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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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피에르 르메트르의 두 번째 소설이다. 첫 번째 소설보다는 충격이 덜하다. 잔인함에서 덜 하기도 하고 흡인력에서도 조금 덜 한 것도 같고. 첫 번째 소설 <이렌>의 내용이 너무 자주 언급되고 있고, 베르호벤 형사의 심리적 갈등, 주변 인물에 대한 잡다한 스케치 등이 너무 많다 보니까 사건진행 속도가 너무 느려서 뒤로 갈수록 지루하다는 느낌을 준다. 잡다한 것은 가지를 쳐내고 내용을 좀더 긴장감있게 요약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 지루함을 넘어서면 마지막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 작품은 그 반전을 위해 쓰여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알렉스는 누가봐도 아름다운 여성이다. 50대의 한 남자가 그녀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골목에서 무차별 폭행 후 트럭에 실어서 납치한다. 그녀가 짐짝처럼 부려진 곳은 버려진 건물이다. 남자는 알렉스에게 옷을 벗게 하고 궤짝에 넣는다. 그리고 궤짝에 줄을 매달아 공중으로 들어올린다. 알렉스는 새장에 갇힌 것이다. 남자는 한두 번씩 와서 물과 사료용 크로켓을 놓아두고 간다. 새장에 갇힌 알렉스는 단 몇 센티미터도 움직일 수가 없다. 남자는 알렉스에게 말한다. 난 네가 말라죽는 것을 보고 싶어. 그것이 남자가 알렉스에게 원하는 것이다. 알렉스는 그가 누군지를 짐작한다. 

 

카미유 베르호벤 형사는 목격자와 함께 납치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도착한다.  이렌이 죽은 후 강력사건을 맡은 건 4년 만이다. 하지만 목격자의 증언으로는 아무런 단서도 찾아낼 수 없다. 다행히 근처 CCTV에 용의자가 타고온 것으로 보이는 트럭이 찍혀 있는 것을 확인한다. 마침내 용의자의 신원이 밝혀진다. 장 피에르 트라리외 50대 남자. 남자를 기다리고 있던 형사들과 마주친 그는 도주 끝에 다리 난간에서 뛰어내려 지나가는 트럭에 치여 즉사한다. 남자의 집과 컴퓨터 등을 조사한 끝에 남자에게는 파스칼이라는 아들이 있고 그가 자신의 여자친구와 함께 행방불명이 된 상태라는 게 밝혀진다. 파스칼과 그의 여자친구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한다.

 

이순간 알렉스는 새장 속에 웅크린 채로 두려움에 떨고 있다. 너무 두렵고 외로운 나머지 남자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랄 정도다. 몸은 점점 마비되어 가기 시작한다. 엄청난 고통과 함께 경련이 일어난다. 크로켓 주위로 한두 마리 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숫자는 점점 늘어난다. 알렉스는 마침내 이 사료용 크로켓이 쥐들을 모으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크로켓이 다 떨어지면 쥐들의 먹이는 알렉스가 되는 것이다.

 

카미유와 강력반 형사들은 납치피해자가 있는 곳으로 출동한다. 이곳은 낙서를 하기 위해 빈 건물을 찾아들어갔던 남자아이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다. 카미유는 작은 몸을 이용해서 맨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건물 안은 시체 썩는 냄새 같은 악취로 가득하다. 마침내 카미유는 현장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곳에는 죽은 쥐 몇 마리와 바닥에 떨어져 조각난 나무상자만 있을 뿐이다. 사라진 것이다. 피해자이자 가해자일지도 모르는 그녀가.

 

그녀는 파스칼과 그 이전에 벌어진 두 살인사건의 용의자이다. 파스칼은 나탈리 불리는 여자가 사는 집의 정원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두개골은 삽으로 수십 번 강타를 당하고 입안으로 부어넣은 황산으로 인해 목은 거의 녹아없어진 상태로. 하지만 그녀의 신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녀가 나탈리, 레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 외에는.

 

카미유가 그녀가 사라진 현장에 도착기 전,  알렉스는 나무판자에 난 가시에 몸을 문질러 몸에서피를 낸다. 바닥으로 떨어진 피에 쥐들이 게걸스럽게 달려든다. 알렉스는 궤짝 위의 동아줄에 자신의 피를 묻힌다. 쥐들을 유인하기 위해서다. 피에 굶주린 쥐들이 동아줄을 갉아먹어 점점 가늘어지기 시작하자 알렉스는 온몸을 이용해서 궤짝을 흔든다. 마침내 궤짝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부서진 궤짝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간신히 빠져나와 건물을 탈출한다.

