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의 요정 - 일기들 민음사 탐구 시리즈 9
유리관 지음 / 민음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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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박살 난 한국어를 구하기 위해 지옥에서 온 무명용사.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가 혼탁한 언어 생태계에서 한국어를 구하기 위한 문화운동이었다면 유리관의 ‘교정의 요정’은 망한 세상에서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노동자의 분투기이자 선언문이다. 말 되는 세계를 위한 말 싸움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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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 컴북스 이론총서
김환석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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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브뤼노 라투르>와 한 쌍을 이루는 탄탄한 라투르 입문서가 나와 반갑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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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
김경수 지음 / 필로소픽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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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이 세상에 나왔고, 이제 우리는 밈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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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4-06-18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 너무 읽고 싶어요 ㅌㅋㅌㅋㅋㅋㅌㅌㅌ
 
자서전의 규약 현대의 문학 이론 30
필립 르죈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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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을 제목으로 한 책 두 권을 낸 불문학자 유호식의 자서전 아닌 <자서전>, 자서전-자전적 소설 연구서 <자서전: 자신의 삶으로 이야기를 만들다>을 읽고 있다. 민음사에서 나온 전작 <자서전: 서양 고전에서 배우는 자기표현의 기술>에서 앙드레 지드, 나탈리 사로트, 샤토브리앙, 미셸 레리스 같은 문학가와 루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몽테뉴,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철학자들을 골고루 다뤘다면 서울대출판문화원에서 나온 후속작 <자서전: 자신의 삶으로 이야기를 만들다>는 대부분 '자전적 소설'로 분류될 만한 작품들(바르트의 <애도 일기>, 루소의 <외로운 산책가의 몽상을 제외하고)을 대상으로 작품론/장르론을 펼치고 있다. 필립 르죈의 <자서전의 규약>이 문학 이론서에다 번역서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잘 읽히지 않아서 유호식의 <자서전>으로 갈아탔다.

먼저 <자서전의 규약>을 짚고 넘어가 보려 한다. 자서전 장르를 문학의 한 갈래로서 본격적으로 다룬 거의 유일한 이론서, 비평서라 할 수 있는 필립 르죈의 <자서전의 규약>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장르로서 자서전을 성립시키는 '게임의 규칙'을 설명하는 1부 '규약', 루소-지드-사르트르 작품론이 수록된 2부 '자서전 읽기', 문학사의 관점에서 자서전을 논의하는 3부 '역사'로 구성되어 있다. <자서전의 규약>이 해당 분야에서 교과서의 위상을 누리고 있다는 명성에 걸맞게 깔끔한 솜씨로 장르를 정의하고 있었다.

"한 실제 인물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소재로 하여 개인적인 삶, 특히 자신의 인성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산문으로 쓰인 과거 회상형의 이야기"

실제 인물이 자기 삶을 회고적으로 쓴 이야기 정도로 간추릴 수 있겠다. 르죈이 밝힌 이 책의 탐구 목적은 "자서전 텍스트가 기능하도록 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그것을 읽는 독서 행위를 통하여 자서전 텍스트의 기능 작용을 살펴보는 것"이다. 쓱 훑어본 인상으로는 야우스의 수용 미학과 언어학/기호학(뱅베니스트가 자주 언급된다)을 접목해 '자서전 텍스트의 기능 작용'을 살펴본 것처럼 보였다. 르죈의 말을 빌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 번째 연구 「자서전의 규약Pacte autobiographique」에서 내가 보여주려고 한 것은, 자서전 장르가 그에 포함된 형식적 요소들보다는 그 텍스트에 대한 ‘읽기의 계약contrat de lecture’에 의해 정의되며, 따라서 역사적 시학은 읽기의 계약의 체계, 그리고 그 계약들의 통합적 기능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필립 르죈은 '규약' 파트에서 저자와 화자 그리고 주인공 간의 동일성 문제, 주인공의 인칭 문제 등을 논하며 형식적으로 자서전과 전기를 구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표준적인 형식을 정의하고 장르의 규칙을 규정할 수 있을 때, '자서전 연구'가 학술적으로 가능해지고 축적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척자로서 르죈의 성취는 칭찬받아 마땅해 보인다.

