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느 베이유 불꽃의 여자 - 교양선집 6
시몬느 뻬트르망 지음 / 까치 / 1978년 8월
평점 :
품절


<시몬느 베이유 불꽃의 여자>는 시몬 베유의 친구였던 시몬 뻬트르망이 쓴 베유의 전기이다. 시몬 베유 전기 중 가장 표준적이고 충실한 전기로 평가받고 있다. 역자 고 강경화 선생님은 옮긴이 후기에서 레이먼드 로젠탈이 번역한 영역본 <<Simone Veil, A Life>>를 번역 대본으로 삼았음을 밝히고 있다. 원서는 자료 중심에다 분량이 워낙 방대해서 베유의 생애의 자취를 중심으로 줄였다고 설명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시몬 베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등사범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면서 시몬느는 나와 같이 솔본느 대학의 자격시험도 치렀다. 그녀의 뛰어난 지성과 악명 높은 옷차림에 대한 소문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무척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시몬느는 솔본느에 다니는 알렝의 제자들과 함께 교정을 산책했는데 한 손에는 늘 책을 들고 있었다. 대규모의 기아가 중국을 휩쓸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시몬느는 진심 때문에 더 그녀를 존경했다. 전 세계의 정의를 위해 고동칠 수 있는 심정을 지녔다는 것에 감탄했다. 나는 그녀의 철학적인 재능보다도 이 눈물 정을 지녔다는 것에 감탄했다.”(40)

 

 시몬 베유는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교육기관 중 하나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우등으로 입학했을 만큼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보부아르가 증언했듯 베유는 무엇보다 약자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을 지닌 탁월한 영혼이었다. 선천적으로 병약한 신체를 타고났으나 육체노동에 뛰어든 학출이었다.

 

1980년대 한국에서 시몬 베유 전기가 널리 읽혔던 데는 순수성의 화신이자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베유의 도덕성이 한국 청년들에게 실존적인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70~80년대 독서 문화를 저항으로서의 독서’, ‘운동으로서의 출판으로 해석했던 국문학자 천정환과 정종현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변증법적 유물론, 종속 이론 등 사회과학의 시대를 풍미했던 사회과학서적과 더불어 체제의 억압과 폭력에 맞서 진실과 정의를 지키려 했던 양심적 지식인을 형상화한 소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다이허우잉의 <<시인의 죽음>>, <<사람아 아, 사람아!>>,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같은 책은 당대 대학생 사이에서 베스트셀러였다.

 

 1980년대 학출이었거나 학출-되기를 고민했던 청년들에게 시몬 베유와 전태일이 동일 선상에서 읽혔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일신의 영달을 포기하고, 시몬 베유의 경우 지식인 계층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약자를 위해 '존재 이전'을 감행했던 순수성의 화신. 마르크스나 레닌이 아닌 신과 대면하며 '세계의 비참'에 맞서 실천을 고민했던 영성의 전사. 역자 강경화 선생님이 '불꽃의 여자'라고 불의 이미지로 시몬 베유를 은유한 데는 자신을 산화시켜 세상에 빛을 가져 온 구도자적 생애와 더불어 당대 지식인들의 양심에 불꽃을 당긴 전태일의 최후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다. 어떤 인간은 존재를 파괴하는 고통 속에서 신과 대적하며 영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지상에 두 발을 붙이고 을 자신의 문제계로 삼아 도약하는 영혼. 중력은총은 인간과 신의 간격을 은유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시몬 베유 전기를 읽으며 시몬 베유가 유리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날카로운 지성으로 세계의 부조리를 도려내 분석하고, 예민한 감수성으로 타인의 고통에 쉽게 전염돼 곧잘 긁히고 깨지고, 자신을 투명하게 비우기 위해 단식에 가까우리만치 먹지 않고 편안함과 안락함을 강박적으로 기피했던 사람. 선천적으로 약한 체질을 타고났으나 신체에 영혼이 구속되길 거부하려는 듯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현장에 뛰어들길 두려워하지 않았던 활동가. 자본주의적 노동 현장에서 벌어지는 소외와 착취, 전쟁터에서 말살되는 존엄성에 통감하면서도 '신을 기다리며' '신의 사랑에 관한 무질서한 생각들'을 멈출 수 없었던 예언자적 사상가(그래서 발터 벤야민과 살짝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를 알고 나니 사상이 궁금해졌다. 최근 좋은 번역으로 시몬 베유의 책들이 여럿 출간됐다. 이제 읽기만 하면 된다.

