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기울이면 (2disc)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다카하시 이세이 외 목소리 / 대원디지털엔터테인먼트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 스포일러 있음)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채널을 돌리다 지브리풍의 애니메이션을 발견하고 화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단 몇 초 사이 이 애니메이션을 끝까지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며칠 전, 똑같은 과정을 거처 <고양이의 보은>을 거의 20년 만에 재관람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극장에 가서 본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였다. 인간세계에서 고양이 나라로 넘어가는 과정을 아치형의 풀숲을 기어 통과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마 <이웃집 토토로>나 다른 애니메이션의 장면이 삽입돼 기억이 왜곡된 모양이었다. 처음 왓챠에 가입했을 때, 지금까지 본 모든 영화를 기록해보자는 심정으로 별점을 매겼는데 <고양이의 보은>은 2.5점이었다.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 3점으로 수정했다. 빌런의 매력도가 떨어지고, 자신감이 없었던 소녀가 고양이 남작과의 모험을 통해 '나다워지는' 과정이 조금 심심하고 평이한 동화처럼 그려졌다고 느꼈다. 매력적인 장점이 부족했던 영화로 느껴졌지만 재회가 반갑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후 <ANIONE> 채널에서 MZ 세대에게 추억의 애니메이션을 연속해서 방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방영시간 말미에 발견한 것이다. 나는 사진 한 장을 찍어 이 영화를 애정한다고 했던 친구에게 보냈고, 우리는 각자의 최애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꼽아보며 추억토크를 이어갔다. 부모님이 영화관에 데려다주신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고, 친구들과 영화관을 자주 찾는 아이도 아니였던 내게 학교 선생님들은 지브리의 주요 작품들을 십대에 챙겨볼 수 있게 해주신 은인이었다.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웃집 토토로>를 학교에서 봤다(<가타카>, <말할 수 없는 비밀> 등등). 이십 대 초반에 지브리의 명작들을 몰아보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과 어렸을 때 봤던 영화들을 재관람했다. 정말 좋았다. 나는 확실히 이쪽이었다. 디즈니, 픽사 쪽보다. 이런저런 고민과 걱정, 불안과 스트레스를 잠시 잊고,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아왔음에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는 위로를 건네고 싶어지고, 잊고 지냈던 고마운 사람들-고마운 일들이 기억나고 그랬다. 성인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영화와 소설이 건네는 위로와 다른 결의 정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시간이 함께 전해지는 데서 오는 정서적 파장이 있었다. 어렸을 때 친했던 친구와 재회해 어색하지 않게 편안한 시간을 잠시 잠깐이나마 보낸 느낌이랄까. 현실이라면 각자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많이 다르게 커버린 현재와 크고 작은 위화감과 어색함을 느꼈을 테지만 나는 달라졌어도 영화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안타깝게도 영화가 시작한지 20 여분 지난 시점부터 시청을 시작했다. 골동품 가게에 도착해 바론 훔베르트 폰 지킹겐 백작을 만나는 장면 즈음부터(보자마자 <고양이의 보은>의 오마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고양이의 보은>이 <귀를 기울이면>의 스핀오프 격이어서 흥미로웠다). 다행히 영화소개 글을 참고해 영화의 흐름을 수월하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영화는 첫사랑과 자아 형성을 동시에 겪는 사춘기 소녀의 설레는 감정에서부터 서로 감정이 어긋났을 때 마음이 무거워지고 뻐근해지는 경험까지, 진학이 아닌 진로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부터 실제로 꿈에 부딪쳐보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나는 경험까지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사랑은 도서카드를 타고

아마 90년대 학번까지는 도서카드[독서카드?]에 대한 저마다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 같다. 1990년대부터 대학도서관들이 대출 기록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전산화하게 되면서 도서카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걸로 알고 있다. 아날로그 감성의 정점 중 하나로 도서카드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도서카드를 대체하는 디지털 디바이스나 시스템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서점에서 자신이 읽은 책에 '읽었어요'를 표시한 유저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이는 정말 '읽었다'(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전제하고)는 건조한 사실을 보여줄 뿐이며 '나'의 독서와 '그'의 독서 사이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없다. 저마다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독서경험을 담아내지 못하는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만이 남아 독서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하지만 도서카드는 다른 누군가가 '같은 책'을 읽었다/읽고 있다는 사실을 지시함으로써 독서경험의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성격을 강화한다. 내가 현재 넘기고 있는 페이지에 그의 손길이 닿았음을 의식/상상하게 되고, 도서카드에 기록된 정보 - 날짜/이름/추가적 신상정보(대학도서관 도서카드의 경우 학번과 학과를 적는 란이 있다)는 구체적인 시공간에 존재하는, 익명이 아닌 고유명으로 지닌 독자의 정체를 그려보게끔 만든다. 내가 읽으려 하는 책에 연속적으로 같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면...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나와 같은 책을 읽은 그의 감상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도서카드는 일종의 편지일 지도 모른다. 발신자와 수신자의 이름만 존재하는 편지. 발신자를 상상해낸 독자는 스스로를 수신자로 탄생시키고 책은 길고 긴 편지가 된다. 연결과 연대를 추동하는 장치로서의 도서카드.