 

이때부터 알렉스는 피해자가 아닌 살인사건의 용의자로서의 행보를 더해간다. 하지만 그때마다 카미유는 그녀보다 한발작 늦고 나탈리, 레아 등등 불리는 그녀가 누군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사실 알렉스의 탈출 이후부터가 좀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녀의 살인수법이 지극히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도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한 요인인 듯하다. 그냥 무작위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 같다. 물론 모든 추리소설처럼 마지막에 가서야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하나로 모아지긴 하지만. 중간을 넘어서면 긴장감이 떨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책이 많이 두껍다는 것. 한꺼번에 독파하기에는 책이 좀 많이 두껍다. 원래 추리소설이 이렇게 두꺼운 건가. 물론 <이렌>도 두껍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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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이카가와 시 시리즈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임희선 옮김 / 지식여행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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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과 추리가 잘 섞인, 재미있게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추리소설이다. 추리소설에 대한 내공이 전무하므로 이 정도가 잘 쓰여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읽는 내내 재미있었던 것만은 분명하고 캐릭터들도 하나같이 잘 살아있었던 것 같다. 책 표지 때문인지 좀 만화같기도 하고.

 

도무라 류헤이는 이카가와 시립대 영화학과 3학년으로 최근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뭐 야망이 없어보이는 남자라나 뭐 그런 이유로. 작은 영화사 직원인 모로 고사쿠는 도무라 류헤이의 선배로 도무라 류헤이는 졸업 후에는 그가 다니는 영화사에 입사하기로 내정되어있는(?) 상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여자친구에게서 결별을 통보받는다. 작은 도시의 아주 작은 영화사에 입사하려는 남자친구가 영 마땅찮았던 것이다. 곤노 유키는 도무라 류헤이의 전 여친. 우카이 모리오는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쫓기는 도무라 류헤이를 도와 사건을 풀어가는 사립탐정(류헤이의 전 매형이기도 하다.). 그리고 류헤이를 뒤쫓는 스나가와 경부와 시키 형사.

 

도무라 류헤이는 모로 고사쿠의 집에서 '살육의 저택'이라는 영화를 본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술과 안주를 사러 나갔다온 모로 고사쿠에게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샤워를 하러 들어간 모로 고사쿠가 3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자 욕실로 들어가보는데 모로 고사쿠는 칼에 찔린 채 욕실에 쓰러져 있었다. 보통의 추리소설 주인공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논리적인 추리를 감행하며 의연한 태도를 보여야하겠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어이없게도 기절해버려 다음날 아침에야 깨어난다.

 

그때부터 나름대로 머리 회전을 시작하는데 살인이 일어난 이곳은 현관도 창문도 안에서 잠긴 완벽한 밀실이라는 것 그러므로 용의자는 자신이 되리라는 것. 그리고 도무라 류헤이에게 더 충격적인 건 전화를 건 친구에게서 지난밤 살해된 여자가 자신의 전 여자친구 곤노 유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그는 완벽한 용의자가 되었다. 스스로 밀실을 탈출한 그는 두 건의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구분투,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며 사건을 해결나가기 시작한다.

 

사실 이야기가 재미있기는 했는데 범인이 곤노 유키를 죽인 동기가 그다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범인이 곤노 유키를 살해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또 그것을 거꾸로 풀어나가는 과정에서는 감탄할 만했지만 살해동기는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살인에서 동기가 강력하지 않으면 이야기 전체가 맥이 빠지게 된다. 마지막이 아쉬웠던 것이 가장 큰 흠이라면 흠이랄 수도 있겠지만 끝까지 재미를 놓치지 않는 이야기 전개가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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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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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현장을, 기요틴이 사형수의 목을 내리치는 현장을 두 눈으로 목격한 기분이다. 혹시 내가 저 기요틴 아래 목을 내놓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혁명 속의 군중은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하지만 그 속의 한 개인은 또 얼마나 위태로운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이야기다. 전쟁이나 혁명 같은 엄청난 사건은 후대에 남을 역사를 만들지만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의 삶은 제대로 기억되지 않는다.

