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여름이었다. 출장길에 기타노 다케시 전시회를 구경했다. <교수대에서 살아남는 몇 가지 시나리오>라든가 <세계 최저 효율의 재봉틀> 등 어처구니없는 혼합 미디어 작품 사이에 <공룡이 멸종한 이유에 대한 몇 가지 이론>이라는 설치물이 있었다. "가위바위보 할 때 항상 가위밖에 못 내서 멸종했다"는 농담까지는 즐거웠는데 ‘짧은 팔로 인한 개체 위생 악화설’에는 순간 심각해졌다. 10년 넘도록 잡지 일에 종사해도 개선되지 않는 글의 속도와 질에 괴로웠던 당시 나에게, 몸집에 비해 턱없이 가늘고 짧은 공룡의 팔은 마치 자판 앞에 매주 무력한 내 손가락처럼 보였다. 전문기자겠거니 믿어주는 독자들의 짐작과 달리 나는 짤막한 팔로 버둥거리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8
내게 해석은 묘사의 길을 걷다 보면 종종 예기치 못하게 마주치는 전망 좋은 언덕과 같았다. 묘사하는 마음이란, 그런 요행에 대한 기대와 ‘아님 말고. 이걸로도 족해’ 하는 태평스러운 태도를 포함한다. 묘사는 미수에 그칠 수밖에 없지만, 제법 낙천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10
기껏해야 영화의 그림자나 밟는 남루한 글을 영화 관람의 에필로그로 삼아준 너그러운 독자들이 이 산문집의 결정적 배후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10
우리는 기상천외한 사건이 아니라, 양질의 시간을 찾아서 영화관에 간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봉인된 시간』에 쓴 대로다. "인간은 보통 잃어버린 시간, 놓쳐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12
"그녀의 눈동자는 어떤 색인가? 갈색인가, 푸른색인가, 아니면 검은색인가? 그 모든 색을 조금씩 다 가지고 있고 그 빛깔이 수시로 변한다는 점이 엠마를 인식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여인, ‘완전히 똑같은 여자 혹은 완전히 다른’ 여자도 아니면서 모든 여자들 안에 용해되어버리는 여자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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