소설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이 표상에 축적된 여성혐오적 시선을 고려하면 용어사용을 망설이게 만들기도 하지만 서사를 좋아하는 여성독자가 작가가 되는 과정을 그려낸 영화이기에 긍정적으로 문학소녀란 용어를 전유하고자 한다) 시즈쿠는 매번 자신보다 앞서 읽은 세이지를 궁금해하게 된다(영화 후반부 약간의 반전이 밝혀진다). 그리고 동시에 첫사랑의 대상을 갖게 된다. 나보다 멋진 '이상적/환상적 존재'를 좋아하게 되는 짝사랑으로서 첫사랑, 첫사랑으로서 짝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의 씨앗을 품을 수 있는 토양으로 변한 시즈쿠의 영혼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을 시작하게 된다. 장래에 대한 고민으로 통칭되는 존재론적/실존적 물음이 봇물 터지듯 내면에서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영혼의 밀도가 달라지면서 시즈쿠는 우울해진다. 혹은 고민이 깊어지는 과정에서 이를 나눌 수 있는 친구와 조력자를 만나지 못해 힘들어한다.

컨트리 로드

이 길 따라 계속 걸어가면

우리 마을 보일 것 같아

저기 마을 컨트리 로드

나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살아보자 다짐했었지

너무 슬퍼도 울지는 말고

멋지게 당당하게 살아가자고

컨트리 로드

이 길 따라 계속 걸어 나가면

우리 마을 보일 것 같아

저기 멀리 컨트리 로드

잠시 지쳐 쉬어갈 때면

어김없이 우리 마을 생각이 나

그럴 때면 저 언덕길 보고

정신 차려 다시 나아가야지

컨트리 로드

이 길 따라 계속 걸어 나가면

우리 마을 보일 것 같아

저기 멀리 컨트리 로드

아무리 힘들고 주저앉고 싶어도

눈물은 절대로 흘리지 않을래

다 떨쳐낼 시간이야 무거워진 내 마음도

날 붙잡는 추억들도

컨트리 로드

이 길 따라 우리 마을 갈 수 있대도

무턱대도 가진 않을래

저 먼 곳에 컨트리 로드

컨트리 로드

내일부터 다시 힘내보는 거야

그리운 맘 꾹 눌러 담고

잘 있거라

컨트리 로드

https://www.youtube.com/watch?v=Ps2mA-Poxm8&t=13s

시즈쿠는 절친 유코와 남사친을 이어주려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남사친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무심했던 건 자신이었다며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골동품 가게를 찾게 되고, 거기서 고양이 바론에 이어 세이지를 만나게 된다. 골동품 상점 아래층의 공간에서 자신이 번역한 가사의 <컨트리 로드>를 세이지와 함께 공연한 시즈쿠는 소설을 써보기로 결심한다. 바이올린 장인이 되고 싶다는 확고한 꿈이 있는 세이지, 자신보다 한 걸음씩 앞서가는 세이지를 좋아하려면 그에게 어울리는 멋진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코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자격이 필요한 것인지 반문하지만 난 시즈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꿈을 찾아 실현해가는 입장을 공유하여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할 수 있는 파트너, 시즈쿠가 바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의 형태가 이런 방식이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주는 위로는 꿈을 찾아 분투하는 시즈쿠의 여정을 곁에서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봐주고 도와주는 조력자들의 존재가 아닐까 싶었다. 고입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시험성적이 곤두박질친 자녀를 다짜고짜 혼낸다거나 '지금이 아니라도 괜찮다' '나중에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회유를 가장해 강요하는 식이 아니라 시즈쿠의 선택이 가져올 어려움의 크기와 성격을 알려주고, 한 번 해보라고 지켜봐주시는 아버지(도서관 사서 아버지가 평소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노력하는 시즈쿠의 모습을 지켜봐왔기 때문에 이 비현실적인 캐릭터에 개연성이 부여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시즈쿠에게 첫 독자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암석에 둘러싸인 원석처럼 시즈쿠의 재능을 유심하고 꼼꼼하게 관찰하고 응원해준 세이지의 할아버지, '나다운 나'를 찾아보고 싶다는 마음과 '더 나은 나'로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을 들게 하고 '글을 잘 쓴다'고 상대방의 장점을 응원하고 격려해준 '남친' 세이지. 자신의 길을 찾아 걸어나가는 과정이 암중모색에 가까울 때가 많아 고되고 무엇보다 외로울 수 있는데 오히려 시즈쿠는 이 길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깊게 이해해주고 응원해주는 친구와 동료, 조력자를 만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달 동안 '따로 또 같이' 행했던 도전의 경과와 소회를 나누고, 세이지는 시즈쿠에게 너를 좋아한다고,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고백한다. 시즈쿠는 승낙한다 !!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재벌 혹은 상층계급의 남성과의 결혼으로 끝나는 전통적인 한드의 신데렐라적 결말에 지극히 냉소적이던 나였는데 세이지와 시즈쿠의 청춘.설렘.순수한 사랑의 언약에 마음이 모찌처럼 말랑말랑해져 버렸다... 영화 말미에 세이지가 너를 태우고 언덕길을 오르고 싶다고 낑낑거리며 말하지만 시즈쿠는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며 자전거에서 내려 홀로 언덕길을 오르는 장면이 있다. '컨트리 로드'를 부르며 씩씩하고 명랑하게 자기 삶을 살아가는 시즈쿠가 아니었더라면 <귀를 기울이면>의 매력이 반감되었을 거라 예상될 정도로 시즈쿠의 에너지는 자신의 길이 맞는지 방황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에게, 또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의심하며 위축되어 있는 이들에게 진솔한 응원과 위로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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