 

두 도시 이야기는 바로 그 개인의 삶을 복원해내고 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축이 있다. 하나의 축은 혁명의 여파에 휩쓸리기도 하고 맞서기도 하는  마네트 박사, 딸 루시, 사위 찰스 다네이, 루시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시드니 카튼 그리고 그들 모두를 돕는 텔슨 은행원 로리이다. 다른 하나의 축은 혁명을 준비하고 일으키는 드파르주 부부와 수많은 자크들.

 

이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들이 어떤 공간에 있느냐에 따라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런던은 마네트 박사가 잃어버렸던 딸고 함께 생활하면서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하는 곳이고 한때는 에브레몽드 후작의 조카였던 찰스 다네이가 사랑하는 아내 루시와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곳이고, 시드니 카튼이 비록 이제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지만 여전히 연모의 마음으로 루시를 방문할 수 있는 곳이고, 로리에게는 가끔 마네트 박사와 루시 부부를 만나 인생의 말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들은 프랑스 혁명의 발발과 함께 완전히 다른 도시인 파리로 오게 되고 그들은 예전에 누렸던 평화로운 생활 대신 수시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보통의 사람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인간성을 저버리는 일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혁명의 광기가 지배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오히려 더 위대한 인간성을 발휘한다. 마네트 박사는 의사의 신분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시 하기 시작하며 사위 찰스 다네이를 구명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찰스 다네이는 자신의 가문에서 일했던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혁명이 벌어지고 있는 파리로 돌아오고, 루시 역시 탑에 갇힌 남편을 보기 위해 매일 같은 장소를 찾아가다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놓이기도 하고, 로리 역시 찰스 다네이와 루시가 런던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도움을 주고, 마지막으로 시드니 카턴은 찰스 다네이를 기요틴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자신의 목을 기꺼이 기요틴에 내어준다.

 

다른 한 축인 술집 주인 드파르주는 바스티유 감옥에서 풀려난 마네트 박사를 돕는 한편 아내와 함께 혁명의 날을 준비한다. 드파르주 부부의 술집은 수많은 자크들이 운명의 날을 기다리는 곳이며 마침내 그 열망들이 스스로 불타올랐을 때 혁명의 날이 시작된다. 혁명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광포해지고 잔인해진다. 그 잔인함의 일면을 보여주는 인물이 드파르주 부인이다. 그녀에게도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언니가 에브레몽드 후작에게 농락당하고 그 와중에 가족이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녀에게 귀족은 자신의 적이고 시민의 적이며 처단해야할 대상일 뿐이었다. 그녀는 맹목적인 복수심에 휩싸여 에브레몽드 후작의 조카인 찰스 다네이를 기요틴으로 끌고 가려한다.

 

조금 의아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것은 혁명을 일으킨 인물들을 지나치게 잔인하고 때로는 드파르주 부인처럼 비열한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아마도 영국인에게 프랑스 혁명은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위협이었고 그래서 혁명의 위대함만을 그릴 수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혁명이라는 말 자체는 순수하다. 하지만 혁명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순수하지만은 않으므로 드파르주 부인 같은 인물이 탄생했을 것이다.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잔인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혁명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위대함, 그리고 잔임함 중에 찰스 디킨스가 어느 쪽을 더 강조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둘다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인간은 두 가지 면 모두를 가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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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격 -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일상인문학 3
페터 비에리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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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많이 지루하다. 만약 중간중간 인용된 희곡작품들과 경험담 같은 사례들이 없었다면 읽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저자는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 만남으로서의 존엄성, 사적은밀함을 존종하는 존엄성 등 8개의 장으로 나누어 무엇이 존엄성인지 또한 존엄성이 얼마나 훼손되기 쉬운 것인지를 보여준다.  

 

1장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에서는 난쟁이 멀리 던지기 대회를 통해 인간이 수단으로 이용될 때 존엄성이 훼손된다고 보았다. 비록 그 난쟁이가 스스로 선택한 행위라고 해도 인간의 손으로 던져지는 난쟁이는 그 자체로 목적인 존재가 아니라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이런 대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고 난쟁이 스스로 그 일을 자처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존엄성을 판 행위였다.

