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민지의 [버블 패밀리]를 드디어 봤다. '드디어'라고 할 만한 전사(pre-history)가 있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기서 상영일정이 있어서 보고 싶었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 놓쳤다. 그리고 ebs 다큐페스티벌 대상작으로 수상돼 상영했는데 TV 상영일정과 일정이 맞지 않아 놓쳤다. 온라인상으로 볼 기회가 찾아봐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영화제에 최대한 다 출품하고 돌고 나서 IPTV나 OTT로 가야 하는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다'토요판'을 챙겨 읽어야겠단 생각에 한겨레에 접속했다가 강유가람 감독의 버블 패밀리 에 대한 글을 읽었다. U+모바일 tv에 영화 월정액에 가입돼 있는 상태임을 최근에 확인하고 ㅡ 그래서 핸드폰으로 볼 수 있는 영화와 IPTV 상에서 볼 수 있는 영화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심지어 IPTV로 결제하고 봐야 하는데 모바일로는 무료. 모바일에서 시청가능한 영화를 IPTV에 전송해서 볼 수 있는 환경이다. 이걸 몰라 호구딜로 돈을 좀 날렸다 ㅡ 검색해봤더니 갓챠. 잡았다 이 영화...

영화내용은 이미 대충 알고 있었다. 제목이 암시하듯 호황기에 부동산에 투기하며 부를 늘렸던 가족이 IMF 외환위기에 직격타를 맞아 중산층의 대열에서 밀려난 이야기. 여전히 부동산에 집착하고 있는 부모님을 감독이 직접 담아낸 영화라고.

박해천의 '아파트' 3부작 등 아파트와 중산층에 대한 담론에 어느 정도 익숙한 편이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강남 개발로 폭발하기 시작한 부동산 투기가 1980년대 3저 호황과 올림픽의 열풍을 타고 이어졌고, 1990년대 일산, 산본, (분당?) 3기 신도시 개발까지 계속되다 1997년에 파산한 이야기. 사실 재벌과 상류층은 오히려 IMF를 기회 삼아 부를 더 축적할 수 있었지만 중산층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고.

어느 정도 예상되는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영화가 시작되자 몰입해서 봤다. 이는 아마도 '내 집'을 마련할 수 없는 청년 세대 감독이 애증의 관계인 부모님과 '우리 집'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 현실적인 고민이 담겨 있고, 비빌 부동산이라고 없는 동/흙수저로서 집과 땅에 대한 여정을 통해 부모님을 이해하게 되는 화해의 서사여서 그랬던 것 같다.

가족들이 묻는 말을 제대로 답해주지 않는 아버지(영화제작 지원비를 갖다 쓰자는 아버지;;), 남편의 사업이 무너진 이후로 15년 동안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오신 어머니, 영화를 찍는 딸. 빚이 있고, 1년-1년 반 뒤면 현재 살고 있는 집이 허물어질 예정이지만 현실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아니 현실적인 대책을 궁리하고자 노력하지 않고 여전히 부동산 대박을 꿈꾸고 있는 부모님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부동산 버블이 한 가족에게 남긴 상흔과 균열이 무엇인지 바라보게 한다.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주지 못한, 그래서 자식을 빚쟁이(학자금대출)로 만든 부모에 대한 원망에 대해 말했다. 그런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없어 독립했으나 졸업 이후 다시 부모님 집으로 되돌아온 감독에게 아버지는 종잣돈을, 어머니는 감독 명의의 등기문서를 선물한다. 감독은 땅 살 돈이 있었으면 등록금을 내주지 그랬냐며 엄마에게 따지지만 엄마는 땅값이 오르면 몇 배 오를 수 있다고 답변한다.

100만원 짜리 아파트를 샀다 300만원에 팔아본 울산에서의 첫 부동산 경험, 이 원초적 기억 이후 IMF 전까지 발전과 성장의 낙관주의로 일관했던 어머니의 세대적 계층적 감각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뭣보다 빚이 남아 있고,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에서 남들도 다 어렵게 살고 있다는 체념과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낙관주의가 묘하게 섞여 있은 어머니의 태도를 보며 내 어머니가 많이 떠올랐다. 먹고 사는 밥벌이의 전장에서 수 십 년 동안 뒹군 베타랑의 능숙하면서도 피곤함이 섞인 에너지 같은 거랄까.

가족들끼리 각자의 경제상황과 사정을 제대로 모르고 있고, '돈 문제'에 있어 소통과 합심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모습이 계속 이어지는 걸 보며 참 어려운 거구나 싶었다. 가족이라는 거, 인륜적 공동체기도 하지만 뭣보다 경제적 공동체/결사체라는 사실.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각자의 관점과 태도가 다르면 많이 어렵구나ㅡ 어렵겠구나 싶었다.

최근에 아빠가 이런 얘기를 했다. 부동산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알았다고.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대략 이런 뉘앙스였다. 과감하게 공격적인 투자(투기)만이 중산층으로 도약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길임을 이제야 알았다고. 나는 거기서 '콘크리트 유토피아' 학자연하는 소리를 운운할 수 없었다. 중국집, 공판장, 버스 기사, 청소일, 현재 아파트관리 일 등 다양한 직종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고, 다단계 같은 곳에 돈을 손실해가며 어쨌든 좀 더 잘 살아보자고 노력해온 세월이 유구하다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 노후 대비를 하기 위해서라도 든든한 지원군의 존재를 필요로 할테니까.

