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음)

접속 무비월드의 '완소'(오랜만에 꺼내본다 낡은 신조어...) 코너 '미안하다 몰라봐서'에서 영업당해 본 로맨스영화. 알고 보니 33분 짜리 단편영화여서 무비월드의 축약된 버전과 본편이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20자 평처럼 30분이 3분처럼 느껴진 현실 로맨스 영화였고, 좋았다.

그건 내가 이별의 여파를 여전히 겪고 있고, 일이 안 풀리는 예술가 지망생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다. 그건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게 주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홍상수 영화의 예술가/지식인 (지망생) 주체의 속물성을 냉소적으로 제시했다면 이 영화는 그 찌질함을 냉소하거나 연민하거나 하지 않고 노출시킨다. 그로 인해 밝고 능동적인 여성주인공의 매력은 극대화되지만 여주의 서사가 단촐하고, 평면적인 캐릭터로 그려지다 보니 남성의 판타지가 투영된 대상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아쉽다. 그렇지만 감정에 서툴고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보다 자기 상처에 몰두해 있는 남자가 감정에 솔직한 여자를 만나고, 그 여자도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지 않는 남친과 헤어지고 얼마 전부터 관심을 갖게 된 영화에 꽤 진심인듯 보이는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많은 남자를 만나 서로 호감을 느끼고 좋아하게 된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그런 시시콜콜함으로 이 연애담을 대했을 때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독지망생 백도환(엄태구 분)은 여자친구와의 이별로 힘들어하고 있다. 그녀가 던진 말이 비수처럼 박혀 상처를 깊게 입었다. 시나리오를 작성하고자 띄운 한글창에 그 말을 옮겨적어 보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동료로부터 영화모임에 나오라는 제안을 받고, 영화인들이 많이 올 거라는 설득에 마지 못해 응한다. 수줍게 자기소개를 하는 도환의 모습에 심은하(이수경 배우)는 살짝 호감을 느낀 눈치다. 자신처럼 하늘과 나무를 관찰하고 있는 은하의 모습에 홀린듯 도환은 그녀를 도촬하고, 은하는 도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대화가 이어지게 된다. 영화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영화친구'가 되자고 제안하는 은하. 도환은 조금 부담스러워하면서 몸을 살짝 뒤로 내빼보지만 적극적으로 말을 붙이며 ㅡ 내 성이 궁금하지 않느냐고, 다른 사람들은 다 물어본다고, 성이 심이라 심은하라고, 배우 심은하 씨보다 더 예쁘다고 ㅡ 다가오는 은하에 이내 무장해제가 된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 진심리었던 도환은 심은하는 초예쁘셔서 영화를 직접 봤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사실관계'(?)를 규명하고, 명장면을 줄줄이 읊으며 급발진해버린다. 그렇게 둘의 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은하는 도환에게 묻는다. 지금 쓰고 있는 시나리오는 어떤 내용이냐고. 도환은 시나리오 설명을 빙자해 자신의 연애담 - 상처주었던 말을 들려준다. 그러자 은하는 피드백을 준다. 여자를 그냥 단순히 이별을 통보하는 대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그 여자는 나름의 이별을 준비하는 기간이 있었을 거다라고 다가가보는 건 어떠냐고. 나름 충분히 준비하고 언질을 줬을 텐데 몰랐던 거죠 무심한 남자라서. 가만히 듣고 있던 도환은 눈물을 흘리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그렇게 은하에 대한 연모의 정이 점점 불어나자 도환은 자신이 먼저 은하를 불러내 만남을 가져보지만 약지의 반지를 발견하고 잠시 잊고 있었던(잊으려 했던)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고 그녀를 차갑게 대한다.

다음날 7통씩 전화를 걸고, 연락을 받지 않은 상대에게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려달라고 셀프 반성 ㅡ 자책의 똥꼬쇼를 벌이다 겨우겨우 그녀를 만나게 된다. 거기서 '좋아해선 안 되는 널 좋아해서 괴롭다'는 진의를 품고 있는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고, 은하가 남자친구가 헤어졌다는 소식을 전하며 해피엔딩(?)을 맞게 된다. 사실 엄태구의 매력을 걷어내고 백도환 이란 인물만 놓고 보면 은하 입장에서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글 쓰는 남자' '영화하는 남자' 괜히 최악의 연애상대 유형 영역에서 양대산맥을 이루는 쌍두마차로 꼽힌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응원하고 싶었다. 둘이 잘 돼서 사귀게 된다면 도환은 은하에게 영화 말미처럼 장난을 잘 치고, 자기 감정을 좀 더 솔직하게 전달하기를 바랐다. 은하 앞에서 영화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영화를 매개로 서로의 이야기를 많이 하길 바랐다. 상처 앞에서 멈춰서서 마음을 그만두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쉬이 상대를 대상으로 고정시키지 말고 둘 다 관계의 주체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20대 초반에 독서모임에 몇 번 나갔다. 내가 직접 독서모임을 주도적으로 조직해보기도 하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조직한 독서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유유 출판사에서 독서모임을 꾸리는 법에 대한 책을 그때 읽었더라면 좀 더 잘할 수 있었을까. 그러지 않았을 것 같다. 어쨌든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 갔던 자리였으나 거기서 상대방에 대한 관심을 적절하게 잘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으니까. 지금도 사정이 크게 나아진 것 같진 않다. 가장 달라진 게 있다면 포기를 하는 능력이랄까,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능력이랄까.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새로 경험해보고 싶다. 문학이나 영화 에 대한 애정과 타인에 대한 호기심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자리가 잘 없는 만큼, 혼자서 감상하고 향유하는 것도 좋지만 문학과 영화 모두 우정을 요청하니까. 그게 이런 식으로 블로그나 SNS에 리뷰를 올리고, 다른 이들의 리뷰를 읽는 방법도 있지만 얼굴을 맞대고 각자의 육성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도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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