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쓰는 편지라 그런지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 사진을 찍었어. 네가 유럽여행을 하고 있을 땐 네가 어디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상상하기 시작하면 저절로 글이 써졌는데 동안거에 들어갔다는 네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나로선 상상이 잘 안 돼서 그런 가봐. 런던, 파리, 부다페스트에서 배낭여행하는 여름보다 한국 사찰에서 안거하는 겨울이 내겐 더 현실감이 없는 계절이라서 너와 나 사이에 불가능한 시차가 놓인 건가봐.
우리 홍대에서 가로등색이 왜 주황색인지 얘기했던 거 기억나? 그때 난 백열등보다 경제적이지 않을까 하는 추론을 했고 넌 고개를 끄덕여줬어.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무렵 김호영 선생님의 조르주 페렉 특강(11.17)을 들어간 한예종 건물 5층에서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밝히는 가로등을 내려다보고 그날의 내 말에 왠지 모르게 부끄러움을 느꼈어. 빈곤한 상상력과 메마른 감성을 들킨 기분이 들었거든. 난 가로등을 기다림의 색이라 불렀고, 명명의 이유를 묻는 네게 제대로 답하지 못했어. 나무탁자 위에 놓인 비닐봉지와 가로등처럼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들, 일렬로 늘어선 자동차들 옆을 지나가는 한 남자, 내 시야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횡단하는 비행기를 아무 생각 없이 바라봤던 1분여의 시간, 이 모두를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그날 상수동의 이리카페에서 너의 수행공동체에서 발행하는 소식지에 실릴 네 글을 봐주고,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원근법의 가상의 깊이와 입체파에 대해 ‘썰’을 풀고, 이문재 시인의 시를 보여줬던 걸로 기억해. 난 2년 전 이곳에서 <자고 있어 곁이니까> 북콘서트로 그때 정말 빠져 있었던 김경주 시인을 만났고, 그날도 야외 테이블에 앉아 지인들과 이야기하는 김경주 시인을 발견하고 네게 ‘저 분이 <내 워크맨 속 갠지스>를 쓴 그분이야’ 알려줬던 기억이 나. 그리고 그때 네가 읽은 시가 이거였지, 아마.
<사랑이 나가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손을 잡았다 놓친 손
빈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나간 것이다.
조금 전까지는 어제였는데
내일로 넘어가버렸다.
사랑을 놓친 손은
갑자기 잡을 것이 없어졌다.
하나의 손잡이가 사라지자
방안의 모든 손잡이들이 아득해졌다.
캄캄한 새벽이 하애졌다.
눈이 하지 못한
입이 내놓지 못한 말
마음이 다가가지 못한 말들
다 하지 못해 손은 떨고 있다.
예감보다 더 빨랐던 손이
사랑을 잃고 떨리고 있다
사랑은 손으로 왔다.
손으로 손을 찾았던 사람
손으로 손을 기다렸던 사람
손은 손부터 부여잡았다.
사랑은 눈이 아니다.
가슴이 아니다.
사랑은 손이다.
손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아직 손을 잡지 않았다면>
아직 손을 잡지 않았다면
아직 어린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다면
그대는 아직 그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가 싫어하는 음식이 뭔지 모른다면
지금까지 자기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면
그이는 아직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날카로운 첫 키스가 첫 단추가 아니라
첫 키스는 서툰 기습 같은 것이다.
사랑은 손에서 시작한다.
사랑은 손이 하는 것이다.
손이 손을 잡았다면
손이 손안에서 편안해했다면
그리하여 손이 손에게 힘을 주었다면
사랑이 두 사람 사이에서
두 사람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두 손은 서로의 기억을 가지려 한다.
열 개의 손톱이 모두 그이의 얼굴로 보일 때
손금에서 꽃 피고 별 뜨고 강물이 흐를 때
그리하여 그대가 알고 있는 그이의 이야기와
그이가 알고 있는 그대의 이야기가 같아질 때
그때부터 둘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헤어질 수 있는 자격은 그때서야 생기는 것이다.
먼 훗날, 아주 먼 곳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렇다고 후회하지도 않으며
추억할 수 있는 권한은 그때서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네가 사랑을 손으로 시작한다고 해서 이 시를 보여주고 싶었어. 영혼이 닮은 사람과 느낌이 통하는 일은 황홀한 경험이니까. 그리고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는 네게 한 시인이 걸어온 구도의 내력을 잠시나마 소개해 응원해주고 싶었어. “외로울 때면 양치질을 했다는/젊은 스님이 생각났다”가 내 삶 안으로 들어온 건 네 모습이 겹쳤기 때문일까? 물론 너도 아직 수행자가 너의 길인지 확신하지 못해 다른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지만 흔들림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는 네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그동안은 네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 함께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비포 선라이즈, 김일두>), 함께 좋아하게 된 것을 발명하기도 하고(<나의 자랑 이랑>). 반대로 내 얘기만 해서 그런지 너‘만’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난 많이 무지한 것 같아. 그래도 올해 내가 사귄 최고의 친구를 소개해주고 싶은데 괜찮겠지?