언어적 형태

a) 이야기 recit

b) 산문으로 되어 있을 것

2. 다루어진 주제: 한 개인의 삶, 인성의 역사

3. 작가의 상황: 저자(그 이름이 실제 인물을 지칭함)와 화자의 동일성

4. 화자의 상황

a)화자와 주인공의 동일성

b)이야기가 과거 회상형으로 씌었을 것

(17)

-회고록memoires(조건 2 부족)

-전기biographie(4a)

-한 개인의 삶을 그린 사소설roman personnel(3)

-자전적 시poeme autobiographique(1b)

-내면 일기journal intime(4b)

-자기 묘사 이야기 autoportrait 혹은 수필essai(1a와 4b)

자서전은 사실상 저자의 고유명이 제목에 해당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국역본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제목이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인 것처럼... 자서전은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이고, '저자-화자-주인공' 동일성이 지켜지고 있다는 '읽기의 계약' 하에 독자들은 네루다의 인생사를 읽는 것이다. 르죈은 "저자란 결국 출간된 일련의 여러 가지 텍스트에 책임을 지닌 동일한 인명"임을 강조한다. 르죈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시작하는 전기biography의 유구한 역사적 줄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기원으로 삼는 'Memoir' 장르의 역사와 '자서전Autobiography'를 구분 지으며 '근대의 장르'로서 자서전을 탐구하고 있다. 근대적 개인과 더불어 탄생한 이 특수한 사적인 글쓰기는 (일반적으로) 일대기적 서술을 통해 인생의 의미/목적을 종합적으로 서술하는 걸 겨냥한다. 파편화된 일상을 열거하는 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서사적인 구조 속에서 인생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를 꿰어 보고자 하는 불가능한 야심, 끝(모든 걸 한눈에 볼 수 있다고 가정되는 위치)에 서서 처음부터 모든 과정을 (회고의 한계를 무릅쓰고) '다시' 보고 기록하겠다는 욕망...

자서전의 규약은 하나의 총체이다. 자신의 인생을 자기 이름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인생의 의미를 정해야만 한다. 또한 자신의 인생을 모두 감싸안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종합이 필요하며, 과거의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의 자신을 설명해야만 한다. 스스로 작품 속에 개입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지드는 자서전이 갖는 이 모든 양상이 탐탁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기’라는 개념이 그 안에 제한과 인위성을 포함하는 함정이라고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내가 나 스스로를 인위적으로 모방하면서 나의 인생에 있어서 모조의 단일성을 일구어내겠는가?”, “이틀 후면 51세가 되는데도 아직도 나 자신을 모르다니! 무엇인가가 다 뒤섞여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이다. 사실 나는 스스로를 분석하려고 애쓰지도 않지만 말이다”, “나는 나의 느낌들을 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262)

저자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자서전을 쓴다면 독자는 타인의 자서전을 왜 읽는가. 역자 윤진은 "허구의 삶 속에 가능한 자기의 삶을 투사하는 간접 체험인가? 타인의 내면을 궁금해하는 은밀한 엿보기인가?" 운을 띄우며 결국 자서전을 읽는 독서 행위는 "자아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몸짓"이 아닐까 하는 화두를 던진다. 서사화된 인생 텍스트에 독서 행위를 통해 개입함으로써 '자아 정체성 회복'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이뤄질 수 있는지 규명하려면 지면이 꽤 많이 요구될 텐데... 차차 고민해 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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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읽은 책들
이윤영.이상길 지음 / 이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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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읽은 책들>은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의 이상길(문화연구)과 이윤영(영화 이론)이 공저한 서평집이다. <책장을 번지다, 예술을 읽다>의 후속격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출판문화>에 연재한 ‘생각, 시대를 바꾸다’를 모태로 하여 ‘한국 사회와 서구 사회에서 인식의 전환을 일으킨 책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읽자’는 기획의 산물이다. 비슷한 성격의 책으로 김호기의 <현대 한국 지성의 모험: 100년의 기억, 100년의 미래>, <세상을 뒤흔든 사상: 현대의 고전을 읽는다>, 정종현과 천정환이 공저한 <대한민국 독서사: 우리가 사랑핸 책들, 지의 현대사와 읽기의 풍경> 등이 떠오른다. 일련의 책들과 <우리를 읽은 책들>이 변별되는 지점은 서평의 대상이 된 책들이 1980~2000년대에 초판이 출간된 책에 집중되어 있고, 이상길이 담당한 2부 번역서 파트는 사회학 분야, 프랑스 이론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다시 읽기’가 꼭 축자적 의미가 아닌 은유적 의미였을지라도 아마 자신에게 친숙하고, 개인적으로 의미가 큰 책을 선정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주관적인 독서 체험과 프랑스에서 유학했고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 재직 중이라는 저자들의 학문적 배경 및 위치가 맞물려 1980~90년대 인문사회 분야를 재구성하는 관점을 하나 더 얻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살짝 덧붙이면 두 저자 모두 문학과지성사에서 저서와 역서를 꾸준히 출간해 오고 있는 만큼 인연이 깊고, 이음 출판사 대표 주일우는 문학과지성사 대표를 역임한 바 있다(이런 ‘문지적’ 취향, 세계관이 묻어나는 대목은 박상륭과 이오덕 파트라고 느꼈다. 박상륭은 저자 선정의 차원에서, 이오덕은 <우리 말 바로 쓰기>를 언어에 천착해 서술한다는 차원에서).

