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포악한 손에 상하여 오래전 땅에 묻힌 이의
호화로운 기념비가 낡아가는 것을 볼 때
때로는 고고히 솟았던 탑이 허물어지고
영원할 줄 알았던 황동이 인간의 분노에 매인 노예가 될 때
굶주린 바다가 바닷가 왕국을 집어삼키고
단단한 토양이 바닷물을 메워버리고
얻은 자는 잃고, 잃은 자는 얻는 것을 볼 때
이렇게 존재라는 것이 서로 바뀌는 것을
아니면 존재라는 것 자체가 썩어갈 운명인 것을 볼 때
폐허에서 나는 깨달음을 얻네.
시간이 찾아와 나의 사랑을 앗아가리라는 것을.
- 윌리엄 셰익스피어, 「소네트 64」 - <패시지1>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9411 - P5

울가스트는 죄수들이 감형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애도의 다섯 가지 단계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볼 때마다 새삼 놀라곤 했다. 지금 카터는 ‘부정’ 단계에 와 있었다. 너무 큰일이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 <패시지1>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9411 - P119

지금 레이시는 침대 위에 앉은 채 온 힘을 다해 연을 높이 날려 보내는 중이었다. 손 안의 실꾸리가 점점 작게 줄어들고 연은 저 먼 하늘 위 작은 점 하나가 되어버렸지만,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이렇게 작은 존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힘으로 불어오는 바람뿐이었다. - <패시지1>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9411 - P148

실험 대상 ‘제로’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다.
그는 엿새째 구석에서 나오지 않았고 식사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벌레처럼 구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레이는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덩어리 같은 제로의 모습을 적외선카메라로 볼 수 있었다. 때때로 왼쪽, 오른쪽으로 몇 발짝씩 움직이며 자세를 바꾸는 게 전부였는데 제로가 자세를 바꾸는 모습을 그레이가 실제로 본 것도 아니었다. 그레이가 잠시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리거나 격납실을 떠나 휴게실로 가서 커피를 한잔 마시거나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돌아온 뒤 다시 바라보면 제로는 또 다른 곳에 매달려 있었다. - <패시지1>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9411 - P165

어둠이 그의 목을 타고 쏟아져 들어와 폐를 채우며 한껏 편안하게 그를 익사시켰다. 그는 모든 곳에 있는 동시에 어디에도 없었고, 지형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형을 ‘통해’ 안팎으로 움직이며 어두운 도시를 호흡했으며, 도시 또한 그레이를 호흡했다. - <패시지1>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9411 - P47

지금까지 그레이가 생각한 시간이라는 것과는 딴판이었다. 시간은 선이 아니라 원이었다. 그것도 착착 쌓인 원들로 만들어진 원이라 모든 순간이 다음 순간 옆에 있었고 모두 동시에 존재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다시는 잊을 수 없다. 지금처럼,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이 마치 이미 일어난 일들로 보이는 지금처럼. - <패시지1>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9411 - P466

죽는다는 것, 생명이 이 몸을 떠나는 걸 느낀다니 참 이상하기도 하지. 하지만 그의 일부는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죽음을 위해서야, 하고 그의 몸이 말했다. - <패시지1>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9411 - P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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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원서, 읽(힌)다
강주헌 지음 / 길벗이지톡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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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규범문법(Prescriptive grammar)과 구조주의적 기술문법(Descriptive grammar)에 대한 합리적 대안적 접근으로서 설명문법(Explanatory grammar)은 자못 설득력이 있다. 번역가 강주헌선생님만의 독특한 접근방식은 고리타분 하기 쉬운 문법을 다시 흥미로운 대상으로 부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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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호하게 대답했지. ‘특’ 자 붙은 거 좋아하는 사람, 공짜 좋아하는 사람, 횡재 만나고 싶은 사람, 머리 굴려서 행운을 잡으려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홍천터미널에서 헤매는 이등병밖에 못 돼. - <어른 공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462 - P9

그러니 사람은 오죽하겠어. 죽음 앞에서 떨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래서 카뮈(Albert Carmus)는 죽음을 놓고는 그 어떤 사건도 의미를 잃어버린다고 했지.

