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선생님의 <다시 자본을 읽자> 서두에 적힌 독서론이 새삼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를 변화시키는 주체적·변혁적 독서. 약간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어요. 잘 알고 있는 내용인 줄 알았는데 실상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얼어붙은 영혼을 일깨우는 도끼가 되었던 책이, 굳어버린 생각과 감수성을 살아 있게 하는 망치가 되었던 책이 예전에 분명 있었는데 말이죠. 앞으로 종종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로 했습니다. 현재 내가 어떤 앎을 욕망하고 있는지, 그런 욕망의 발로로 집어든 책이 남긴 질문이 무엇인지 말이죠.


 1980년대 출판과 독서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반가움을 느꼈습니다. 이 시기 출판과 독서운동에 대한 역사적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는 중이어서요. 그래서 이번 북클럽자본 소식지 2호에서 1980년대 출판, 독서, 그리고 서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북클럽자본 독서모임 자체가 ‘1980년대 독서적인 것을 지속·반복하고 있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일신의 안위나 세속적 성공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남들과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저변에 깔려 있다고 생각해서요.


 흔히 1980년대의 책 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운동권, 이념서적, 사회과학, 세미나 같은 키워드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변혁적 사회운동의 이론적 자원을 얻고자,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의 해답을 얻고자 치열하게 읽고 토론하고 투쟁하는 청춘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들의 독서에 대한 독서를 제 나름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1980년대는 사회과학 출판의 전성기로 불리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시기에 출판계의 여러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혹시 일본에서 출간된 책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세로쓰기로 인쇄돼 있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어야 합니다. 한국도 세로쓰기를 사용해왔는데 가로쓰기로 변경된 시기가 바로 1980년대입니다. 여기에 한자어 대신 한글 전용을 채택하면서 가독성이 크게 증가하게 됩니다. 기존의 납 활자 식자에서 사진식자기와 컴퓨터 조판이 도입돼 제작 기간이 단축되고, 책값이 저렴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출판산업적 차원에서 일어난 질적 변화 속에서 대학진학율이 30%를 상회할 정도로 고등교육을 받은 식자층이 증가함에 따라 책의 초판 평균부수는 3,000~3,300부 수준까지 상향됩니다(현재 인문/사회 분야 신간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고 하지만, 1,000부를 넘기는 책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ㅠㅠ ).


 이런 출판산업적 배경도 배경이지만 뭣보다 출판문화적 차원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화과학 출판의 시대를 이끈 출판인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지요. 이미 1970년대부터 (동아일보) 해직언론인들을 중심으로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등장했고, 학생운동권들이 졸업 이후 부끄럽지 않게생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으로 출판업 종사를 선택했다고 합니다(민주화운동 중에 수배나 전과기록이 남아 일반회사에 취업할 수 없는 조건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출판 행위 자체가 정치적·문화적 운동이었던 셈이죠. 한편 이때까지 한국 출판계가 저작권법에 가입하지 않아 해적출판이 난무했다고 합니다. , 복사기가 도입돼 대량복사가 가능해지면서 대학가의 서점과 인쇄가게들에서 전공서적의 복사본을 팔아 수익을 올렸다고 합니다. 혹자는 이 시기 출판업을 적은 자본을 가지고 뛰어들 수 있었던 일종의 벤처사업적 성격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고요. 사회과학 서적을 출판하면 사회과학 서점 및 운동권 네트워크를 통해 일정 부수 이상 판매고가 보장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성과 시장, 지적 시장이 역동적으로 움직인 결과인 것 같습니다.


 외국에는 100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출판사와 서점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한국의 경우, 근대출판의 역사가 여타 유럽국가에 비해 짧은 편이지만 출판부수와 종수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속한다고 합니다. 1970-80년대 사회과학 출판을 이끈 주역들의 이름을 살펴볼까 합니다. 1970년대 대표적인 사회과학 출판사로 전예원, 두레, 청람문화사, 정우사, 아침, 한길사 등이 있었고, 1980년은 오늘, 풀빛, 공동체, 한울, 백산, 거름, 녹두, 미래, 학민사, 세계, 석탑, 사계절, 온누리, 실천문학, 청사, 중원문화, 지양사, 한마당, 산하 같은 출판사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양서들을 많이 출간하고 있는 까치, 돌베개 같은 출판사도 중요한 이름인 만큼 적어둬야겠습니다.


 이런 사회과학 출판사가 출간한 책들은 검열 등의 출판탄압으로 인해 대형서점에 진열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사회과학 책은 오늘날 사회과학코너에 분류되고 진열되는 책과 좀 달랐다고 합니다. ‘이념서적이라 불리는 책들이 사회과학 책으로 불리기도 했던 것이지요. 이런 책들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사회과학 서점들에서 구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회과학 서점들은 출판사와 학생들을 연결해주는 고리, 자율적인 문화공간으로 기능했습니다. 많은 사회과학 서점들이 대부분 폐업해서 현재 남아 있는 서점은 서울대 근처 <그날이 오면>과 성균관대 근처 <풀무질>이 유이하다고 합니다. 이런 서점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개인적으로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공간이 보존하고 있는 기억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확인할 길이 없어져서요


 당시에 존재했던 사회과학 서점으로 광장’ ‘열린 책방’ ‘그날의 오면’ ‘집현서점’ ‘장백’ ‘논장’ ‘민중서점’ ‘오늘의 책’ ‘ᄋᆞᆯ’ ‘다락방’ ‘인 서점’ ‘나눔터’ ‘전야’ ‘풀무질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이오면> 서점이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으로 전통을 연속적으로 계승하는 측면이 강하다면, <풀무질>은 청년들이 인수해 경영인이 바뀜에 따라 동물권, 비거니즘, 페미니즘 등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의제들을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1980년대는 출판-서점-독자의 네트워크가 역동적이고 끈끈하게 존재했기 때문에 그 시대 특유의 출판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독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서점을 찾아 책을 짚어들었던 걸까요. 사회변혁을 위한 이론적 무장과 이념의 학습 같은 목적지향적 언어로 포괄되지 않는 미세한 마음의 결들을 상상해봅니다. 영화 <1987>에서 호감 가는 선배의 권유를 따라 만화동아리에 갔다가 광주비디오를 보게 되었던 연희’(김태리 분)처럼 당대 청춘들에게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었을 거라 짐작해봅니다. 그렇게 누군가가 건넨 한 권의 책을 읽고 인생의 방향을 정하게 되었다는 일화를 듣다 보면 책과 더불어 사람과 사회를 한꺼번에 만나는 독서를 했을 때 가공할 만한 힘을 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책과 사람을, 사람과 사람을, 사람과 사회를 잇는 서점이란 공간은 소중한 것 같습니다. 서점뿐 아니라 자취방에서, 공장에서, 재수학원 등지에서 함께 읽기를 수행했던 1980년대의 독자들을 떠올리며 어떤 책을 누구와 어떻게 함께 읽어내야 할지 고민해봅니다.

 

참고문헌

 

류동민, <기억의 몽타주>, 한겨레출판

양평·이두영·이중한·양문길, <우리 출판 100>, 현암사

정종현·천정환, <대한민국 독서사>

조상호, <한국언론과 출판저널리즘>, 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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