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 - 건설·거주·재건축의 40년 케이 모던 2
이인규 지음 / 마티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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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의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를 읽었다. 이인규의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이하 ‘안녕‘) 프로젝트를 알고 있었지만 책을 읽어보진 못했다. 재건축으로 철거된 아파트에 대한 기록/아카이브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하긴 했다. 꼭 둔촌주공아파트 거주민이 아니더라도 성장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곳에 대한 ‘장소 애착‘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안녕‘을 보며 장소적 기억, 어린 시절 이름 모를 동네 친구들과 뛰어 놀았던 놀이터, 경찰과 도둑 같은 게임을 하며 뛰어 다녔던 골목길 등 추억이 서린 장면들을 오랜만에 회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최근에 디지몬 어드벤처를 정주행했다. 7번째? 8번째 정도 되는 것 같고, 아마 마지막 정주행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시작은 중2 즈음이었던 것 같다. 우연히 다음 블로그에 업로드된 디지몬 영상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1화를 클릭했고, 정신 차려 보니 54화까지 내달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음악의 힘이 셌던 것 같다. 디지몬 어드벤처 오프닝 곡, 라벨의 볼레로, Power up, 엔딩 곡인 안녕 디지몬 등 음악이 흘러 나올 때면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고3 때까지 1년에 한 번씩 의례를 치르듯 디지몬을 정주행했다. 진로에 대한 고민과 불안이 깊어질수록 안온하고 평화로웠던 어린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재확인하는 데서 오는 위로가 컸던 것 같다. 그리고 디지몬 어드벤처의 메시지가 주는 울림도 적지 않았다. 용기, 우정, 사랑, 순수, 지식, 성실, 희망, 빛까지 각 ‘선택받은 아이들‘이 지닌 마음의 정수를 상징화한 문장이 빛을 발하는 순간들(문장이 빛나기 시작하면 문장의 힘으로 성숙기 디지몬은 완전체 디지몬으로 초진화를 한다)을 보며 내가 잃어버린 동심, 순수한 마음, 잊고 있었던 마음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번에 디지몬을 보며 더 이상 마음 속에서 일련의 화학 작용이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졸업이랄까. 이제 가상의 디지몬 세계에서 ‘선택받은 아이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그렇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안녕 디지몬. 친구들 모두 안녕.



이은규의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진행한 저자가 건축에 대한 전문적인 탐구를 하고자 대학원에 진학해 집필한 석사학위논문을 단행본으로 만든 결과물이다. 기성 연구자들은 대체로 아파트를 획일화된 사고방식과 라이프스타일을 강제하는 주거 양식, 사는 곳living place이 아닌 사는 것[상품]이 된 부동산 투기의 도구 등으로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이은규는 ‘아파트 키드‘로서 한국 사회에서 왜 아파트가 주거 양식의 지배종이 되었는지, 상품이 되었는지 역사적, 정치적 맥락을 꼼꼼히 밝히면서도 ‘사는 곳‘으로서 아파트가 어떤 장소였는지를 설명한다. 1부 둔촌주공아파트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2부 둔촌주공아파트에서는 어떻게 살았을까? 3부 둔촌주공아파트는 어떻게 사라져갔을까? 이렇게 대단지의 생애라는 제목에 걸맞게 아파트의 생로(병?)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한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건축물의 죽음 충동에 의해 이윤을 창출하는 ‘재개발‘이다. 신문에서 문화/예술 부문만 챙겨 보고, 사회 면 정도만 드문드문 읽는 나로선 둔촌주공아파트 재개발 사업이 얼마만큼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사건인지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이은규는 서문에서 이 책이 겨냥하는 표적이 이런 재개발 욕망이 야기하는 사회적 손실, (재)개발 연대의 힘 있는 자들만이 이윤을 획책하고 다른 이들에게 아픔을 안기는 재개발의 오답 노트를 둔촌주공아파트의 사례를 통해 작성한다.



