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교 출신은 아니지만' 이런 조건절이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지만 학교와 관련된 정체성을 어떤 식으로든 갖게 된다. 어쩌다 보니 거주지 근접과 조교 근무의 조건 하에서 자연과학캠퍼스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모여서 수학문제를 같이 풀거나 창업 혹은 프로젝트에 관한 회의를 하는 풍경을 종종 접할 수 있었고, 아무래도 대기업 취업과 비트코인, 주식을 주제로 한 이야기가 자주 들리는 환경이지만 '인문적'인 것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학기 초에 게시판에 게시된 '인문적' 동아리의 모집글을 볼 수 있고(최근에 눈에 띠었던 게시글은 '채식 모임'), 학내 혹은 사회적 의제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담은 대자보도 본 기억이 있다.
내게 캠퍼스의 장소성과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흔적/기억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학생식당 쪽에 조성된 열사의 추모공간을 꼽을 것이다(열심히 구글 포토를 뒤져봤더니 황예인 열사의 것은 찾았는데 김귀정 열사의 것은 찾지 못했다 ㅠ 어쩌면 자연과학캠퍼스에서 황예인 열사를, 인문사회캠퍼스에서 김귀정 열사를 각각 도맡아서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생활도서관, 열사, 동아리, 기억하고 애도하고 추모하는 사람들 - 학부 시절에 이 성좌들에서 상상적으로 우정의 이상향을 찾았던 것 같다. 때로 감당하기 힘들었던 깊은 외로움이 그런 공동체와의 결합을 통해서 해소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어찌 보면 외국을 동경하듯 마음을 품고 있다가 대학원 재학 시절 한 번 생활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독서모임에 문을 두드려볼까 망설이다 결국 포기했다. 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불안함에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뭐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던 시절이라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라 생각되긴 하지만 ... 나름대로 중심을 잡고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과거에 지나쳤던 곳에 다시 서게 되니 기분이 묘해진다.
2
최근 한 트윗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인생의 방향성 없이 바쁘게 사는 사람은 실은 게으르는 거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딱 그랬던 것 같다. 하나 진득하니 붙잡고 파고들지 못했다. 지적 호기심이나 문제의식을 포착하는 순간들이 종종 있었지만 구체화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뭘 써야할지 몰라 계속 텍스트를 추가해 읽어냈지만 막상 그 텍스트들에서 논점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는 데 그쳤다.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내가 쓰고 싶은 것'에 대한 의지와 욕망이 모호하거나 미약했던 것 같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하도 어려운 이론 중심의 비평이나 글을 많이 접하다 보니 그렇게 이론적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두려움이 생긴 거였는지도 모르겠다(그렇다고 한 이론을 진득하게 학습한 건 또 아니고..;;). 이는 어떤 주제에 대한 본격적이고 진지한 글을 써봐야겠다는 의지와 욕망이 드는 순간들을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이유로 유예시키고 회피해온 습관의 결과였다. 글에 대한 눈높이는 계속 높아져만 가는데 글을 많이 안 쓰다 보니 간극이 계속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쓰고, 자기혐오의 시간을 견디고, 고쳐 쓰면서 조금씩 더 나아지는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말곤 글이 나아지는 방법이 없었을 텐데 다른 자료를, 이론을 찾아 읽으면 번쩍이는 구상과 영감이 찾아와 글을 드라마틱하게 개선시켜 줄 거라는 미신적 믿음이 있었다.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차근차근 하나씩 고쳐나갈 힘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요즘엔 그래서 종종 자문하곤 한다. 이 논문, 책을 내가 왜 읽고 있지. 읽으려고 했지. 결국 이 독서를 통해 나는 어떤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인지 묻는다. 그래서 할 말이 생기면 최대한 기록해두기로 했다 이곳에. 그렇게 쪽글이나마 조각보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잘 연결해 모자이크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적어도 뭔가 '대단한' 걸 써야지 하는 욕심에 짓눌려 아무 것도 쓰지 못하는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긴 호흡의 길, 논문식 글쓰기는 테크니컬한 측면의 훈련도 필요하긴 할 테지만).
1970년의 전태일도 그렇고, 1980년대의 대학생들도 그렇고 결국 내 관심의 공통분모를 보면 좋은 앎- 좋은 삶을 갈구하며 고민하고 투쟁했던 청년과 그 혹은 그들이 몸 담고 있는 역사에 대한 물음이 아닐까 싶었다.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그/들로 만들었는지, 그/들은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 그리고 그 역사와 현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고 싶었다. 30년 이상의 시간적 거리가 확보되었기 때문에 좀 더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실들을 꼼꼼히 관찰하되 내가 그 시대의 동시대인으로서, 또 그/들을 내 시대의 동시대인으로서 대화하게 만들고 거기서 얻은 어떤 앎을 글로 풀어내보고 싶다. 글쓰기와 독서, 문학 텍스트 를 포괄하는 문학의 프리즘을 통해.
