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평점 :
12월은 책장을 넘기기 어려운 시절이네요. 서평도 깜박할 정도로 안팎의 마음과 생각 공간이 꽉 차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 달의 발제책이 내가 선호하는 문학 장르에다 소설집이라 틈틈이 책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김기태라는 작가는 올해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수록작 “보편 교양“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다소 현학적인 소재를 주인공처럼 덤덤히 묘사하고 있는 게 동시대의 니즈를 관통하는 영리한 작가구나 싶었죠. 우연히 본 작가의 사진이 장강명 작가와 묘하게 닮아 있었는데, 기자 출신의 장강명 작가와 언론학부를 졸업한 김기태 작가 또 평행이론을 떠올리게 합니다.
총 9편의 수록작들 하나 하나가 독특했습니다.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고요. 물론 개인 취향으로 보면 서사가 풍부한 호흡의 작품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내겐 몰입감이 아주 크진 못했습니다.
표제작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부터 읽었는데, 결과적으로 이 단편이 가장 마음에 들더군요. 썸을 타는 듯한 동창생의 우연한 만남, ‘보편 교양’도 사치인 젊은이, 38백만 원도 넘사벽인 이민자, 상위 몇 퍼센트가 아닌 밑에서 부터 세는 게 자연스런 사람들, 미래의 희망보단 오늘의 삶이 퍽퍽한 일상. 누구나 중산층, 보통사람을 꿈꾸고 또 그렇다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게 상식인 사회속에서 덤덤히 삶을 끌어 안고 사는 젊은 군상들을 보면서 스스로의 짧지 않은 삶을 돌아보게 하더군요. 그리고 동시대 풍경을 엿보게 하는 다양한 소재들의 소환은 맛깔스런 양념 같았습니다. 라면봉지속 건조분말 스프처럼
“볼빨간사춘기가 1인 그룹이 되는 사이 맥도날드와 김밥천국으로부터 홍콩반점과 할매순댓국으로 혼자 갈 수 있는 음식점이 늘어났다.”(97쪽,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알라딘 eBook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중에서
“수백억을 두고 목숨을 건 게임을 한다는 줄거리의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흥행했다. 어느새부터 힙합은 안 멋졌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으며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니콜라이에게는 투표권이 없었다. 진주에게는 투표권이 있었지만 어떤 쓸모가 있는지는 알기 어려웠다.”(103쪽, 같은 작품)
이야기가 전개되다 맥없이 툭 끊기는 것도 요즘 추세인가 싶기도 하지만 ‘열린 결말’도 어쩌면 작가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처럼 어깨에 힘 빼고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다루는 내용들이 결코 가볍지는 않았지만요.
“예쁘고 멋있고 촉감 좋은 물건들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자아실현 같은 건 모르겠지만 견딜 만한 일을 하고, 지글지글 보글보글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삶. 가끔은 나란히 누워서 햇볕을 쬘 사람이 있는 삶. 이 정도면 괜찮다고 여기면서도 어두운 골목을 걸어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불안해졌다. 어느 날 흰 봉투가 날아와 계약 종료 통지서나 처음 들어보는 병명의 진단서를 덜컥 내놓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108쪽, 같은 작품)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에서 유래한 밈을 문자로 나누던 두 주인공, 진주와 니콜라이를 떠올리며 글을 마무리하렵니다. 다시 ’세모바‘ 같은 삶 속으로~ ‘로나, 우리의 별’을 위해 ‘전조등’ 대신 응원봉을 밝히며~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스가 체르노비츠의 예심판사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추궁받았다. 왜 혁명을 선동하는 삐라를 뿌렸냐고. 그 이유를 대라고. 그녀는 일어서더니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판사가 제지하자 그녀는 더욱 매섭게 외쳤다.기립하시오! 기립하시오 당신도! 이것이 인터내셔널이오!’”(110쪽, 같은 작품)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116쪽, 같은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