-둔촌주공아파트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둔촌주공아파트의 생애를 통해 단순히 ‘어떻게 하면 재건축사업에서 둔촌주공 사태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서 질문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까지 거대한 문제가 만들어진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원인과 문제가 일어난 과정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랐다.(‘들어가며‘ 중)



둔촌주공아파트는 국내 최대 규모의 대단지로 이런 전략의 일환으로 건설된 곳인 것이다. 둔촌주공아파트의 대지면적은 약 62만 제곱미터로 단일 단지 기준으로 국내에서 가장 크다.(13) ‘왜 이렇게까지 거대한 세계를 만들었을까?’(19) 이는 표면적으로 폭발적으로 확장하는 서울시에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박정희 정권에 우호적인 중산층 계층을 육성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중위소득을 기준으로 중산층을 판별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 기준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근대화 시기 중산층은 아파트에 거주하며 차(그 유명한 포니 자동차)를 소유한 4인 가족을 지칭했다. 정부의 재원만으로 아파트를 충분히 공급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에 민간 자본을 적극적으로 끌여들였다. 이들은 아파트 입주 희망자들에게 계약금 형태로 자본을 충당하여 건설 비용에 보탰고, 입주권을 따낸 이들은 여기에 웃돈을 덧붙여 되팔기도 했다고. 이는 마민지의 [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에서 상세히 소개되기도 한다. ‘싸우면서 건설하자‘고 구호를 외쳤던 발전국가 시기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모두에게 ‘내집마련‘의 행복을 약속했던 것이 아니었다. 아파트 입주권을 구매할 수 있을 만큼 현금 지불 능력이 있던 계층(전문직 등),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었던 공무원, 군인 등 특정 계층은 쉽게 부의 사다리에 올라탈 수 있었던 반면, 그렇지 못한 이들은 자신이 살던 동네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비극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사건이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이었다(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이 사건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1부를 읽으며 김정철이란 인물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김중업, 김수근 등 발전국가 시기 유명한 건축가의 이름을 몇 알고 있었으나 김정철은 생소했다. 하지만 그가 건축신문을 발행하고, 젊은건축가상 제도를 제정, 운영하는 정림건축문화재단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건축계에서 김중업, 김수근 같은 건축가 위주의 담론이 형성된 반면 ‘대형 건축 조직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서술을 보며 기시감이 들었다. 국문학계 또한 작가, 작품 중심의 작가론, 작품론 연구 방법론이 지배적이었다가 제도, 매체 연구 등 새로운 방법론이 적용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정철의 바람대로 둔촌주공은 ‘후세에 의해 평가’된다. 건축학자나 평론가 들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고 자랐던 이들에 의해 아파트에 대한 다른 평가와 이해가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둔촌주공아파트에 살았던 이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던 동네에 대한 애정을 공유했다. 사람들은 둔촌주공아파트가 낮은 밀도로 지어져 쾌적하고 여유로운 공간을 누릴 수 있었고, 섬세하게 설계된 단지의 여러 요소 덕분에 장소에 대한 좋은 감각과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계절마다, 구역마다 다른 모습이었던 수목들과 넓은 녹지, 놀이터와 휴게공간을 유연하게 연결하던 보행자 전용로 등 주민들이 사랑했던 공간들은 설계자들이 특별히 더 신경 써서 설계하고 실현한 것들이었다.


거주민들은 안락하고 살기 좋은 거주 환경을 만들고자 했던 이름 모를 설계자의 이상과 이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읽어낼 수 있었다. 살기 좋은 집을 만들려는 마음이 정말로 살기 좋은 집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좋음을 사람들은 알아본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더 좋은 거주 환경을 고민하는 마음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69-70)



건축가는 아니지만 ‘건축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품게 되었던 부분이다. 그리고 건축의 공공성, 더 좋은 환경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실현하려면 시민으로서 좋은 건축을 바라보는 혜안, 좋은 건축 정책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판단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유현준 건축가가 한 말이 있다. 건축의 질이 향상되려면 시민들이 좋은 건축을 경험할 기회가 늘어나야 한다고. 그렇게 좋은 건축에 대한 감각과 의식을 키우면 좋은 건축이 많아질 수 있다고. ‘건축 문화‘을 가꾸는 일. 이는 건축가, 건축평론가 등 건축계 사람들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열린송현녹지광장‘은 정말 ‘잘 생긴‘ 장소라고 느꼈다. 항상 안국빌딩을 지나 국립현대미술관을 지나갈 때마다 시야를 답답하게 가로막고 있던 철제 막이 사라지니까 5분 동안의 산책이 훨씬 즐거워졌다. 이렇게 시민들이 공공적으로 이용할 수 있고 걷기 좋은 장소가 도시에 더 많이 늘어났으면 한다.



