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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Turn 마이 턴 - 요한 크루이프 자서전
요한 크루이프 지음, 이성모 옮김 / 마티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현대 축구의 패러다임 전환을 일으킨 혁명가 요한 크루이프 자서전 <<마이 턴>>. 요한 크루이프는 축구 선수, 감독, 행정가로서 정점을 찍었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제목을 절묘하게 잘 지었다. 크루이프가 발명한 기술 ‘크루이프 턴’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현대 축구의 전술적 판도를 뒤바꾼 그의 혁명적인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축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현대 축구에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개념과 철학을 선구적으로 고안한 크루이프의 생각을 흥미롭게 받아들일 것 같고, 축구에 관심 없는 독자라도 자기 분야에서 혁신을 가져온 사람의 태도에서 충분히 인생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크루이프에게 축구는 삶 그 자체였다. 삶이 축구에 영향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때를 생각할수록 가정을 이루고 꾸려나가는 과정에서 내가 경험한 것이 토털사커의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토털사커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축구가 아니다. 팀 전체와 다른 선수들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축구다. 열 명의 선수 모두가 공을 가진 선수의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그가 이제 어떤 플레이를 할지 예측하며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52)
은퇴 이후에도 자기 삶을 살 수 있도록 인성 교육을 중시하고, 냉정한 프로 스포츠의 세계지만 승패 못지않게 팬을 즐겁게 하는 데 집중했던 크루이프는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이었다. 이 책의 한 줄 카피를 뽑는다면 그의 명언인 ‘모든 불리함에는 유리함이 있다’가 적절해 보인다. 크루이프는 비쩍 마른 체구로 유리하지 않은 신체적인 조건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로 하는 축구’, 기술로 하는 축구 시스템을 도입해 새 시대를 열었다. 기존 패러다임을 그대로 수용해 더 많이 더 열심히 뛰는 데만 몰두했다면 그는 결코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하지 못했을 것이다.
팀 스포츠 경기에서 사회가 개인들의 총합 그 이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 자주 출현한다. 최고의 선수들로만 팀을 꾸린다고 해서 최고의 팀이 되는 건 아니다(레알 마드리드 '갈락티코 1기'의 성취를 까 보면 그다지 휘황찬란하지 않다).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선수 개개인의 개인기에 의존하기보다(클린스만의 '해 줘' 축구 같이) 시스템에 의한 조직력이 경기력의 성패를 좌우하는 비중이 커진다. 스타 플레이어들이 즐비하지만 암울한 경기력으로 일관하고 있는 EPL의 맨유, 첼시 같은 팀(+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을 보면)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명언을 되새기게 된다. 축구의 감동은 사회학자 김홍중이 <은둔기계>에서 묘사하듯 천재적인 개인의 예술적인 플레이, 피지컬과 뇌지컬을 극한으로 끌어낸 경이로운 플레이에서 오기도 하지만 11명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조직력, 한 수 위 실력의 선수를 상대하기 위한 헌신적인 협력 플레이, 자신이 눈에 띠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팀을 위해 궂은 일을 도맡는 희생 플레이(투혼. 현역 시절 박지성은 'unsung hero'라는 별명으로 불렸다)에서도 온다.
축구에서 새 팀의 판을 짜는 작업을 '리빌딩'이라고 부른다. 감독의 철학, 전술을 녹여 새로운 팀을 만드는 데 2~3년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오합지졸 같았턴 팀이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하는 '원팀'이 돼 자신들의 '빌드-업'을 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훈련을 거쳐야 하는지 확인하고 싶으면 초창기 '골때리는 그녀들'을 보면 된다. 유럽 축구를 보며 열광하고, 국가대표팀 축구를 보며 분노와 환멸에 사로잡혔던 내게 축구의 순수한 즐거움, 열정의 아름다움을 깨우쳐 준 건 '골때녀'였다. 기술적으로 투박하고, 조직적으로 엉성한 신체들이 먼 길을 돌아 끝끝내 '빌드-업' 축구를 해 내는 모습에서 몰려드는 감동이 있었다.