책 제목이 우리‘가’ 읽은 책들이 아닌 우리‘를’ 읽은 책들이다. 이는 단순히 상투적인 표현을 피하기 위한 수사학적 전략이 아니라 일련의 ‘시차적 재독’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우리를 읽은 책들‘은 ’우리를 읽은 영화들‘을 말한 세르주 다네의 글에서 차용한 표현이다.

“장-루이 쉐페르가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에서 ‘우리의 유년 시절을 지켜보았던 영화들’에 대해 말했을 때, 내게는 이 표현보다 더 아름다운 표현이 없었다. 어떤 영화들이 우리를 점점 덜 지켜보는 영화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 영화들을 ‘직업적으로’ 보는 법을 배우는 것과, 우리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고 우리 자신을 지켜보았던 영화들[…]과 사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7~8)

이윤영은 ‘우리를 읽은 책들’이 무엇인지 이렇게 서술한다.

우리 서평의 대상이 된 책들은 일단 우리가 읽은 책들이지만, 우리와 같이 살면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며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된 책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들은 우리를 ‘읽었다’, ‘읽다’라는 동사에는 독서라는 일차적인 의미 말고도 ‘마음을 읽다’에서처럼 ‘이해하다’, ‘뜻을 헤아려 알다’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런 책들과 만난 순간을 되돌아보면, 결국 독서가 삶과 현실로 돌아가는 하나의 방법이며, 그것도 상당히 강력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우리의 자의식을 일깨워주며, 불가능한 세계가 아니라 가능한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고, 세계를 다르게 살 수 있는 힘은 대부분 어떤 책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9)

‘우리와 같이 살면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며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된’ 책들을 잊어버린다면 ‘배운’망덕한 사람(실제 본문 표현이다)이 될 것이기에 배덕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쓴 글. 이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인상이라면 혁명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가능한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는 책들의 계보를 재구성하는 대안적 정전화, 대안적 역사 쓰기에 대한 열망이 살짝 엿보인다. 발터 벤야민을 시작점으로 브뤼노 라투르로 끝맺는 선을 보면 아마 마르크스주의 계열 지식인들 중엔 실망(?)을 금치 못하는 이가 있을 것 같다. 프레드릭 제임슨, 가라타니 고진, 루이 알튀세르 같은 인물이 ’컷오프‘(?)됐고, ’적대‘나 ’투쟁‘을 얘기하는 좌파 사상가가 아닌 ’외교‘를 말하는 브뤼노 라투르를 이 책의 대미로 장식하며 실상 ’현대의 고전‘ 같은 위치에 자리매김시킨 것에 대해.

