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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평점 :
우리는 가끔 신중함에 대해 얘기하곤 한다. 선택의 기로에 선 이에게 ‘신중하게 생각해’ 같은 말을 한다. 상대방이 생각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위험부담이 커 보일 때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봐’라고 말하기도 한다. 신중함은 사실 ‘매우 조심스러움’을 뜻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중함이란 기표를 나눌 때 실제로 전달되는 기의는 미래의 위험에 대한 불안이다. 조심하란 소리다. 보이지 않은 위험에 눈을 고정하라는 말이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위험한 위험에 집중하라는 주문이다. 그래서 ‘신중한 생각’은 사태의 본질에 천천히 침윤해 본질에 닿는 사색이나 성찰과는 거리가 있다. 사태와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둬 생각의 공간을 확보함에 있어 동일하나 그 공간에서 이뤄지는 생각의 운동양상이 판이하게 다르다. 우리가 삶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는 수학문제처럼 간결하게 정돈되어 있지 않다.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작업, 문제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문제해결의 첫 걸음이다. 문제가 파악되지 않으면 문제와 문제가 아닌 것 사이에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 혼란을 겪다 이내 소진되기 십상이다.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이 한 작업도 바로 이런 정리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칸트는 이성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이성의 규제적 사용을 종용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지금까지의 철학이 ‘언어의 문제’였다고 규정지은 후,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나눠 ‘말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명제로 철학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도 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 이유는 세상이 여전히 혼란스럽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아니 점점 더 복잡해지고 알쏭달쏭해지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에게 신중해지자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위험하고 불안하고, 어쩌면 불행한, 그래서 불쌍한 이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몹시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자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가 이승우는 그런 신중함의 처세술은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소설집 전반에 걸쳐 보여주고 있다. 사색과 성찰의 깊이에 닿지 못하고, 먹은 것을 싸고 싼 것을 다시 먹는 것 같은 악무한의 사유는 사유의 무능함을 드러낸다. 단순히 ‘생각 좀 해라’라는 식의 계몽적 패러다임으로는 오늘날의 혼란에 대처할 수 없음을, 우리에게는 어떤 종류의 철학-생각하는 방법과 생각에 대한 생각-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 사유의 무능함이 단순히 지적 무능력이 아니라 타인과의 연대가능성이 제거된 ‘타자-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불행한 의식의 윤리적 무능력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타인에게 말 걸지 못하고, 손 뻗지 못하고 생각만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코기토가 느닷없는, 그러나 일상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타자의 출현에 당황하고 실패하는 풍경은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을 거라 예상된다. 신중함의 에토스에는 비관적 정조가 깔려 있으나 명확한 현실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신중한 사람은 현실의 파국적 상황을 예감하고 있으되 그 파국을 직시할 윤리적 역량도, 그 파국을 뚫고 나갈 대안을 고안해낼 만한 지적 역량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 리얼리즘 없는 비관주의에 대해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만 <하지 않는 일>에 대한 이야기로 이야기를 끝맺기로 한다.
나는 처음에 <하지 않은 일>이 가수 타블로와 타진요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작가가 겪은 표절시비에 대한 이야기란 걸 알게 되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 가장 감정적 몰입이 강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를 여기서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하지 않은 일에 하지 않았다고 답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랴’는 식으로 하지 않았다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는 ‘변명(잡아떼기)’으로 받아들인다. 에덴에서 추방당해 고통과 불신이 가득한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말할 수 있는 것과 함께 드러난 ‘말할 수 없는 것’ 앞에 가만히 서 있어 보는 것, 잠시 그것에 마음을 내줘보는 것, 그럴 때만 오롯이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신중한 사람’의 극복은 신중함을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사람’이 되는 데에 달려있는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