추가적으로 ‘빌거‘, ‘휴거‘ 등 거주지의 성격을 기준으로 차별적으로 구별 짓는 혐오 발언, 계층화된 주거의 구별 짓기 현상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의 거대한 블록에 생활시설을 집중한 ’자체 완결적인 가구 단위 계획‘은 장단점이 확실했다. 단지 거주민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 안심하고 ’아이를 키우는 동네‘로 기능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준다는 장점에 반해, 단지의 경계를 따라 내부와 외부가 명확히 구분되어 폐쇄적인 ’섬‘처럼 주변과 분리된다는 한계가 뚜렷했다. 이러한 ’반도시적 단지성‘은 근린주구론이 처음부터 비판받은 지점이었다. 근린주구론에서 물리적 범위를 한정하는 경계를 뚜렷이 한 이유는 근린에 고유한 성격을 부여하고 명확한 실체로서 인식되게 하기 위함이었으나, 이로 인해 계급 및 인종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꾸준히 지적되었다. (50)



-둔촌주공아파트에서는 어떻게 살아갔을까



이 파트를 읽으며 인문적 지리학의 대표 사상가로 꼽히면 이-푸 투안의 저서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토포필리아], [공간과 장소]를 인용해 이인규는 왜 사람들이 둔촌주공아파트을 그리워하며 기억하고 있는지, 그곳을 좋아하는 마음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를 밝힌다.



‘토포필리아’(topophilia)라는 말이 있다. ‘어떤 장소를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지리학자 이-푸 투안에 따르면, 토포필리아가 생겨나는 데에 특별한 랜드마크나 대단한 경험, 격정적인 감정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저 친근함과 편안함, 보살핌과 안전에 대한 확신, 소리와 맛에 대한 기억, 공동의 활동과 세월이 쌓아온 아늑하고 기쁜 추억으로도 깊은 잠재의식 같은“ 마음, 즉 ‘고요한 애착심’을 품을 수 있다. 둔촌주공아파트에서 거주한 이들이 보여준 장소에 대한 애착이 이와 비슷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친밀한 장소들과 우연히 마주하는 애틋한 경험들이 누적된 사랑의 감정이었다.


둔촌주공아파트 거주민들이 이토록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은 그곳이 그들의 ‘집’이자 ‘동네’였기 때문이다. 둔촌주공아파트는 거주민이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이자, 그 안에 함께 살아가는 가족 또는 이웃과 맺는 관계, 그 공간 자체와 맺는 관계를 포함하는 동네였다. 그리고 ‘완성형’으로 태어나 수십 년 동안 크게 바뀌는 것 없이 ‘정지된 마을’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아파트 단지의 숙명도 장소 애착 형성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는 이-푸 투안이 장소를 ”정지(pause)가 일어나는 곳“이라고 말한 것과 닿아 있다. 사람과 공간의 관계는 정지해 머무를 때 발생하며, 사람이 아무리 정지해 있다고 해도 공간이 계속 변한다면 그곳은 ‘장소’가 되지 못한다. (134-135)



장소 애착 때문이었을까. 6~7년 전 즈음에 13년 정도 살았던 동네에서 이사 갈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고작 버스로 20분 거리의 다른 동네로 이사 가는 거였는데도 그랬다. 초중고를 나온 동네를 떠난다는 사실을 급작스럽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얼마 전, 신도시를 이사 간 친구는 외계 행성에 불시착한 듯 번듯하고 깔끔한 아파트 단지 주변에 황량하고 사막한 신도시 특유의 인위성, 기계성에 힘들다고 일기에 쓴 적이 있다. 인간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은, 시간의 켜가 쌓이지 않은 공간. 아직 장소가 되지 못한 공간. 그래서 그런지 나는 망원동, 불광동 같은 동네가 좋더라. 성북구도 좋고... 그런 동네에서 살 수 있을까...



-둔촌주공아파트는 어떻게 사라져갔을까



‘둔촌은 강동이 아닙니다!’라는 외침에는 자신의 집단을 인근 지역 사회와 구별 짓고, 결코 섞일 생각이 없음을 드러내는 폐쇄적인 태도가 드러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근린주구를 추구하며 만들어진 대단지의 태생적 한계에, 지역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집단권력의 부정적인 면이 겹쳐진 결과다. 게다가 재건축조합이라는 것은 지역에 발붙인 ‘거주’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소유’ 여부를 기준으로 구성되는 집단이다. 굳이 그 지역에 거주하지 않아도 조합원이 될 수 있기에 조합원들 사이에서 지역 사회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재건축 조합원들이 더 동질감을 느끼고 더 ‘쓸 만하다고’ 여기는 관계는 재건축·재개발을 추진 중인 다른 조합이다. 한국 사회에서 재건축은 처음부터 여러 조합이 연합한 거대 이익집단이 쟁취해낸 승리의 과정이자, 조합들이 결집할 때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학습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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