 

 

<중력과 은총>(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이종영 옮김, 리시올)

<신의 사랑에 관한 무질서한 생각들>(이종영 옮김, 새물결)

<쿠튀리에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이종영 옮김, 리시올)


[책 속에서]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은 시몬느에게는 어떤 철학적인 신념에 앞선 일종의 본능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분명히 나타나 있듯이 시몬느는 불의를 미워하고 진실한 유대감으로 맺어진 참다운 인간 관계를 열망했다.(24)

 

나중에 시몬느가 굶어 죽은 것 역시 자신의 성실과 순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일종의 현실과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살아서 더 많은 것을 이룩함으로써 다른 이상을 추구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시몬느는 자신의 영혼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것에도 양보하지 않았다.(30)

 

어느 날 나(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녀와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단 하나이며, 혁명이 일어나게 되면 이 세상의 굶주린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런 식으로는 사람이 그저 생존하게 될 뿐이지 행복하게 될 수는 없다고 말하자, 시몬느는 나를 아래 위로 훑어 보면서 당신은 아직 배를 곯아 본 적이 없군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뒤로 우리의 관계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나는 시몬느가 나를 잘난 체하는 소시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 때문에 좀 괴로웠다. 나는 계급적인 문제에서는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40)


작업 속도도 너무 빨랐다. 반면에 시몬느는 손으로 하는 일은 너무 서툴렀다. 제자에게 쓴 편지에서, 시몬느는 이렇게 하소연했다. “한번 생각해 보렴. 일은 느려지기만 하는데 무자비하게 책정된 책임량은 자꾸만 쌓이는데다가 이걸 해낼 수가 없으면 해고당한다 말이다! 나는 아직도 제대로 속력을 낼 수가 없단다. 아직은 일이 서툰데다가 원래 타고나기를 동작이 느리고, 두통에 시달리고, 또 자꾸만 생각하는 버릇이 있으니까 말이야. 아무리 해도 이 버릇만은 떨쳐버릴 수가 없구나.”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하는 작업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잔인한 일이다. (140)


배고프다는 것은 그치지 않고 지속되는 느낌이다. 굶주림이 혹사당하며 먹는 것보다 더 괴로울까? 잘 모르겠지만……더 괴롭다.”(150)


공장 생활은 시몬느에게 순교의 생활이었다. (153)


더욱이 그녀가 공장에 들어간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억압받는 자들의 운명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153)


시몬느에게 인간 심리의 본질을 깨닫도록 해 준 것은 이 힘의 개념이다. 이 개념에 의해 시몬느는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사랑받는 작품 일리아드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시몬느의 일리아드, 혹은 힘의 시라는 글은 정치 문제나 사회 문제를 떠나서 쓴 것으로서 당시의 상황과는 무관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 글은 일반적인 전쟁이나, 일반적인 불행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시몬느가 일리아드에서 특히 감동을 받은 것은 인간 영혼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 인간 영혼은 힘과 폭력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 하는 점이었다. 힘을 행사하는 자이든지, 그 힘의 지배를 받는 자이든지 간에 인간은 힘에 의해 변형된다. 때로는 용기와 사랑으로 이 폭력에 의한 근본적인 변형을 피할 수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상처를 면하지는 못한다. 시몬느는 일리아드에 대해, “일리아드의 고통은 인간 영혼이 힘에 종속됨으로써 생겨난 것이므로 정당화될 수 있는 유일한 고통이다. 개인의 본성에 따라 약간씩은 다르지만 힘에 대한 종속은 인간의 공통된 운명이다. 일리아드에 나오는 인물들은 아무도 이것을 피하지 못하며, 우리들 역시 아무도 이것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힘에 종속되는 그 누구도 멸시받을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영혼 내에서, 혹은 인간 관계 속에서 힘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비극적이다. 파멸의 위험이 항상 그의 머리 위를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213~214)

 

시몬느는 6월 초에 내게 안부 편지를 보내왔다.

무엇을 하고 지내니? 공부하고 있니? 전에 생각했던 주제를 살려 논문을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속히 완성해서 출판도 했으면 좋겠어. 이곳에 G. 베르제르라는 훌륭한 철학자가 있는데 그의 논문이 요즘 파리에서 출판되었어. 네가 여행할 수 있다면 올 여름에 만났으면 좋겠구나. 여기는 모두 잘 지내고 있어. 무슨 책을 보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소식을 전해 주기 바란다.”(2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