8살 때인가 옆집에 사는 '이웃사촌'과 강원도 금강 쪽으로 같이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이웃사촌은 회사에 다니고 계셔서 승용차를 끌고 가 텐트를 치고 숙박했다. 우리 집은 그때 공판장을 하고 있던 때라 트럭을 타고 가서, 트럭 짐칸에 설치된 천막 같은 구조물을 텐트 삼아 숙박했다. 아까 1990년대 유년기의 기억을 회상하며 빈부격차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을 진하게 겪은 기억이 없다고 적었는데 생각해보니 이때 한 번 강하게 겪었던 것 같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트럭에서 자는 '가난한' 우리 가족 모습을 남들이 어떻게 볼지 생각하면 부끄러웠던 것 같다(그때 나는 7-8살 정도였다). 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텐트에서 자는 게 '정상적'인 것 같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나는 뭔가 분하게 부끄러워서 잠을 잘 못 잤던 것 같고, 그런 식으로 투정 몽니를 부렸었는지 아버지는 이웃사촌네 텐트 가서 자라는 말을 하셨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쪽 팔린' 짓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는수없이 마음을 추스리고 분을 삭이고(?)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차박의 원조(?) 격이었고, 4인 가족이 자기에 불편한 환경도 아니었고 그때 다녔던 치악산 국립공원이나 금강 같은 여행지 모두 엄청 좋은 추억인데 그땐 마르크스도 베버도 박정희 전두환 아무도 몰랐다.

나는 현재 아파트에 살고 있다. 엄마 집인데 여기로 이사한지 5년 정도 됐다. 그전까지 전세살이를 오래 했었다. 이사를 많이 다니다 할아버지가 고향땅을 팔아 지은 빌라에 들어가서도 꽤 오래 살았다.

기억 하나. 초3 때인가 서프 라는 게임을 했다. 이때 친구집에 놀러 갔는데 아마 아파트였던 것 같다. 친구는 현질을 해서 캐시를 바르고 있었는데 그게 되게 편리하고 좋다고 느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까지 방문한 친구네 집들은 아파트긴 아파트만 브랜드 아파트가 아니었다. 중학교 이후로 브랜드 아파트를 갈 일이 생겼는데 여긴 뭔가 좀 다르구나 하는 걸 아파트 단지에서부터 좀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단지 수도 많고, 대리석 기둥들도 있고, 약간 게이티드 커뮤니티 같은 성격이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던.

만났던 친구들은 모두 잘 살았다. 강동구의 좋은 아파트, 과천의 좋은 아파트, 구로 쪽에 중소기업. 유년기/청소년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계층화된 경험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주눅들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학원에서도 당연하게도 나보다 잘 사는 집안의 분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다 나랑 비슷한 형편인 친구를 보면 괜히 동질감이 느껴지고 마음이 갔다. 그래도 잘 사는 집안의 고학력 부모님 맡에서 어렸을 때부터 학업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온 얘기를 많이 듣고 조금 시야가 유연해질 수 있었다. 계층 눈치를 보지 않고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날 수 있는 경험, 내 스스로 주눅 들거나 컴플렉스가 사라잡히지 않고 내 자존을 지키며 사람들을 사귈 수 있을지 앞으로의 과제 중 하나인 것 같다.

내 학자금 대출은 몇 십 만원 정도 남았다. 대학교 1학년 때 생으로 나온 등록금을 다 지원받았고(한 학기에 300만원 초반대), 2학년부터 부분 장학금을 받아서 100만원 정도 냈던 것 같고, 3학년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그러다 대학원 와서 2학기 총 1000만원을 지원받았고, 계속 지원만 받을 순 없다는 생각에 학자금 대출 2학기를 받았다. 그러니까 총 1000만원. 조교 장학금과 알바로 열심히 갚아나간 결과 상환을 거의 다 할 수 있었다. 대학 4년 내내 기숙사 4인실을 배정받을 수 있었고, 대학원도 집에서 통근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주거비에서 지출이 많이 안 나오니까 주객전도 식으로 알바를 미친듯이 하지 않아도, 친구들이랑 밥도 먹을 수 있었고 연애도 할 수 있었다.

막연하게 독립된 생활을 상상해볼 때가 있다. 월세와 공과금, 세금 이 있는 삶. 눈 뜨기 싫어도 새벽-아침에 일어나지는 삶. 어쩌면 집에 친구를 초대해 음식을 해먹을 수도 있고, 영화를 같이 볼 수도 있는 삶. 수 천 권의 책들 중 고르고 골라 소박하지만 튼실한 미니멀한 서재를 꾸린 삶. 하지만 내 집 마련의 꿈이 너무나도 멀어 2년마다 (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좀 다르겠지만. 혹은 청년임대주택 등도 있으니까...) 이사해야 하는 삶이 좀 막막해지기도 한다. 내게도 마민지 감독처럼 졸업 이후 깜짝독립선물 같은 게 준비돼 있을까. 부모님은 어쨌든 자식에게 손 안 벌리고 노후를 대비하면서 가능하다면 자식들에게 보탬을 주시려 하는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도움이 돼 드릴 수 있을까.

아빠 혹은 엄마와 언제 한 번 여행을 가보고 싶은데 그런 날이 언제 올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꼭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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