그는 아까 잠깐 언급한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페렉이야. 사실 페렉의 <잠자는 남자>를 예전에 사놓고 읽지 않았는데 올 9월에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실험문학 집단 울리포 회원인 미국의 소설가 다니엘 레빈 베커와 울리포프레스를 운영한 적 있는 한유주 소설가가 울리포와 페렉에 대한 이야기를 해줘서 그때 관심에 불이 붙었어. 모음 e만 쓴 소설과 모음e를 빼고 쓴 소설의 작가라니! 그의 정신세계를 탐험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고, 마침 김호영 선생님의 페렉 특강소식을 알게 되면서 <잠자는 남자>, <인생사용법>, <W 혹은 유년의 기억>, <겨울여행/어제여행>,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을 차례로 읽었어. 처음엔 똑똑함을 바탕으로 구성을 복잡하게 하고, 현학적으로 글을 쓰는 작가일 거라 예상했는데 아니더라고. 오히려 마음이 아주 따뜻한 사람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었어. 페렉은 사실 유대인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양친을 모두 잃은 경험을 했어. 그래서 <잠자는 남자> 같은 작품을 보면 누구에게도 마음을 내주는 않는 이방인의 정서, 절대적 고독이 느껴지는데 자서전적 성격의 <W 또는 유년의 기억>을 쓰면서부터 내면의 큰 공허를 거의 극복해냈다고 해. 상처를 세상에 내보이고 상처 입은 그 자체의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어두운 그늘에서 환한 빛의 세계로 간 거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페렉의 대표작이기도 한 <인생사용법>인데 지상 8층, 지하 2층 건물에 사는 사람들을, 아니 차라리 각 방과 방 안에 있는 사물들, 건물 자체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인생사용법>의 주요 서사는 바틀부스라는 인물이 세계일주를 하면서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퍼즐장인 윙클레가 퍼즐을 만들고, 그 퍼즐을 바틀부스가 죽을 때까지 맞춰보지만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인데, 난 바틀부스와 윙클레도 좋았지만 “내 아이가 아닌 그의 아기를 지워버리기 위해 당신을 도와야했던 그 잔혹한 아이러니. 단 몇 시간 동안이지만 우리가 남편과 아내 행세를 했던, 하지만 당신이 알타몽 부인이 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가르델 씨가 되어 부부 행세를 했던 그 잔혹한 아이러니에 대해서 생각했”던 시릴 알타몽의 인생과 르브랑 샤스텔 교수에게 “원고를 쉼표 하나까지 베껴” 몇 년 간의 노고와 공적을 빼앗긴 베르나르 댕트빌 의사의 인생에 특히 빠져들어 읽었던 기억이 나. 너는 누구의 이야기에 매혹될지 궁금하네(너는 인생을 어떻게 사용하고 싶어?)
<인생사용법>이 세상이 나오기까지 십 년 정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해. 그 엄청난 관찰과 노력의 결과물이 인생사용법 작가노트로 공개됐다고 해. 독자들을 작가노트를 통해 <인생사용법>을 쓰는 데 사용된 규칙들을 찾아 읽으면서 게임공략집이나 문제해설집을 읽는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싶어. 하지만 그 지적 추리가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란 점에서 독자들은 인상 짓는 게 아닌 미소를 머금고 페렉과 대화했을 거야.
