽고 두번째로 읽은 건데도 끝까지 긴장감 있게 읽었다. 이 작품이 쓰여진 시대가 시대니 만큼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연합군과 러시아군과의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다. 연합군이 패배의 위기에 몰리자 대인지뢰 같은 로봇을 개발한다. 이로 인해 전세는 순식간에 연합군에 유리한 쪽으로 역전되고 연합군이 만든 로봇은 자체 생산과 개발을 통해 첫번째 변종, 두번째 변종, 세번째 변종, 네번째 변종을 만들어낸다. 처음에는 러시아군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제작되었던 로봇이 결국에는 연합군과 적군 상관없이 생명체를 찾아 없애는 목적을 갖게 되고 게다가 두번째 변종은 오직 홀로 살아남으려는 목적으로 다른 변종로봇까지 파괴한다. 두번째 변종이 누구일지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한다.
'아무도 못 말리는 M' 에는 살인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네모난 상자 모양의 로봇이 살인을 하고 텔레비전으로 위장을 하기도 하는 정말로 SF소설 같은 이야기가 등장하고,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는 화성탐험에 대한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진짜 화성탐험을 하는 대신 얼마간의 비용을 내고 화성을 여행하고 왔다는 기억을 이식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주인공 퀘일이 실제로 화성에 갔다온 사실이 있음을 알게 되고 화성에 대한 욕망이 누군가에 의해 지워진 기억의 잔재란 것을 알게 된다. 진짜 경험 대신 이식 받은 기억으로 욕망을 실현시킬 수가 있을까.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인간의 기억을 조작하는게 가능하다는 실험들이 있으니까.
'매혹적인 시장"에는 미래로의 시간 여행이 가능한 노파가 등장한다. 미래는 우리에게 익숙한 핵폭발 이후의 세계이며 노파가 사는 세계는 핵폭발 전의 세계다. 작가의 시선이 참 냉소적인데 이 노파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자신만이 가능한 시간여행을 통해 철저하게 이윤만 추구한다. 자신의 가게에 있는 물건들을 트럭에 싣고서 시간의 터널을 통과해서 이제 곧 방사능 먼지가 내려앉게 될 그 황량한 곳에 가서 철저하게 이윤을 남기고 돌아온다. 노파에게 저쪽 세계의 사람들은 자신의 물건을 팔아줄 시장일 뿐이었다. 결국 그 시장을 뺏기지 않으려고 그들의 우주선이 오염된 지구을 탈출하는 것까지 방해한다. 노파는 아직은 안전한 이쪽 세계에 있고 핵폭발은 노파가 죽은 이후에나 일어날 일이며 지금 노파에게는 시장을 잃지 않고 이윤을 남기는 것만이 최고의 목표인 것이다. 작가는 이 노파가 바로 나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고.
'오르페우스의 실수' 미래의 누군가 따분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과거로 여행을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베토벤이나 아인슈타인, 아이작 아시모프 등도 이런 여행자들(뮤즈)이 주는 영감에 의해 위대한 작품이나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창조적 영감이 부족한 주인공 슬레이드는 과거 여행을 통해 과학 소설에 대한 영감을 주려 했던 인물을 무명작가로 전락시키고 만다. 이제 그의 두번째 과거 여행은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서 반대로 자서전을 쓰겠다는 영감을 없애는 것이다. 성공할까. 슬레이드는 뮤즈로서의 능력이 부족하니까,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