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틴더 유 트리플 7
정대건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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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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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힐링' 열풍이 있었다. '힐링' 열풍에서 떠오른 주체가 '멘토'였다. 자기계발서 저자, 스피치 전문가부터 종교 엘리트(스님), 철학자, 트렌드분석가, 심리학자에 이르기까지 직업군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이들이 멘토로 호명되어 책부터 강연, 방송(때로 이들이 결합된) 등 전방위적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소위 '청년 멘토'로 유명세를 탔던 이들의 책이나 강연을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당시에 미디어 노출이 상당히 심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얻은 정보들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녔던 것 같다.

-꼭 '~~을 하라'거나 절대로 '~~을 하지 마라'고 명확한 내용을 단호한 어조로 설파하는 카리스마적 면모(확신에 찬 모습에서 대중의 신망을 얻어냈던 것 같다)

- '멘티'의 '잘못'을 호되게 다그치고 비판(사실상 '정서적 학대'에 가까운 상담 아닌 상담이지만 멘티의 입장에서 개인적 차원의 습관이나 행동, 노력의 정도를 고침으로써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권위적인 전문가인 멘토에게 보증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멘토링의 '효능감'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예상해본다)

- 힐링의 축자적 의미에 부합하는 위안의 제공과 희망의 제시(지치고 답답한 심정, 상처받은 속내를 드러낼 만한 사회적 창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비슷한 문제를 공유하고 있는(그렇다고 가정된) 이들이 집합적으로 모인 장소에서 고통을 고백함으로써 멘토를 필두로 한 타자들에게 사회적으로 승인받는 것 자체에서 힐링 효과가 산출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대중적 집단적 고해성사의 구조에서 정말 진정한 고백이 가능한 것인지, 뭣보다 여기에 응답해주는 멘토의 솔루션에 문제의 소지가 상당히 많았다고 생각된다)

힐링이란 키워드는 사라졌지만 제니퍼 M.실바의 <커밍 업 쇼트>의 용어를 빌리면 '무드 경제'에서 '치료적 서사'를 제공하는 상품과 장치들은 오히려 다변화되고 증가한 것처럼 보인다. 자기계발self-development과 자조self-esteem의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돈 공부'를 표방하는 재테크의 부상과 '자존감 회복'을 표방하는 일종의 셀프 힐링으로 양분화된 경향을 보인다. 힐링은 형식적 차원에서 '사사화' '개인화'된 것처럼 보인다. 내 나름대로 출판 트렌드를 분석해본 결과, 상처받은 자존감을 어떻게 회복하고 치유할 것인지(<미움받을 용기>)가 주류 트렌드의 흐름으로 자리잡은지 오래고, 자존감의 하위장르로 가장 눈에 띠는 건 다름 아닌 '인간관계'다.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판단한다는 게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지만 제목만 놓고 봤을 때 이 책들의 메시지는 '너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타인과 단절하라' '너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인간관계는 아마 가족부터 친구, 연인, 직장 동료(상사)에 이르기까지 한 개인이 맺는 인간관계의 전반을 포괄한다.

