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음)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채널을 돌리다 지브리풍의 애니메이션을 발견하고 화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단 몇 초 사이 이 애니메이션을 끝까지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며칠 전, 똑같은 과정을 거처 <고양이의 보은>을 거의 20년 만에 재관람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극장에 가서 본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였다. 인간세계에서 고양이 나라로 넘어가는 과정을 아치형의 풀숲을 기어 통과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마 <이웃집 토토로>나 다른 애니메이션의 장면이 삽입돼 기억이 왜곡된 모양이었다. 처음 왓챠에 가입했을 때, 지금까지 본 모든 영화를 기록해보자는 심정으로 별점을 매겼는데 <고양이의 보은>은 2.5점이었다.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 3점으로 수정했다. 빌런의 매력도가 떨어지고, 자신감이 없었던 소녀가 고양이 남작과의 모험을 통해 '나다워지는' 과정이 조금 심심하고 평이한 동화처럼 그려졌다고 느꼈다. 매력적인 장점이 부족했던 영화로 느껴졌지만 재회가 반갑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후 <ANIONE> 채널에서 MZ 세대에게 추억의 애니메이션을 연속해서 방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방영시간 말미에 발견한 것이다. 나는 사진 한 장을 찍어 이 영화를 애정한다고 했던 친구에게 보냈고, 우리는 각자의 최애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꼽아보며 추억토크를 이어갔다. 부모님이 영화관에 데려다주신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고, 친구들과 영화관을 자주 찾는 아이도 아니였던 내게 학교 선생님들은 지브리의 주요 작품들을 십대에 챙겨볼 수 있게 해주신 은인이었다.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웃집 토토로>를 학교에서 봤다(<가타카>, <말할 수 없는 비밀> 등등). 이십 대 초반에 지브리의 명작들을 몰아보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과 어렸을 때 봤던 영화들을 재관람했다. 정말 좋았다. 나는 확실히 이쪽이었다. 디즈니, 픽사 쪽보다. 이런저런 고민과 걱정, 불안과 스트레스를 잠시 잊고,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아왔음에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는 위로를 건네고 싶어지고, 잊고 지냈던 고마운 사람들-고마운 일들이 기억나고 그랬다. 성인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영화와 소설이 건네는 위로와 다른 결의 정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시간이 함께 전해지는 데서 오는 정서적 파장이 있었다. 어렸을 때 친했던 친구와 재회해 어색하지 않게 편안한 시간을 잠시 잠깐이나마 보낸 느낌이랄까. 현실이라면 각자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많이 다르게 커버린 현재와 크고 작은 위화감과 어색함을 느꼈을 테지만 나는 달라졌어도 영화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안타깝게도 영화가 시작한지 20 여분 지난 시점부터 시청을 시작했다. 골동품 가게에 도착해 바론 훔베르트 폰 지킹겐 백작을 만나는 장면 즈음부터(보자마자 <고양이의 보은>의 오마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고양이의 보은>이 <귀를 기울이면>의 스핀오프 격이어서 흥미로웠다). 다행히 영화소개 글을 참고해 영화의 흐름을 수월하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영화는 첫사랑과 자아 형성을 동시에 겪는 사춘기 소녀의 설레는 감정에서부터 서로 감정이 어긋났을 때 마음이 무거워지고 뻐근해지는 경험까지, 진학이 아닌 진로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부터 실제로 꿈에 부딪쳐보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나는 경험까지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