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
우치다 다쓰루 지음, 김경원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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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이 살아 남는지 궁금하다.

우선은 감동을 주거나 자신의 감성이나 머릿속에 한 구절이라도 남는 글이 살아 남는 것 같다.

아니면 공감이 많이 가고 재미있거나 자신의 공부나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많이 되는 글이 살아 남을 것 같다.

글쓰기가 치유와 위로를 주면 또 오래 살아 남을 것 같다.

나도 성경을 쓰고 꿈다이어리,공부다이어리, 건강다이어리, 기도다이어리, 버킷리스트다이어리, 서평이벤트다이어리를 쓰면서 치유가  된다.

다양한 다이어리들을 쓰면서 내 인생이 가치있고 의미있어지고 존재의 무게감이 생긴다.

저자가 비판적인 글을 쓴다는 것은 논리적이고 자신만의 가치가 정립이 되어 있다는 얘기같다.

계층적 사회와 언어를 보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하고 프랑스철학자들이 글을 어렵게 쓰는 이유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닐까라고 짐작을 해본다.

 창조성이 불균형에서 나온다는 얘기도 뭔지 궁금하다.

글쓰기를 하고 싶은 이유는 앞으로 로스쿨을 가든지 직장을 가든지 자기소개서나 학업계획서 전부 글쓰기였다.

논술까지도말이다.

그리고 요즈은 SNS에도 전부 글쓰기로 자기 의견을 얘기하고 짧은 문자메세지도 전부 글쓰기이다.

평생 글쓰기를 하고 사는데 그렇게 많이 쓰는 글쓰기가 나중에는 공허하고 전부 날아가버리는 죽은 글쓰기만 한다는게 아쉽다.

살아남는 글쓰기가 뭔지 알고 싶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서 이 책을 만났다.

저자가 일본의 대표사상가라서 그런지 책이 가볍지 않고 무게감이 있다.

계층적인 사회와 언어에 대한 얘기가 궁금했었는데 소쉬르와 롤랑 바르트에 대해서 나온다.

그들은 언어학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들이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를 보면 사회적 활동 안에 있는 기호이 양상을 연구하는 과학을 구상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심리학의 일부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심리학의 일부를 이룬다.

우리는 그것을 기호학이라고 부른다.

기호학은 기호한 무엇인가, 어떠한 법칙이 기호를 통제하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기호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지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호학은 존재할 권리가 있고 그 지위는 미리 결정되어 있다.

소쉬르가 천재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존재하지 않은 학문을 연구한다는게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소수르의 천재성으로도 기호의 본질에 대한 학문적 체계화는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래도 반드시 체계화해야 한다.

랑그는 언어이다.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등 인간은 어떤 언어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태어난다.

부모나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언어가 모어이다.

국어라고 해도 좋겠지만 국민구가라는 정치 개념은 베스트팔렌 조약이전에는 없었고 국민국가를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주위와 다른 언어공동체를 형성하는 집단의 언어도 있기 때문에 랑그라고 부른다.

우리는 랑그를 선택할 수 없다.

태어날 때 부모가 이야기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가 없다.

인간은 모어 속에 던져지는 방식으로 태어난다.

랑그에 관여할 수 없다.

태어나면서 쉼 없이 물로 적시듯 랑그를 듣고 자라기 때문에 어느새 언어로 사고하고 그 언어로 숫자를 세고 그 언어로 말장난을 하고 그 언어로 네올로지즘을 창조한다.

문법적으로 파격적이고 처음 보는 표현을 만나도 금방 뜻을 알 수 있고 또 파격적인 표현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도 있다.

'장난 아니다'라든지 '정반대'라든지 들으면 곧장 뜻을 안다.

몇 사람이 사용하다 보면 그런 일본어는 없어라고 고칠 마음도 없어지고 내버려두는 사이에 사전에 올라가기도 한다.

외국어는 그렇지 않다.

자기가 영어로 문법적인 잘못을 저지르면 곧장 정정을 받는다.

잘못 말하면 정정을 받지 퍼져 나가지 못한다.