악의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타인의 평가와 해석에 의거해 스스로의 가치를 정하지 말고, 자신을 인격적으로 존중하지 않는 이와 관계를 정리하라 같은 조언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유용한 내용이지만 이런 조언들이 범람하는 현상이 무엇을 암시하고 의미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과거보다 전반적으로 인생살이가 팍팍해지고 고단해져서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증가한 것일까? 평균적으로 사회 구성원 전반의 '인성 수준'이 하락한 것일까?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고, 타인-사회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무한경쟁과 생존의 장에서 타인을 물화된 대상이자 수단으로 대하게 만드는 힘이 증가한 것일까?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경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평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호의 자원이 점점 희소해졌을 뿐더러 끊임없이 성과를 내는 데 몰두한 성과주체(<피로사회>)는 자기착취적 자아경영인의 모습을 띤다. 이는 '번아웃 증후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소진된 인간')의 초상은 이런 식으로 분석이 가능했다. 여기에 인간관계가 무엇보다 자아에 치명적인 위험이 된 데에는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이는 데에는) 어떤 맥락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과잉연결된 '관심 경제'의 사회에서 타인의 부정적 평가와 비난 및 관계의 단절을 심각하고 민감한 충격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타인의 사회적 인정과 정서적 지지에 대한 기대의 욕구는 커졌는데 이런 욕구가 충족되기 어려워져서 기대의 좌절이 주는 충격이 훨씬 심대해진 것일까. 확실히 미디어는 연애 관계(우정도 일정 부분 포함되지만)에 현실의 어려움과 고단함을 잊게 만들고, 경감시켜주는 '낭만적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조성한다. 타인과의 진실된 관계가 가져다주는 정서적 도움이 실제로 크다 할지라도 미디어에서 조성된 물화된 '행복의 약속'은 상상적인 것,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그리고 자존감 얘기를 하긴 해야할 것 같다. 자존감을 얘기하다 보면 사회구조적으로 '친밀성의 관계'가 취약해지고 불안해지는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채(신뢰와 돌봄 과 같은 사회적 자원이 희소해지는 부분) 개인의 심리적 차원으로 환원주의적인 논의가 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서로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관계를 맺기 위해서 자아의 성숙, 정신적 정서적으로 독립된 자아의 성장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다. 혼자 생활해보는 독립적 생활에 대한 에세이가 꾸준히 써지고 읽히는 이유 중에는 자신의 기질과 성향, 취향과 욕망(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 자기에 대한 앎을 바탕으로 자주성과 주체성을 키우고, 과도한 의존성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성숙한 개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자존감이 향상되길 욕망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타인에 대한 의존지향성이 큰 관계를 맺게 되면 관계의 불화와 단절에서 오는 충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관계의 단절이 가져올 고통이 두려워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상대에게 대항하지 못하고(이 과정에서 자존감은 점점 더 낮아지고), 관계의 불화와 단절의 책임을 자신에게서 찾고 자책한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소통과 교류를 통해 서로에게 이로울 때(즐거울 수 있는) 인간관계가 건강하고 원만하게 유지되는 것일 텐데 정작 자기 자신의 입장은 뒷전으로 미뤄둔 것이다. 반대로 자기 자신의 입장을 이기적으로 견지했을 때, 상대방을 도구적으로 대하는 '소유적 관계'가 되었을 때 그에게 사물화의 고통, 사물화의 폭력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과잉연결된 사회에서 복잡한 인간관계의 그물망 속에 내던져져 있는 개인이 스스로를 지키면서 주체적으로 관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존감이란 자원이 중요하게 기능하는 것이다. 찬성-동의와 거절-거부의 여부를 결정하고, 자신과 타인의 안전거리를 조정함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낮은 자존감이 문제가 아니라 낮은 자존감을 문제화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좀 더 문제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