애플 티비의 오리지널 콘텐츠 <테드 래소>는 경기장에서 퍼포먼스를 보여 주는 엔터테이너로서 축구선수이기 이전에 '사람'인 선수들의 일상을 담아낸 코미디 장르의 스포츠 드라마다. 만약 안드로이드, AI 로봇 선수들로 축구장을 채운다면 축구 경기가 더 박진감 넘치고 흥미로워질까? 로봇 축구는 로봇 축구만의 미학이 있을 테지만 이 드라마는 축구와 일상을 양발 드리블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스포츠만이 주는 매력을 솜씨 좋게 그려냈다. 모든 걸 승패, 성적으로 판가름하는 냉정한 프로 스포츠의 세계, 자본주의적 냉정함과 팬들의 광신적 열광이 맞부딪치는 경기장에서 스포츠가 선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한 사람이 스포츠를 통해 더 나은 사람으로 어떻게 성장하는지), 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우리가 왜 스포츠를 사랑하는지 본질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드라마.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테드 래소>처럼 스포츠의 서사가 좀 더 다양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책 속에서]
축구에 관한 한 나는 한 가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오로지 최고의 축구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수준 낮은 축구는 할 수가 없다. 나는 한 방향밖에 보지 못한다. 위로, 더 높이, 정상을 향하여. 최고가 되는 것. 내가 결국 피치를 떠난 것도 그래서였다. 내 몸은 더 이상 최고 수준의 축구를 할 수 없었고, 그렇다면 피치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나에겐 강한 정신이 있었기에 감독이 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내 인생은 늘 더 잘하고 더 발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삶의 모든 일에 그런 마음으로 임했다.(11~12)
내 관심은 축구의 철학, 이상적인 축구에 있었다. 나는 늘 앞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지에 집중했고, 종종 과거를 돌아볼 때는 오로지 실수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교훈은 삶의 여기저기에 있고, 이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나중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에는 내가 무엇을 지나왔는지 볼 수 없었다. 돌아보건대 내가 축구선수로서 배운 가장 중요한 네 가지는 좋은 잔디, 깨끗한 드레싱룸, 축구화를 스스로 깨끗이 닦는 습관, 촘촘한 골네트다.
기량과 스피드, 기술과 득점 등 나머지 모든 것은 그다음 문제다. 이것이 나의 축구와 인생을 정의하는 철학이다. 나는 토털사커부터 가정생활과 크루이프 파운데이션에 이르는 모든 일에서 이 철학을 실천했다. 나의 인생은 더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한 끝없는 도전이었다. (15)
또 어떻게 보면 숫자를 좋아하고 머리로 셈하는 데 익숙했던 것이 훗날 축구에서 숫자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내 특징으로 연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상대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공간을 얼마나 더 잘 활용할 수 있을지를 나는 숫자로 생각했다. 디스테파노도 그랬었다. (22)
나에게 축구를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축구를 즐기는 것이었다.(22)
나는 야구에서 집중적으로 배운 세부적인 부분들을 나중에 축구에서도 매우 유용하게 활용했다. 투수의 투구를 결정하는 사람은 포수다. 투수는 필드 전체를 볼 수 없지만 포수는 볼 수 있다. 또 포수는 투수의 공을 받아 어디로 던질지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모든 공간과 모든 선수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어떤 축구감독도 나에게 공을 받기 전에 그 공을 어디로 패스할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프로 축구선수로 뛰면서 어린 시절 야구에서 배운 것, 즉 언제나 경기장 전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떠올렸고 그것이 나의 강점이 되었다. 야구는 훈련으로 재능을 키울 수 있는 대표적인 스포츠로, 축구와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순간 스피드, 슬라이딩, 공간 인지력이 요구되는 것도 그렇고, 한 수 앞서 생각하고 여러 다른 수를 생각해야 하는 것도 비슷하다. 이는 론돈 훈련(선수들이 가깝게 모여서 패스를 주고받는 훈련 방식−옮긴이 주)을 토대로 하는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 축구’와도 일맥상통한다. (29)
축구를 잘하는 선수란 공을 단 한 번에 터치하고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를 아는 선수다. 이것이 네덜란드 축구의 핵심이다. 나는 늘 축구는 아름다우면서 공격적이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아약스 시절 우리가 늘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기술과 전술이다. 많은 감독이 움직임을 강조하고 많이 뛰라고 하지만, 나는 너무 많이 뛰지 말라고 말한다. 축구는 머리로 하는 게임이다. 축구선수는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너무 빨라도 안 되고 너무 늦어도 안 된다.(40~41)
그 시절 아약스에서 우리는 꽤 좋은 결과를 누렸고 꽤 좋은 축구를 펼쳤지만, 나는 내가 단지 축구선수로 기억되기보다는 언제나 나아지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43)
그때를 생각할수록 가정을 이루고 꾸려나가는 과정에서 내가 경험한 것이 토털사커의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토털사커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축구가 아니다. 팀 전체와 다른 선수들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축구다. 열 명의 선수 모두가 공을 가진 선수의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그가 이제 어떤 플레이를 할지 예측하며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