 

 2장 만남으로서의 존엄성. 80년대 초 독일 겔젠티르헨에 사는 어느 남성이 피프쇼라고 불리는 나체쇼를 정식으로 허가해달라는 신청을 냈다.  피프쇼는 회전무대에 등장하는 나체의 여자들을 관객이 지켜보는 형태의 스트립쇼인데 관객이 각자 1인용 캐비닛에 들어가 동전을 넣으면 일정 시간 동안 조그만 창문이 열리는 방식이기 때문에 여자는 관객을 볼 수 없다. 두 가지 상반되는 판결이 흥미로운데 피프쇼를 허가하려는 재판부는 관찰자의 익명성과 회전무대에 선 여성이 관객과 눈이 마주치지 않는다는 상호대면의 차단성이 여성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방식이라고 이해했다. 반면 상위 재판부에서는 바로 여성이 상대방 남자를 볼 수 없다는 점이 여성이 단순한 물체 또는 욕망의 생산을 위한 도구로 격하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바로 만남으로서의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3장 사적 은밀함을 존중하는 존엄성에서는 에드워드 올비의 희곡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를 인용한다. 오랜 기간 결혼 생활을 해온 마사와 조지 부부는 자신들이 초대한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만 알고 있는 상대방의 치부를 드러내면서 상대방의 존엄성에 상처를 내고 굴욕감을 준다. 그들의 치부를 그들만 알고 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이 제3자에게 알려졌을 때 존엄성이 훼손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위협받고 있는 존엄성이 이것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켜지고 싶은 비밀이 어떤 통로를 통해 드러나버릴 지 알 수 없는 사회가 되었고 심지어 그 비밀 때문에 개인의 삶이 철저히 파괴되기도 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니까.

 

4장 진정성으로서의 존엄성. 에마뉘엘 카레르의 책 <적>에는 실제로 있었던, 평생 주변 사람들을 속이며 살았던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장클로드 로망은 의대에 진학에서 12년 동안 날조된 병원진단서를 가지고 의대과정에 새롭게 등록하기를 반복한다. 결혼 이후에는 세계보건기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는 거짓말을 하고 생활비를 가져다주기 위해 친지들에게 사기행각을 반복하다 결국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게 된다. 저자는 로망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느끼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진짜이게 하는 의지, 거기에 한 인간의 참됨이 놓여 있다. 이 참됨을 이루는 것은 사실을 견디는 용기이다. 로망이 존엄성을 상실한 것은 바로 이 용기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253-

 

자신에 삶에 정직한 것, 주변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존엄성을 지키는 한 방법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5장 자아존중으로서의 존엄성.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희곡 <노부인의 방문>은 인간이 어떻게 타인의 자아존중심을 짓밟고 파괴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노부인 클라라 배셔는 처녀였을 때 알프레드 일이라는 남자의 아이를 가진다. 알프레드 일은 법정에서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부인한다. 그는 두 사람의 증인을 돈으로 사서 그녀와 동침했다는 거짓 증언을 하게 한다. 클라라 배셔는 소송은 기각당하고 이후 그녀는 매춘부가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여러 가지 사업으로 성공한다. 귈렌 시로 돌아온 그녀는 돈으로 복수를 시작하는데 알프레드 일이 살해당함으로써 1차적인 복수가 이루어진다. 노부인은 귈렌 시민들을 돈으로 유혹해 그들의 자아존중심을 잃게 만듦으로써 2차적인 복수에 성공한다. 예전에 자신이 귈렌 시민들에 의해 존엄성이 훼소되었던 것처럼.

 

6장 도덕적 진실성으로서의 존엄성. 로만 프리스터의 자서전 <납작모자 혹은 목숨의 대가>에서 주인공 프리스터는 나치 유태인 수용소에서 강간을 당하고 가해자에게 납작모자까지 빼앗긴다. 이 납작모자를 쓰지 않은 수용자는 총살당한다는 규정 때문에 프리스터는 다른 남자에게서 납작모자를 훔쳐온다. 심지어 프리스터는 행복한 기분으로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다. 이 사건에 대해 작가는 말한다.

 

프리스터의 관점은 달라졌다. '어둠의 시대에 속해 있던 사건을 빛의 시대의 관점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죄를 이해하지 못한 채 봉해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올바른 시각을 찾으려는 시도가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모습이 존엄성의 모습일 수 있다.  -335-

 

지금의 시각으로 프리스터의 행동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려야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다. 도덕적으로 진실하냐 그렇지 않느냐는 상황과 시대에 따라 달라지므로.