'네 멘탈의 대장장이가 되어 멘탈을 단단하게 관리하고 단련하라' 오늘날 자아에게 부과되는 도덕 명령이다. '사회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고에 기초해 있는 신자유주의 사회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자아를 도덕적으로 옳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신의 앞가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의존하는 건 죄악시된다. 경제적 차원뿐 아니라 정서적 차원에서 그렇다. 사회적 연대의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지 않을 때,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 때 개인은 오롯이 고통을 떠안게 되며, 구조가 아닌 주체에게 전적으로 책임 소재를 부가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에서 개인에게 환원된 실패와 리스크의 책임은 심리적 파산 상태를 낳는다. 이는 곧 우울증이나 무기력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불안정한 사회에서 유동하는 리스크를 최대한 예상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졌다. 이런 맥락에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격언이 있을 만큼 불가해하고 불투명한 인간의 마음을 상대해야 하는 인간관계에 대해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접근방식의 출현은 지극히 개연성 있는 귀결로 보인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세상에서 타인(의 고통)을 책임지기 버겁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진지하지 않은 관계, 상대방의 인격 전체를 대면하지 않고 서로의 기대와 목적에 맞게 분절화되고 파편화된 기능을 교환하는 관계들을 맺는다. 이를 테면 새벽에 'ㅋㅋㅋㅋㅋ'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 떡볶이 메이트 같은 식으로. 이렇게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친구를 사귀고 연애 상대를 찾고자 한다. 심심함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재미를 찾고자, 언어 교환을 하고자, 성적 파트너를 찾기 위해, 타인의 관심을 얻기 위해, 직접적인 일대일 소통의 무거움에서 벗어나 보다 가볍고 유연한 온라인 자아로 소통하기 위해, 연결감을 느끼기 위해, 오프라인과 다른 온라인 네트워크만의 고유한 문법이 가진 장점을 활용하기 위해 등등. 각자 '각방'에서 접속한다. '틴더'의 공항에. 전세계에 퍼져 있는 타인들을 여행할 수 있는 초근대성의 비장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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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30대 틴더 유저의 '동친(동네친구와 나이가 같은 동갑 친구, 중의적 의미 중 전자에 해당함)' 실제후기. 라고 불러도 손색 없을 만한 핍진성이 알알이 꽉 차 있어 '쿡쿡'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이를 테면 프로필에 생태계 교란종 바텐더 잭의 프로필에 적혀 있는 '자취하고 잘 취하는'(자취하고 잘 안 취하는 식의 변주도 존재) 문장은 틴더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관용문구이고, '희궁'('경희궁의 아침' 오피스텔에 거주하고 있는 인물의 별칭)의 프로필에 적혀 있는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랐어요.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분과 만나고 싶어요’(친척 격의 문구로 '심리적으로 안정된 분'이 있다) 문구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성적 파트너를 구인하는 유저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자기소개의 관용어구를 꼽아본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Language exchange, 동네친구 찾아요(얼마 전에 상경해서, 이사와서 친구가 없어서), 동갑인 친구 찾아요, (여성 유저만 뜨게 설정해놔서 남성 유저들의 사정은 모르겠으나 남성 분들이 동성친구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 같긴 하다) 여성 분들 환영합니다, 영어 사용자 우대(영어에 좀 더 능숙한 경우일 수도 있고, 외국어를 사용할 때 다른 분위기/뇌의 부위가 활성화(?)돼서 외국어 대화를 선호하는 것 같다), '문자보다 전화가 편해요', 자신이 방문/여행한 국가들의 열거. 범주적으로 분류해보면 추천 및 취향 공유 목적(맛집 추천해주세요 ~ 카페 추천해주세요 ~ 음악 추천해주세요 ~ 책 추천해주세요 ~ 음악, 영화 얘기 나눠요), 선호하는 외모 기준에 대한 설명(180cm 이상, 무쌍 선호, 공룡상 선호, 타투 선호 등등), 'FWB' 구인이 아님을 적극적으로 피력 - 'FWB' 구인하는 이들에 대한 극혐 표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구한다는 내용, 진지하게 연애 상대를 찾는다는 내용 등이 있다.

이렇듯 한없이 가벼운 관계부터 무겁고 진지한 관계에 대한 지향까지, 물리적 근접성에 근거한 관계성의 추구부터 외모부터 섹슈얼리티에 이르기까지 취향에 따른 '매칭'- 최적의 조합을 찾는 곳. 사람으로부터 받은 크고 작은 상처를 품고 있는, 심심함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혹은 일상에서 낯선 만남이 가져다주는 설렘과 즐거움을 찾는(술 마실 때, 술 마시고 나서 알콜 바이브, 술 텐션으로 마음의 빗장을 풀어헤치고 작은 일탈과 모험을 감행하는) 독거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곳. 사람을 (순수하게, 순진하게) 믿지 않는, 믿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어떤 이는 감당하기 힘들겠다 싶으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된 상태로 대체가능한 관계를 맺고, 어떤 이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하려는 듯("문제 있는 둘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힐링 로맨스 영화" 같이) 여전히 희망을 품고 누군가를 찾아헤맨다. 소설의 주인공인 솔과 호의 이야기이다.