그런 점에서 ‘우리를 읽은 책들’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주체의 성격을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앞서 저자들의 학문적 배경을 간략히 짚긴 했지만 특히 새삼스럽지만 세대를 강조하고 싶다. 1980~90년대 대학을 나와 프랑스에서 유학했다는 공통점은 ‘우리를 읽은 책들’ 목록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생에게 <88만원 세대>, <은하영웅전설>, <몰락의 에티카>,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같은 이름이 자신과 무관하기 어려운 것처럼 <전태일 평전>, <김수영 전집 2: 산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우리 글 바로 쓰기> 같은 제목은 저자가 책을 언제 읽었는지가 중요하게 느껴진다. 만약 이윤영보다 후속 세대인 사람이 저자였다면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을 읽는다는 사실(한국과 프랑스의 교육적, 문화적 격차에 대한 인식)을 알아차린 데서 비롯한 설움을 김수영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해소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았을까 가정해 본다. 혹은 프랑스 고등학생은 칸트나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는다는 교육적, 문화적 풍토의 차이를 인터넷의 발달, 프랑스 유학생 네트워크의 통시적 연결을 통해 이미 상식처럼 알게 되어 설움이 아닌 다른 감정을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해 본다.

번역서를 담당한 이상길 파트를 보면 ’우리를 읽은 책들‘ 다시 읽기의 방향성이 좀 더 뚜렷하게 도드라지는 느낌이 든다.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딱지를 달고 무분별하게 수용되었던 이론을 배태한 사회역사적 시간선과 현재 한국 사회의 시간선이 겹치기 시작했으니 이제 진지하고 성숙하게 이들을 다시 읽고, 주체적으로 연구하자는 요청이 반복적으로 제시된다(이는 이상길의 저서 <아틀라스의 발: 포스트식민 상황에서 부르디외 읽기>를 관통하는 문제 의식이기도 하다). 누구를? 부르디외, 보드리야르, 푸코, 엘리아스를. 푸코의 경우, 매우 거칠게 계보를 그려 보면 김현-오생근-박정자-이규현-이정우를 거쳐 허경, 심세광+전혜리, 이상길이 푸코를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만들었고, 김민철, 배세진, 이우창 같은 신진 연구자들이 세계적 수준의 ‘푸코학’을 동시적으로 호흡하며 지식을 생산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이제 ‘~~ 담론 분석’ 식으로 푸코를 써 먹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현실을 푸코적으로 연구한 학문 성과가 나올 조짐이 보인다는 거다(이를테면 <기계, 권력, 사회>의 박승일의 사례를 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을 몇 가지 소개해 보려 한다.

어떤 책은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길 희망한다.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책이 독자로 하여금 사회를 변화하게 만들어 더 이상 책이 읽히지 않는 세상이 도래하는 게 쓰이지 않은 결말이 완성되는 경우를 말한다.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더는 읽히지 않는 세상이 도래하길 꿈꿨다. 이윤영과 이상길은 각각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과 피에르 부르디외의 <자본주의의 아비투스>를 논하며 이렇게 글을 끝맺었다.

『전태일 평전』을 읽을 필요가 없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다. 전태일도, 조영래도 기억할 필요가 없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겉보기에 시대와 상황이 아무리 바뀌어도, 또 단어 하나하나가 아무리 무거워도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이름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전태일, 그리고 조영래. (47)

『자본주의의 아비투스』는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빈민, 실업자, 혹은 청년들이 새로운 약탈적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서 어떻게 적응(또는 부적응)하고 있는지, 그들의 꿈과 좌절과 분노는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는지, 그 정치적 효과는 과연 무엇인지 묻게 만든다. 이 책이 아직 말할 것이 남은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184)