 

7장 사물의 경중을 인식하는 존엄성,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은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는 한 여인의 시도를 그린다. 어릴 때는 아버지의 인형으로 결혼해서는 남편의 인형으로 그저 편안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며 사는 것이 중요한 지의 선택에서 로라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녀 또한 다른 모든 이들처럼 자신의 행위와 감정이 진짜로 참된 것인지, 그리고 중요한 것을 찾기는 했는지 때때로 불안에 휩싸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말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무를 깨달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존엄성을 이룬다. -382-

 

그녀의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겠다. 다만 자신의 행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옳다고 믿는 길을 가려고 애쓰는 것 자체에서 존엄성을 찾을 수 있다는 건 이해되는 부분이다.

 

8장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 노화나 질병은 주체로서의 독립성을 잃어버리게 하고 이로 인한 인간관계의 상실은 인간의 존엄성을 위험에 빠뜨린다. 인간이 맞이하는 마지막 과정인 죽음은 가장 존엄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그 순간을 이렇게 맞아야 한다고 말한다.

 

한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인생과 그의 마지막 모습이 서로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 죽음의 존엄성이 가지는 기본 개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각자 서로 다른 개별적 죽음의 과정, 자신만의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뜻이다. -419-

 

지금 우리가 맞는 죽음의 순간이 한 사람이 평생 살아온 모습과 어울릴까. 이젠 모든 사람은 병원이라는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마치 죽음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 같다. 나의 죽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진정 존엄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나는 존엄한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다른 사람을 나와 같은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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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범죄를 공부하는가 - 최고의 프로파일러 표창원 박사의 두려움 없는 공부
표창원 지음 / 다산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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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유년시절부터 최근인 표창원범죄과학연구소를 설립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범죄심리연구나 프로파일링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위해 이 책을 선택한다면 많이 실망할 것이고 그의 삶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면 꽤 흥미있는 책이 될 것이다. 대중매체를 통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표창원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왜 경찰이 되었고 어떻게 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파일러가 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은 충분한 읽을 거리를 제공한다.

 

유년시절의 표창원에게 드리워진 가장 큰 그림자는 어머니와 아버지와의 잦은 불화였다. 그로 인해 폭력성향이 강한 아이로 성장한다. 초등학생이 된 뒤에는 어린이용 셜록 홈즈 시리즈, 톰 소여의 모험, 보물섬, 삼총사 류의 이야기에 폭 빠져 꼬마탐정 노릇을 하며 지냈다. 반면 폭력적이고 도둑질을 하는 아이이기도 했다. 형과 다투다 칼을 휘둘러 형의 손을 못쓰게 할 뻔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늘 배움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스스로 흥미를 찾고 흥미를 느끼는 것에 대해선 집중해서 공부하는 아이였다. 불안정한 성장환경에도 오늘날의 그가 있게 된 건 배움에 대한 열망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선, 선의 곧 사랑 덕분이었다.

 

나와 이름이 같은 범죄자 신창원을 분석하다가 그의 어린 시절 모습이 나와 너무 닮아 놀란 적이 있다. 다만 나에게는 그가 만나지 못한 천사들이 있었다는 게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세상에 '선'과 '선의'가 있다는 믿음을 준 그 천사들. 나는 아무리 커다란 분노가 일어도, 욕심이 들끓어도, 궁핍해도 결코 그 '선'의 세계를 침범하거나 해쳐서는 안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24-

 

주변 사람들의 '선', '선의'가 있느냐 없는냐에 따라 한 사람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범죄자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프로파일러가 되었다.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과연 우리 사회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외로운 아이들에게 선의를 베푸는 사회인가. 만약 그 선의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사회라면 신창원같은 범죄자들이 점점 더 많이 양산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 책은 공부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저자가 영국유학을 떠난 것도 범죄심리나 범죄학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프로파일링이나 범죄심리를 공부한다는 개념이 아예 없었고 범죄수사나 경찰업무에 관한 건 현장에서 배우면 된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영국 유학을 선택했다. 그것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

 

저자가 어린 시절 폭력 충동이 강했고 어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비행이라고 할 수 있는 일들을 많이 저질렀지만 그래도 똑바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하는 공부의 재미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툼이 많았던 부모였지만 저자의 부모는 공부에 대해서만은 적극적이었고 아버지는 그에게 직접 영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저자는 말한다. 공부는 두려움을 벗어나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우리 청소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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