‘I TINDER U’

(...) 내게 ‘아이 틴더 유’가 ‘얼마든지 네게서 사라질 수 있다’라면, 호에게는 ‘아이 틴더 유’가 ‘어쩌면 나와 잘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라는 낭만적인 말일 거였다.

<아이 틴더 유>, 정대건

소설을 읽는 내내 '호'에게서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속한 곳도 없고, 이제는 정말 친구도 없어서 팟캐스트만 듣는"(11) 생활에 완전히 해당하지 않지만 거의 유사했다. "연애할 땐 애인이 제일 친한 친구가 되는데, 끝나면 그게 사라져버리니까"(17) 그랬다. 사실 애인이 친구로 지내자고 했지만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스스로 망쳐버렸다. 그러고 나서 어찌저찌 연락을 이어가고 있는 건 (아직은) 소속되어 있는 곳이 같다는 점이 결정적이고, 나도 그 친구도 '외로운 사람'이어서 그런 것 같다.

며칠 전, 소중한 친구 사이라고 생각하는 상대방으로부터 긴 문자가 왔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이어나가기 버겁다는 호소이자 이 관계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조정하면 좋을지 고민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서로의 본심과 성찰을 공유하고 조금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도덕적 명령을 따를 수 있는 채비가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 상대방은 나를 '나만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서운함과 서러움이 폭발하지 않았고, 내가 일방적으로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관계에서 상대방이 하차하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와 다른 인간관계의 문법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내게 얼마만큼의 애정을 품고 있는지 계산하기보다 친구의 관계성의 형식을 이해하는 데 주력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생각보다 잘 모르고 있었다. 좋아하는 과자와 음식에서부터 기후 위기와 청년 이행기에 대한 이야기까지 취향과 가치관이 잘 통한다고 느끼게 만드는 대화는 많이 나눈 편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이야기, 뭣보다 우리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경험은 일천했다. 나는 아직 상대방을 잘 모르고 있다는 인식은 묘한 평온함을 선사했다. 몰랐던 부분에 대해 물어보고, 배우고, 고칠 수 있는 부분을 고치면 개선될 여지가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어쩔 수 없이 관습을 모방하든 참조하든 관습에 매여 있기도 하고, '자기다움'의 고유성과 구체성을 명확하게 표출하기보다 관성에 의존해 움직이는 부분이 있었던 관계를 섬세하게 다듬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그렇게 굳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그대로 괜찮은 사이, 동등한 주체로서 모두가 자유로울 수 있는 관계에 다가설 수 있는 순간이었으니까.

