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딘가로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해도 이들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아무도 나의 사라짐을 눈치채지 못한 채 사진관에 내걸린 저 여자는 눈부시게 웃고 있을 것이고 저 전신주는 조금씩 살 껍질이 벗겨져 가면서 그래도 참고 서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라진 자는 바로 잊혀질 것이다. 잊히는지도 모르게 추억이 되어 버릴 것이다. 다른–같은 시간이 오고, 그 시간은 다시 다른–같은 시간이 될 것이다. 끝없이 흘러간다는 것은 끝없이 멈춰 있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70

꽃을 끌고


꽃잎이 시들어 떨어지고서야 꽃을 보았습니다
꽃잎이 시들어 떨어지고서야 꽃을 창가로 끌고 왔습니다
꽃잎이 시들어 떨어지고서야 꽃을 마음 끝에 매달았습니다

꽃잎 한 장 창가에 여직 남아 있는 것은 내가 저 꽃을 마음따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이 창가에 여직 남아 있는 것은 당신이 나를 마음따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흰 구름이 여직 창틀에 남아 흩날리는 것은 우리 서로 마음의 심연에 심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람 몹시 부는 날에도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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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금치게살덮밥
단조로운 백반 형태의 식사 대신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일품요리를 개발했습니다.
게살과 섬유소가 적은 시금치를 사용하여, 빨간 재료의 게살과 녹색 재료의 시금치가 색의 대비를 이뤄 시각적으로도 먹음직스럽고 고급스럽게 만든 덮밥입니다.

-알라딘 eBook <위암 수술 후 식사 가이드> (연세 세브란스병원 영양팀 외 지음) 중에서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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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스를 연기한 역대 수십 명의 배우 중에 캐릭터보다 더 희한한 이름을 지닌 유일한 배우." 2010년 BBC 시리즈 <셜록>이 방영됐을 때 처음 접한 베네딕트 컴버배치에 관한 묘사는 그랬다. 미확인비행물체처럼 대중의 시야에 진입한 지 몇 년 사이,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마이클 패스벤더와 더불어 대서양 양쪽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국계 남자 배우가 되었다. 규모로는 몰라도 열성으로 치면 둘째가기 서러운 팬덤도 거느리고 있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21

정확히 말해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미남이 아니라, 옆에 있는 미남을 지루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이상한 얼굴을 가졌다. 헤어 스타일리스트를 애먹일 게 분명한 두상에 피부는 백랍이고 초록 눈은 동공이 작아 늘 눈부셔하는 듯 보인다. 때때로 라인을 그렸나 착각이 드는 입술은 남자치고 드문 큐피드 활 모양인데 본인에 따르면 어려서 트럼펫을 배운 결과라고 한다. 조명과 머리카락 색깔의 변화에 따라 그는 극히 무던해 보이는가 하면, 숭고한 조각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27

그런데 이 원만한 노력파 배우가 카메라 앞에 서면 섬광을 낸다. 컴버배치의 연기는 정확하되, 힘을 가하지 않아도 칼날 자체의 무게로 살을 절개하는 메스처럼 수월해 보인다. 뭐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남자가 있을까? 사실 이 갭이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저력이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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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기의 속성을 설명할 때 흔히 등장하는 쿨레쇼프 실험은,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에 내용 다른 숏들을 연결시켜 각각 슬픔, 기쁨, 갈망을 읽게 하는데 위페르의 연기는 이를테면 후속 컷을 생략한 쿨레쇼프 실험이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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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여름이었다. 출장길에 기타노 다케시 전시회를 구경했다. <교수대에서 살아남는 몇 가지 시나리오>라든가 <세계 최저 효율의 재봉틀> 등 어처구니없는 혼합 미디어 작품 사이에 <공룡이 멸종한 이유에 대한 몇 가지 이론>이라는 설치물이 있었다. "가위바위보 할 때 항상 가위밖에 못 내서 멸종했다"는 농담까지는 즐거웠는데 ‘짧은 팔로 인한 개체 위생 악화설’에는 순간 심각해졌다. 10년 넘도록 잡지 일에 종사해도 개선되지 않는 글의 속도와 질에 괴로웠던 당시 나에게, 몸집에 비해 턱없이 가늘고 짧은 공룡의 팔은 마치 자판 앞에 매주 무력한 내 손가락처럼 보였다. 전문기자겠거니 믿어주는 독자들의 짐작과 달리 나는 짤막한 팔로 버둥거리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8

내게 해석은 묘사의 길을 걷다 보면 종종 예기치 못하게 마주치는 전망 좋은 언덕과 같았다. 묘사하는 마음이란, 그런 요행에 대한 기대와 ‘아님 말고. 이걸로도 족해’ 하는 태평스러운 태도를 포함한다. 묘사는 미수에 그칠 수밖에 없지만, 제법 낙천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10

기껏해야 영화의 그림자나 밟는 남루한 글을 영화 관람의 에필로그로 삼아준 너그러운 독자들이 이 산문집의 결정적 배후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10

우리는 기상천외한 사건이 아니라,
양질의 시간을 찾아서 영화관에 간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봉인된 시간』에 쓴 대로다.
"인간은 보통 잃어버린 시간, 놓쳐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12

"그녀의 눈동자는 어떤 색인가? 갈색인가, 푸른색인가, 아니면 검은색인가? 그 모든 색을 조금씩 다 가지고 있고 그 빛깔이 수시로 변한다는 점이 엠마를 인식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여인, ‘완전히 똑같은 여자 혹은 완전히 다른’ 여자도 아니면서 모든 여자들 안에 용해되어버리는 여자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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