그러나 죽음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죽었다고 생각하고 한번 살아봐. 그러면 용서 못 할 일도 없고, 싸울 일도 없고, 속상해할 일도 없어. 하루가 덤으로 오는 보너스 같아. 그래서 매일 고맙지. 물건 살 때 하나 더 주면 기분 좋아지는 것처럼. - <어른 공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462 - P22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두면 어떻게 살아야겠다가 환히 보여. 죽는 얘기라고 무작정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니야.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세계로 가는 길이 불안하지 않아. 그냥 마포에서 일산으로 이사 가는 것처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 - <어른 공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462 - P23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 열심히 산 사람은 죽음에 의연할 뿐 아니라 이별도 잘해. 자꾸 뒤돌아보는 것은 거기에 다하지 못한 미련이 있어서야.

하루하루가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여기며 목숨을 걸고 살아온 사람은 이별도 쉽게 할 수 있지. 이별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은 모든 것이 다 불량품이야. - <어른 공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462 - P25

날마다 오늘이 집행날은 아닐까 가슴 졸이다 떠나는 것이 사형수의 운명이지. 감옥 밖에 사는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나고. 사형수와 우리에게는 다만 그 차이가 있을 뿐이야.

결국 우리는 모두 사형수야. 오늘 이렇게 살아 있으니 오늘이 있을 뿐이요, 내일은 와봐야 오는 것이지. - <어른 공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462 - P30

풀어서 풀릴 수 있는 것은 괴로움이 아니요, 참고 기다려서 해결되는 것이면 고통이 아니더라. 세상 살아가면서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말자." - <어른 공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462 - P32

불교 경전인 《보왕삼매경》을 보면 이런 말이 나와.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 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옛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 <어른 공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462 - P33

"탁발은 나 자신을 ‘조복’하기 위한 공부입니다. 남 앞에 내가 낮아지는 자세를 배워야 내가 바로 설 수 있거든요. 스님이 되면 우선 탁발을 잘해야 한답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을 텐데,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상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어른 공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462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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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밤에 이뤄진 연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모임은 가족 식사 자리나 우리가 혐오했던 예식과는 거리가 먼, 세상의 다양성에 자신을 여는 흥분감을 느끼게 해줬다. 다시 청소년이 되는 기분이었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62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잠이 우리를 덮쳤고, 저녁 내내 자신에게 선물했던, 생활양식의 가치를 담은 연극 안에서 기분 좋은 편안함을 느꼈다 ― 메를랑 해변의 야영장에 몰아넣은 «천박한 부르주아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63

우리는 티브이를 바꾸었다. 컬러화면 속에서 세상은 더 아름다웠으며, 티브이 속 세상은 더욱 선망의 대상이 됐다. 거의 비극일 정도로 심각하게 부정적이었던 일상의 세계와 함께 흑백이 만들었던 거리감은 사라졌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63

학생들과 광고의 위험에 대해 심각하게 검토했던, 쉽게 속지 않던 우리는 «물건을 소유하는 것에 행복이 있을까?»라는 작문 주제를 내주었으며, 지성을 위해 현대성을 이용한다는 마음으로 프낙에서 전축과 그룬딕 라디오카세트를, 벨엔호웰 슈퍼 8 카메라를 샀다. 우리를 위해, 우리에 의해, 소비는 정화됐다.

5월의 이념들은 물건과 오락으로 전환되었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64

어떻게 68년 5월은 ― 그녀는 이 혁명이 실패했고, 이미 너무 정착해 버렸다고 느낀다 ―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다른 삶을 살면 나는 행복할까?»라는 질문의 근원이 됐을까.