관계는 어떤 식으로든 '필요'의 계기를 품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순전히 '네가 보고 싶어서''네 안부가 궁금해서' 같은 가장 순수한 층위의 친밀성에 기반한 필요리든 정말 욕구의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도구적인 필요이든 '나'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타인이 '나'를 필요로 해주길 욕망하고, 욕망하지 않기를 욕망한다. 욕구/필요need, 요구demand, 욕망desire - 정말 예전에 문학평론가 선생님께서 정신분석학의 기본 개념인 '욕망'을 설명하기 위해 욕구와 욕망이 어떻게 다른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나는 그때 고등학생 때 배운 내용을 떠올려 욕구는 육체적인 본능적인 바람이고, 욕망은 정신적인 바람 이라는 식으로 대답했다가 이게 욕망에 대한 가장 잘못된 인식 중 하나라는 설명을 들었던 것 같다(육체와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서양철학-근대철학의 전통에 대한 비판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 터다). 그럴 필요 없는데 그때 조금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 같다. 아마 질문을 정해진 정답을 호출하는 행위로 인식하는, 질문에는 올바른 정답을 내놓아야 하지 '어림 없는' 오답들은 침묵 속에 놔둬야 한다는 분위기를 오랫 동안 체화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 같다(심지어 오답을 말하면 분위기가 싸해지거나 꼽 주는 분위기도 있었으니 말이다). 언제까지라도 '내 편'이 되어주는 '낭만적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욕망하고, 실제로 그런 인생의 짝을 만난다면 좋겠지만 그런 '행복의 약속'이 만인에게 활짝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랐어요.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분과 만나고 싶어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배제되어버리는 기분이 드는 그 말(33)과 비슷하니 말이다. 그런 관계가 든든하게 곁에 있어주지 않더라도 어떤 말 한 마디 해주는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

“많이 우울해하더니 그래도 글을 완성했네.”

“네 덕분이야.”

“뭐가?”

“나 추위 많이 탔는데 그럴 대마다 여의도의 햇살을 떠올렸어.”

호가 빙긋이 웃었다.

“나는 정말 네가 아니면 유령이었어. 그 시기를 함께 보낸 사람이 너밖에 없었어.”

호가 ‘그 시기’라고 표현하는 걸 들으니 정말로 한 시기가 지나간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끈질기니까 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그랬잖아.”

내가 근거도 없이 쉽게 한 그런 말조차도 그때의 호에게는 필요한 말이었다고 했다.(40)

<아이 틴더 유>, 정대건

몸의 건강이 급작스럽게 급격히 무너진 상황에서 온기를 지닌 누군가가 곁을 지켜주는 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간절한 목표가 달성되지 않아 홀로 마음을 일으켜세우기 역부족일 때, 자존감이 바닥나고 뭔가를 할 의욕이 생겨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괜찮다'는 말을 건네주는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 조금의 여유도 없이 언제나 조급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어느 시기'를 겪어내고 견뎌내는 데 팟캐스트로는 도저히 역부족일 때가 있다. 이름 붙이기 애매모호한 복잡하고 불안정한 관계일지라도, 끊임없이 내 욕망과 상대방의 욕망 사이에서 관계의 거리와 온도를 수정하고 수리해야 하는 원만하지 못한 관계일지라도, 순간순간의 필요가 맞아 함께 있는 순간들('매직 아워' 같은 짧고 소중한 시간들)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상대방이 대체할 수 없는 '스페어'가 되어있는 때가 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안전거리'를 침범해온다면 도망치지 않기 어렵겠지만 '2km' 그리고 '17km' 떨어진 곳에서 상대방의 평안한 밤과 안녕, 행복을 기원해주는 <아이 틴더 유>가 보여주는 온기에 위로를 받았다.

언론사 취업을 준비 중인 N,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K, 박경리 소설읽기를 시작한 S, 홍대 인디 씬을 연구하는 문화연구자 J, 연극을 공부하기 위해 편입을 준비 중인 T - 틴더로 알게 된 친구들에게 <아이 틴더 유>를 열심히 영업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꾸려가다 한 번쯤 매직 아워 같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길 가볍게 희망해본다.

+ 빵 터졌던 부분

나는 평일에는 한 번, 주말에는 자유롭게 틴더 5부제를 하면서도 줄기차게 관계를 피해 다녔고, 호는 외로움을 못 이겨 가금 틴더를 돌리며 끈질기게 관계를 찾아다녔다. 나는 틴더에서 로맨스(백마 탄 왕자)를 찾아다니는 호를 ‘틴더렐라’라고 불렀다. (19)

-익명으로? 미쳤어? 나 같으면 틴더 프로필 sinchoonmunye로 바꿨다 (38-39) -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당선한 호의 소식을 들은 솔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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