1960년대의 알제리, 1970년대의 한국 사회의 모순은 2024년 한국에도 여전히 잔존해 있다. 구의역 김군, 김용군 같은 청년 노동자의 비극적인 죽음은 전태일이 막고자 했던 바로 그 참혹과 양상이 다르지 않다. 여전히 전태일이 노동자의 대표적인 표상으로 자리하는 현상은 전태일에 대한 평가를 막론하고 그 자체로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윤영이 다룬 책 중 의외였던 책이 두 권 있다.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이오덕의 <우리 글 바로 쓰기>. 전자는 주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나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같은 책에 밀려 비슷한 기획물에서 다뤄진 걸 보지 못했고, 후자는 프랑스에서 유학한 영화학자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우리말을 지향한다고 알려진 이오덕의 글을 선정했다는 점에서 놀랐다. 책을 읽고 나니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할 것 같다는 선입견과 달리 ‘한국적 미’를 경험적으로 포착하고자 ‘오래 지켜보는 시선’을 지녔던 이의 독보적인 미학적 에세이였고, <우리 글 바로 쓰기>는 우리 글을 우리 말의 어법에 맞게 바르고 정확하게 쓰는 걸 본질로 삼는 ‘한국어 글쓰기’의 고전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특히 이오덕이 우리 말 살리기 ‘운동’을 전개했고, 이 운동 전략의 맥락을 살펴야 한다는 주장은 항간에 ‘이오덕주의’라는 이름으로 매도되는 이오덕 발화를 다르게 이해하게 만들었다. 이윤영에 따르면, 이오덕은 순 우리말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우리 말이 한글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넉넉하게 인정한다.(104) 그렇다면 이오덕에게 깨끗한 우리 말의 기준은 무엇인가? ‘살아 있는 말’이 깨끗한 말이다. 탈식민-신식민 상황이 혼재하면서 외국어식 표현이 오남용되었던 때에 이오덕의 언어 ‘정화’ 운동은 자아-민족의 순수한 형이상학에 대한 노래가 아니라 언어의 주권을 실제 사용자인 언중에게 돌려 주려는 기획이었다. ’아래로부터‘ 깨끗한 우리 말을 바로 세우고, 그럼으로써 생각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주체성 회복의 실천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예전에 내가 어디선가 읽고 마음에 새긴 쇼펜하우어의 문장은 ‘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생각이 명확하지 않다는 뜻이다’였다. (…) “표현이 모호하고 불명료한 문장은 언제 어디서나 정신적으로 매우 빈곤하다는 반증이다. 이처럼 표현이 모호하고 불명료한 것은 십중팔구 사상이 불명료한 때문”이며 “명료하게 생각한 것은 쉽게 적절한 표현을 발견한다. […] 난해하고 애매하고 엉클어지고 불명료한 말을 조합하는 자들은 […] 실제로는 아무것도 말할 게 없다는 사실을 가끔은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숨기려고 한다.” (…) 이는 정확히 이오덕의 생각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의 어떤 말도 그 생각과 하나로 붙어 있는 것이고, 생각이 말로 나타난 것입니다. […] 말은 잘못되었는데 생각만을 바르게 가질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104~105)

끝으로 독서와 서평의 의미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논한 이상길의 후기를 옮기며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프루스트에 의하면, 우리는 고독 속에서 책과(또는 책을 매개로 저자와) “진실한 우정”의 관계를 맺는다. 내 앞에 현존하지 않는 사람과의 이 우정은 가볍고 변덕스럽지 않으며, 이해타산을 넘어선다. (…)이 순수한 우정의 공기atmosphere는 침묵이다. 그것은 말보다 순수하다. 말이 타인을 위한 것이라면, 침묵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또한 말과 달리 침묵 속에는 우리의 결점이나 가식이 들어있지 않다. 그것은 순수하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공기이다. […] 책에는 일관성이 있다. 사실 이러한 일관성은 우리 삶에서는 불가능하다. 우리 삶에는 인간관계들rapports이 있고, 또 그 때문에 우리 사고에도 여러 이질적 요소가 끼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에는 일관성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우리는 저자 생각의 중심선을 곧게 따라갈 수 있으며, 저자의 여러 특성을 고요한 거울에 비친 것처럼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242~243)

그러니 모든 서평은 서평가가 독서를 통해 저자(정확히는 책)와 맺은 “진실한 우정”의 산물이고, 이를 또 다른 독자와 나누고자 하는 초대장이다. <우리를 읽은 책들>은 내게 ‘우리’라는 침묵과 우정의 공간을 만들라는 요청으로 다가왔다. 이 ‘우리’는 독서를 통해 독자인 나와 책-저자가 맺은 관계일 수도 있고, 이상길과 이윤영처럼 서로 상대방이 쓴 글을 읽고 장문의 이메일 대화를 주고받는 관계일 수도 있다. 1990년대생 친구와 ‘우리를 읽은 책들’은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읽을 책들’은 무엇일지 오래, 아주 오래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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