3
<귀정, 추모에서 일상의 기억으로> 본문 중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아버지에게 한국의 민주화과정에 대한 얘기를 들은 중학생 아이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럼 1987년 6월 이후에 독재 세력이 물러나고 민주주의가 실현된 거냐고. 사실 우리는 여기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보려면 1991년, 관점에 따라 1996년까지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1991년 4월부터 6월까지 많은 청춘들이 안타깝고 목숨을 잃고, 많은 이들에게 트라우마적 상흔을 남긴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이해해야 할지, 사회변혁/공동체주의-집단주의/이념으로 표상되는 1980년대적인 것이 가고, 소비/개인주의/욕망으로 표상되는 1990년대적인 것이 오는 중첩과 교착의 이행기적 시간을 겹눈으로 어떻게 볼지에 대한 고민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 '(5)86'세대의 도덕적 몰락이라 할 만한 상징적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고, 이들의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의식을 해부하고 해체하려면 결국 1980년대의 역사를 재해석하고 재평가해야 한다는 요청과 시도들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87년 6월항쟁의 승리의 서사 와 86세대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신화가 지속되는 한, 이미 기득권이 돼버린 86세대의 헤게모니를 보위하는 방식으로 민주화가 소비되고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목소리는 묵살되고 묻힐 위험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86세대'의 자성과 갱신을 위해서라도 비판작업이 계속될 필요가 있겠다.
한편으로 나는 당시 대학에 다녔던 이들- 그중에서도 명문대 남성들-이 역사를 과대대표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1980년대적 가치'를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 시켜보고 싶다. 독재정권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고 희생했던 전사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민중과 여성, 어린이 같은 사회적 소수자를 가시화하고자 했던 시선(<올림픽 이펙트>에서 이렇게 주변화되고 타자화된 존재를 가시화시키는 문화정치적 실천이 '포스트모던'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해석한 바 있다), 이론과 실천을 적극적으로 합치시키는 다양한 운동의 방식으로 평등과 존엄성 같은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노력, 특권층으로서 죄책감을 느끼고 '민중 속으로' 투신했던 하방下放의 한계가 있었지만 계층화된 질서 너머 연대를 광범위하게 시도했던 경험이 무엇을 남겼는지 따져묻고 싶다.
실제로 1980년대에 대한 재해석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당시 군사주의적, 남성주의적 시위방식과 조직문화에 가려 '여성적' 성역할을 강요받고, 주변적이고 부차적인 조력자로 위치지어졌던 여성들의 실천을 재조명하는 방식으로 페미니즘적 역사 읽기/쓰기를 수행한다든지,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수렴되지 않는, 그래서 당대에 상대적으로 부각이 덜 되었던 다양한 문화정치적 시도들을 조명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1980년대적인 것'과 '1990년대적인 것'의 대비 및 도식을 재구성하여 냉전의 종식을 기점으로 패배와 단절로 이해되어 왔던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연속적으로 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세계사적 변화의 흐름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이념과 이데올로기라는 허상에 목 매달아 개인의 욕망을 집단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으로 억압했던 1980년대를 부정적으로 대상화하고, 이를 청산하는 방식으로 1990년대를 정립하고자 했던 담론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그 시대를 통과해온 이들의 마음속에 아직까지 너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기억과 상처를 마주보고 함께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NLPDR론과 CA 제헌의회 그룹, 맑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 종속이론, 사회구성체론 등 당대의 지적 담론에 대한 재해석과 재평가가 필요하다. 이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솔직히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 결과적으로 현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틀린' 현실진단과 미래전망 아래 이뤄진 정치적 선전과 사변적 논쟁으로 치부하기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력이 방대하기 때문에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때의 기억을 결과적으로 민주화를 자신들의 손으로 이뤘다는 자부심으로 향유하거나 젊은 날의 치기와 낭만적인 혁명주의를 좇았던 '한때'로 축소시키고 도망치는 것 모두 지양되어야 한다. 1980년에서 1997년 IMF 금융위기까지, 1987년에서 2017년 촛불혁명까지 사회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시대를 통과해왔는지 묻고 싶고 알고 싶다.
4
1980년대 운동권의 군사주의적 남성성, 권위주의적 의사결정 구조, 이념적 경직성, 적대를 기반에 둔 조직화와 저항논리(임명묵의 표현을 빌리면 '안티테제'로만 구성된 논리) 등 실로 운동권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적폐를 집약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당대 운동했던 혹은 그 언저리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다 보면 결국 '사람'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사람이 좋아서 동아리에 가입하고, 그러다 고민 끝에 운동을 하게 되고... 일신의 안위가 아닌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보고자 했던 열망, 사회구조적으로 소외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정의감(선험적으로 주어진 상상적 개념으로서 '기층민중'은 문제가 많았지만...), 일련의 투사적이고 지사적인 면모를 제쳐두고서라도 사람냄새가 물씬 풍겼던 좋은 사람들.
<귀정, 추모에서 일상의 기억에서>에 실린 애도와 추모, 기억의 기록물들을 읽고 나서 좀 더 알게 된 김귀정이란 사람은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다짐했던 성찰적이고 실천적이었던 운동가이자 주변 사람들을 잘 챙겨주는 다정한 사람이었고, 작고 수줍음이 많지만 다정하고 친절하고 강직한 사람, 천성적으로 착한 사람이었다. + 소박한 성격 탓에 남 앞에 잘 나서려 하지 않았던 아이, 말이 없었으나 무심하고 무책임하지 않았던 아이, 가난했으나 사랑 하나는 마음껏 베푼 아이, 작은 분노를 미제와 노태우에게 커다란 분노를 돌리려 했던 아이, 어떤 일로 투쟁에 동참하지 못했을 때 겸허하고 솔직하게 반성하는 아이, 밤을 새며 ‘통일 방안’을 토론하는 전투적인 아이(p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