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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레플리카
윤이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월
평점 :
대니
한 달 전, 한국에서 전 세계가 주목하는 경기가 열렸다. 한국 국적의 이세돌과 영국 국적의 알파고의 대결이었지만 이 대결은 인간 대 기계(인공지능)의 대결로 인식되었다. 경기 전 바둑전문가들 사이에서 이세돌의 압승이 예상되었지만 결과는 1:4 참패로 끝났다. 1국에서 해설위원들은 알파고의 수를 ‘정말 사람이 두는 것 같네요’라고 평가했지만 이세돌의 완패 이후부터는 ‘인간이라면 도저히 둘 수 없는 수예요’라고 평가했다. 낙관론과 비관론이 쏟아졌고, ‘인간다움’에 대해 성찰하자는 제3의 의견이 사설과 칼럼을 채웠다. 나는 알파고의 출현 앞에 ‘인간’이란 동일성-정체성으로 뭉치는 대중들의 휴머니즘이 불편했고, 빅데이터와 딥러닝을 통해 감정까지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출현하면 인간의 유적 본질이 해체될 거란 생각에 머리가 멍했다. 아무리 상상을 해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실감이 나지 않는 초현실적 상황이 근미래에 당도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도착한 것이다. 스파이크 존즈의 <Her>가 심심찮게 회자되었고, 나는 지금까지 SF 영화와 다른 방식으로(<A.I.> 등) 감정을 가진 로봇을 묘사했다고 평가받은 <엑스 마키나>를 서둘러 봤다.
대국이 끝나고 일주일 정도 모든 것들을 기계의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호르몬 환원주의나 기계론적 환원주의에도 결코 정복되지 않을 것 같았던 정신이나 감정까지 빅데이터와 딥러닝에 의해 정복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유전자 속 ‘저장’된 진화적 정보들이 일종의 빅데이터라고 친다면 나도 단백질 컴퓨터였다. 저장능력도 정보처리능력도 ‘알파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후진’ 고물... 양심이 프로그래밍되어 있고, 알고리즘이 yes로 가면 죄책감을 느끼고, no로 가면... 컴퓨터 공학적 지식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망상에 빠져 허우적대던 때 ‘대니’를 만났다.
아름다워
라고 말할 줄 아는 동갑내기 청년을. 나라면 그런 생각 혹은 마음이 들어도 사회적 관습을 의식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거나 오해를 살까봐 끝내 발설하지 않았을 말을 ‘진심’으로 할 줄 알고, 할 줄 아는 것을 하는 ‘대니’. 그에게 아름답다는 진술 혹은 고백을 들은 ‘나’는 ‘소주를 천천히 목으로 넘’겨야 ‘사람이라는 더 높은 존재로 회복되는 기분’을 느끼는 기계적 일상을 살고 있는 할머니이다. 직업세계에서 은퇴한 후 자식의 자식을 맡아 육아노동을 하는 게 할머니로서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그녀에게 허용된 감정은 모성애와 우정 정도이다. 기술적으로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무성(無性)적 감정만 허용된 그녀에게 ‘대니’는 연인들의 언어를 속삭인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얼룩이 지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대니의 몸에는 (물리화학적으로 거짓이겠지만) 할머니의 몸이 들어와 있다. 대니가 기억하려는 기억은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이고, 이는 결국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을 새긴 의 자신의 몸, 어쩌면 자신의 몸에 섞여 있는 '우리'의 몸이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흉터를 보며 그와 함께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가 연상되고, 그 이미지(기억)가 육화된 물질이라 한다면 우리 안에 우리의 몸이 없다고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하지만이란 말이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 하지만 ‘하지만’이란 말이 존재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대니가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 했던 자리에 할머니는 남았고, 대니는 영영 떠났다. 할머니는 ‘그를 사랑했고, 죽였다.’ ‘이것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진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실도 거짓도 아닌 세계 한구석에서 할머니는 대니를, 대니와의 기억을, 대니를 사랑했던 자신을, 대니와 자신 사이에 존재했던 사랑을, 홀로그램 같은 사랑의 흔적을 견디며 살아갈 것이다. 설령 그것이 대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수많은 길 중 오답이라 하더라도, 오답이란 걸 뒤늦게 깨닫는다 해도, 그래서 죽고 싶을 만큼 미안하고 가슴이 미어져도 그것까지 견뎌내며 살아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