랑그란 그 안에 있는 이상 화자에게 폭넓은 자유를 준다.

그러나 그것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롤랑 바르트가 랑가주라는 말로 그려내는 언어 현상과 우리가 어법이라는 일본어를 통해 막연하게 떠올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사용하는 어법의 진리 안에 즉, 그 지역성 안에 얽매여 있다.

내 어법과 이웃의 어법 사이에는 격렬한 경합 관계가 있고 거기에 우리는 끌려들어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어법은 패권을 다투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번 어떤 어법이 패권을 쥐면 그것은 사회생활 전반에 퍼져 무징후적인 편견이 된다.

정치가나 관료가 말하는 비정치적인 말,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에서 이야기하는 말, 일상적으로 떠드는 말, 그것이 패권을 쥔 어법인 것이다.

텍스트의 즐거움이라는 롤랑 바르트의 에세이에서 인용한 글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사용하는 어법의 진리 안에 즉, 그 지역성 안에 얽매여 있다는 문장이 있는데 이것은 저자가 말하는 셀러리맨의 에크리튀르나 아주머니의 에크리튀르 같은 지역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경우 그런 어법은 딱히 패권을 다투지 않는다.

간사이사투리를 쓰는 사람도 간사이에 있을 때나 가족이나 친구와 간사이 말을 하지, 취직하러 도쿄에 가면 표준어로 바꾸어 말한다.

딱히 표준어라는 패권 언어에 대해 굴복하는 자세를 내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간사이로 돌아오면 다시 지역의 언어로 돌아온다.

일본의 경우는 어법을 간단하게 바꿀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한 언어 능력과 글쓰기를 보면 상하이가 독해력, 과학적 리터러시, 수학적 리터러시 세 부분 전부 다 1위를 차지했다.

그 다음으로는 한국, 대만, 그리고 일본도 꽤 좋은 성적을 얻었다.

5,6위 정도에 올랐다.

5위이면 5위이고 6위이면 6위이지 5,6위정도라고 얘기하는 건 6위가 아닌가 한다.

PISA의 문제는 일반적인 시험 문제와 다르다.

정답이 없는 문제가 있다.

이 문장은 좋은가 싫은가, 좋다면 좋은 근거를 쓰고 싫다면 싫은 근거를 쓰라고 한다.

자신의 판단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를 댈 수 있다면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자신의 판단에 대해 설득력 있는 논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점수가 낮다.

미리 암기해둔 정답을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출제 의도를 읽어 내려 한다.

이 물음이 어떤 능력을 측정하려는 것인지를 꿰뚫어 보는 쪽이 승산이 있다.

당신은 그렇게 물음으로써 무엇을 알고 싶은 것입니까,,,,

출제자 앞에 서있는 대면 상황을 외부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이런 물음을 감당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정경을 조감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면 폭 넓은 시야가 요구된다.

나는 도대체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지와 같은 반성하는 힘,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조금 멀리서 자신이 참가하고 있는 게임의 구성 요소나 규칙을 고찰하는 능력, 이것은 범용성이 높은 지력이라고 쓸모 있는 지혜이다.

핀란드의 학교 교육이 훌륭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제도 문제뿐만이 아니다.

훌륭한 교육을 창출한 핀란드는 정세와 관련이 있다.

핀란드 인구는 530만 명이다.

일본의 효고현보다 적다.

건국 이래 끓임없이 이웃나라의 침략에 시달렸다.

그건 우리나라가 중국이나 일본에 시달린 것과 비슷하다.

북유럽중에서 자원도 없고 숲과 호수가 많은 나라이다.

이 작은 나라가 엄혹한 국제 사회적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본국이 자리 잡고 있는 세계적인 위상을 조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랑 비슷해서 잘 봐야 겠다.

글로벌한 시각으로 볼 때 자기 자신은 어떠하고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명료하게 언어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국민적인 합의를 형성해야 한다.