그녀는 부부와 가족 외의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69

그녀에게 학창시절은 그리운 욕망의 대상일 뿐이다. 그녀는 그 시절을 지적 부르주아 계급화가 이루어지는 시간, 자신의 태생으로부터 단절되는 시간으로 여긴다. 로맨틱한 추억들은 비판의 대상이 됐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69

견딜 수 없는 기억 중에 아버지의 임종 장면이 있다. 그녀의 결혼식 때 딱 한 번 입었던 슈트를 수의로 입힌 아버지의 시체는, 방에서 1층까지 관이 통과하기에 너무 좁은 계단을 비닐에 싸여 내려갔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71

우리는 일반적인 윤리의 언어를 버렸다. «욕구불만»과 «만족감»처럼 쾌락의 척도가 되는, 행동과 자세 그리고 감정을 헤아리는 또 다른 언어를 위해서였다. 세상을 사는 새로운 방식은 «느긋함»이었고, 운동화를 신고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었으며, 자신에 대한 확신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적절히 섞는 것이었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76

더는 프리수 혹은 누벨갤러리에 장을 보러 다니던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열다섯 살에 유행하는 말들과 로큰롤을 알면 변할 것이라 기대했던 것처럼, 전기 와플 기계와 일본식 램프를 사는 것이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처럼, 닥티에서 피에르 앵포까지 구매 욕구가 우리 안에서 팔딱거렸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81

유년기 내내 올바른 행동으로 영혼을 구해야 하고, 철학 시간에 마르크스, 사르트르와 함께 세상을 바꾼 ― 60년에는 그렇게 믿었다 ― 칸트의 정언명령, 너의 행동이 보편적인 원리라고 불릴 수 있도록 처신하라를 실천해야 한다고 들었던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희망도 볼 수 없었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85

우리는 순식간에 75년의 봄과 사이공의 몰락, <인디언 썸머>가 떠오르는 희망의 도약으로부터 너무 멀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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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실존주의와 초현실주의에 빠져들었고 도스토옙스키, 카프카, 플로베르의 모든 책을 읽었으며, 최근에 나온 책들만이 이 세상과 현재를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해줄 것처럼 신간과 르 클레지오, 누보로망에 미친 듯이 빠져들었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19

그녀는 내면의 목표를 빗겨나가 그저 어머니로서만 전진하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조용하고 편안한 이 삶에 정착하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이 삶을 살아 버리는 것이 두렵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순간에도, 그녀는 일기장에 절대 적혀 있지 않은 모든 것들, 함께 하는 삶, 같은 공간을 나누는 친밀함, 그녀가 수업이 끝나면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는 집, 둘이서 자는 잠, 아침의 전기면도기 소리, 저녁의 『돼지 삼 형제』 이야기, 이러한 것들이 반복되는 일상, 잠시 떨어지면 삼 일을 넘기지 못하고 그리워지는, 그녀가 증오하고 아낀다고 믿는 것들을 ― 사고로 잃는다는 상상만 해도 그녀의 가슴을 옥죄는 모든 것들 ―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38

이제 욕망의 대상은 미래가 아닌 과거다 : 63년 여름, 로마의 그 방으로 돌아가는 것. 그녀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극한의 자아도취적인 시선으로, 내 과거를 선명하게 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내가 아닌 존재가 되고 싶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부류의 여성의 모습, 어쩌면 나는 그것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39

사회는 명명할 수 없는 것들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고독한 불편함을 안겨 준다. 어느 날 갑자기 혹은 조금씩 깨진 침묵과 무언가에 대해 터져 나온 말들은 결국 인정받게 되지만, 반면 그 아래로 또 다른 침묵이 형성된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40

태도의 자유로움과 몸의 에너지가 화면을 뚫고 나왔다. 그것을 혁명이라고 한다면, 그렇다, 혁명은 그곳에 있었다. 선명하게, 육체의 팽창과 안이 속에, 혁명은 아무 곳에나 앉아 있었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45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일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 우리는 모든 것을 시도해도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1968년은 세상의 첫해였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52

어제의 수치심은 더는 통용되지 않았다. 죄책감은 조롱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멍청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밝혀진 성적 빈곤, 성적 쾌락을 잘 못 느낌 같은 말들은 제일 심한 모욕이었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53

쾌락에 관한 말들이 퍼져나갔다.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쓰면서, 목욕하면서, 배변하면서 성적 쾌감을 느껴야 했다. 그것은 궁극의 인간 활동이었다. - <세월>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0318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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