이 그림들이 뭔가 싶지?(^^) 인생사용법은 99장과 에필로그로 구성돼 있는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밑에서 위로 1장씩 넘어가는 게 아니라 체스의 행마법을 이용해 별자리 같은 궤적에 따라 장을 진행하고 각 장마다 라틴제곱 사각형 도표를 이용해 어떤 색깔을 쓸지, 어떤 작가를 인용할지를 계산했다고 해. 참 일부러 생고생하는 이상한 작가지?(^^) 근데 이 점이 페렉의 사랑스러운 점이라고 느껴. 우리 일상에 ‘너무 흔하게 존재하거나’ ‘너무 친숙해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낯설게, 다시 말하면 새롭게 만나게 해주기 위해 페렉이 일부러 이런 것 같아. 그리고 현대사회에서는 경쟁이 치열하다 못해 과열됐고, 뭔가 결과물을 만들어내라는 명령이 강하게 작용하고, 게으름을 경멸하는 분위기가 팽배한데 페렉은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은 것들과 쓸데없어 보이는 것에 천착하는데 그게 은근히 해방감을 주는 것 같아. 교환논리에서 한 발짝 비껴서 삶의 잉여적 부분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아름답게 느껴지거든. 우리가 처음 만난 해남 미황사의 청년출가학교에서도 그런 불교적 가르침을 많이 받았던 것 같은데 내 경우엔 일상에 매몰돼 다 잊고 사는 것 같아.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 눈이 멀어 일상의 사물들을 얼굴 없고 이름 없는 묘지들로 만들어버린 ‘눈 먼 자의 삶’.
페렉은 이를 일상적 실명과 일상적 폭력이란 개념으로 설명하더라고. “‘일상적 실명’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을 뜻함. 페렉이 보기에, 일상적 실명의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일상이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 즉 우리로부터 지각과 의식을 빼앗아가는 ‘일상의 폭력’이다. 현대 사회에서 일상의 폭력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페렉은 일상의 폭력의 근저에는 바로 ‘유사성의 폭력’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았다. ‘유행’이 그 대표적인 사례. 유행과 같은 유사성의 폭력은 우리를 일정한 유행, 사회적 함의, 집단적 경멸에의 종속으로 이끈다. 또한 유행은 우리의 일상적 행위들의 대부분에 개입하면서 개인적인 것, 독창적인 것의 상대적인 가치 저하를 가져오고, 그 가치들의 화석화를 유도한다. 즉 유행은 존재들 사이의 또는 사물들의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들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키거나 사라지게 만드는데, 이것은 곧 일반화의 폭력이자 ‘표준화의 폭력’에 다름 아니다.”(김호영, 조르주 페렉과 일상의 글쓰기 - 사물에서 삶으로)
이에 맞서 페렉은 사물에 대한 세세한 묘사와 명명을 통해 일상적 실명과 폭력으로부터 삶의 색체를 되찾아온다고 생각해. 밥 한 숟갈에서 살아온 삶에서 살아갈 삶으로 이행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김훈 소설가의 시선처럼 작고 사소한 것 본연의 형(形)과 색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놀이하는 인간’ 페렉에게 허무에 맞서 의미에 천착하는 게 아니라 무의미를 온전히 껴안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고 사랑을 발명하는 법을 배운 것 같아. ‘의미의 질병’이 점점 심해져 일상에서 여유를 잃어버렸던 내게 제대로 ‘노는 법’을 가르쳐준 고마운 친구 페렉. 김호영 선생님의 글을 옮길게.
“일상-하부의 것(infra-ordinaire) : '우리 일상에 너무 흔하게 존재하는 것, 너무 친숙해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뜻함. 페렉의 글쓰기는 친숙하지만 낯선 일상의 사물들과 공간들을 묘사하기에 주력한다. 너무나 평범하고 흔해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버렸거나 잃어버린 일상의 요소들을 찾아 기술하기. 페렉이 즐겨 시도했던 일상의 사물들에 대한 집요한 열거와 세밀한 묘사는 평소 경시되던 사물들의 의미와 뜻밖의 공간들을 발견하게 해준다. 즉 우리의 ’시선의 무의식의 지대‘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필연성‘을 드러내줌.”(김호영, 조르주 페렉과 일상의 글쓰기 - 사물에서 삶으로)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내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이 어떤 삶인지 솔직히 확신이 서지 않지만 서두르지 않고 싶어. 느리지만 꾸준히 성실하게 걷다 보면 걸어온 길로 말미암아 걸어갈 길이 자연히 열리지 않을까 믿고 싶어. 이 글이 네가 페렉이란 퍼즐을 푸는 데 길잡이가 되길 기원하며 이만 줄일게. 총총.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아마도 퍼즐의 최후 진리라 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무엇인가를 추론하게 될 것이다. 퍼즐이 지니는 외적인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퍼즐은 혼자 하는 놀이가 아니다. 퍼즐을 맞추는 이가 수행하는 각각의 행위는 퍼즐을 제작한 이가 이미 행한 행위다. 그가 몇 번이고 손에 쥐어보면서 검토하고 어루만지는 각각의 조각, 그가 시험하고 또 시험하는 각각의 조합, 각각의 모색, 각각의 직관, 각각의 희망, 각각의 절망은 타인에 의해 이미 결정되고 계산되고 연구되었던 것들이다.“(인생사용법 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