소국이 주변 대국의 이기심에 휘말린 상태를 헤치고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 상황에서는 무엇이 좋으니 싫으니 논할 처지가 아니다.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선호만 고민해 핀란드라는 일국의 이해관계를 내세운다고 해서 살아남을 기회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보다는 일단은 자기 자신을 괄호에 넣고 바깥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 세계에서 핀란드가 서 있는 위치는 어디쯤인지, 자국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을 채택해야 효과적인지 등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좋다거나 싫다거는 감정을 억제하고 이해득실의 주판알을 튕기기 보다는 국제사회 안에서 소국 핀란드의 존재가을 가장 뚜렷하게 부각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늘 생각해야 한다.

핀란드에는 이런 일에 지적 자원을 우선적으로 배분하는 습관이  있다.

핀란드는 얼마나 위대한 나라인가를 유난스럽게 주장하지도 않았고 외교적으로 세게 나가지 않으면 이웃 나라들이 얕잡아보기 때문에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유아적인 발언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소국이 살아남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또 생각나는 대목이다.

폭 넓은 시야로 스스로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회적 평가를 받는 나라에서는 PISA학습 도달 성적이 좋다.

북미에서는 캐나나, 오세아니아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유럽에서는 룩셈부르크나 핀란드 같은 작은 나라가 상대적으로 성적이 높다.

이런 나라는 자신들이 놓인 역사적 조건이나 지정학적 문맥을 거시적으로 파악하는 훈련을 항상 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도구가 아니다.

일본도 파멸이라고 할 정도로 영어를 잘 못한다.

영어를 가르칠 때 영어공부의 동기를 부여하려면 영어를 잘하면 10억 인과 대화할 수 있다도 한다.

그러나 외국어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할 수 있다는 동기 부여로는 외국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

외국어 학습의 의의는 원래 자신의 종족이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이나 존재하지 않는 감정, 알지 못하는 세계의 관점을 다른 언어 집단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나한테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영어를 못하면 내 마음을 전 할 수 없으니까 영어를 공부해야겠어.'

 이런 사람은 자신의 신체 감각에 상응하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외국어는 애초에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다.

외국어는 자기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다.

자기를 외부로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부를 자기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말, 자기 신체안에 대응할 것이 없는 개념이나 감정을 접하는 것, 그것이 외국어를 배우는 가장 훌륭한 의의라고 생각한다.

물을 뒤집어쓰듯 다른 말의 세례를 받는 동안 어느새 모어의 어휘에는 없고 외국어에만 존재하는 말에 자기 신체가 동화하는 순간이 찾아 온다.

태어난  이후 줄곧 갇혀 있던 종족의 사상이라는 벽에 금이 가면서 과거에는 맛본 적 없는 감촉의 바람이 솔솔 불어 오는 것이다.

외국어의 습득이란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을 경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영어를 잘하면 취업에 유리하다 같은 실리적인 이류와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아무리 어휘가 늘어나고 발음이 좋아져도 자신이 갇힌 우리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언어는 도구가 아니다.

돈을 긁어 모으거나 자신의 지위와 위신을 추어 올리거나 스스로를 문화자본으로 장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이렇게 욕망하는 주체 자체를 해체하는 역동적이고 생성적인 것이다.

생생한 언어를 습득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본성이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타자에 동기화하는 것, 그것을 통해 기존의 자아를 일단 해체하고 좀 더 복잡하고 정교한 자아로 재편성하는 것, 이런 과정이야멀로 생명의 자연에 적합하다.

따라서 일부러 이익을 이끌어내려고 하지  않아도 인간은 자연스레 타자의 언어에 가상적으로 동일화하고 타자에 동기화하려고 한다.

이익의 유도는 도리어 그 자연스러운 과정을 방해한다.

독창성의 신화도 영어를 잘하는 글로벌 인재도 결국은 통화라는 물신으로 인간이 조작하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모든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추고 있는 바깥으로라는 생동감 있는 취향을 망가뜨리고 있다.

현대 일본인의 언어적 빈곤함은 바깥으로 향하는 자기 초월의 긴장감을 잃어버린 결과라고 본다.

외국어공부하는데 순수한 동기로 해야 한다는 얘기가 와닿았다.

살아남는 언어는 자신의 벽을 깨고 나와서 외부까지도 포괄하는 글쓰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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