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곁의 화가들 - 서로의 연관검색어로 남은 미술사의 라이벌 16
박미성 지음 / 책밥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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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들을 가장 좋아한다.

내  마음에 살아 있고 내  곁에 있는 화가는 고흐와 모네이다.

내 마음에 가장 많이 품고 있는 화가는 고흐이다.

그 다음은 모네이다.

처음엔 그림이 왠지 마음에 들어서 좋아하다가 고흐가 나오는 책은 다 읽고 고흐가 나오는 영화나 전시회는 다 갔다.

그러면서 그에 대해서나 인상주의에 대해서 알게 됐다.

그러면서 더 좋아졌다.

알게 돼면 좋아지고 좋아지면 더 알고 싶어 진다.

이 책을 읽으면 내가 좋아하는 고흐와 모네의 삶과 예술세계를 더 알게 돼고 그의 작품을 바라 보는 눈이 깊어진다는게 마음에  든다.

빛을 따라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마네로부터 시작해서 모네로 끝난다.

고흐는 자신의 붓이나 물감을 살 정도로만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해서 마음이 짠했다.

죽은 다음에는 고평가를 받는데 살아 있을 때 피카소나 모네처럼 인정을 받지 못해서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행복은 주관적인 가치니까 자신의 열정을 불살라서 그림을 그렸으니까 행복했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든다.

고흐영화도 이번에 봤는데 그림이나 그의 인생이 더 좋아졌다.

고갱도 좀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들의 사정을 나는 모르는데 이 책을 읽으면 더 자세히 나온다.

아잉~~~좋앙,,,,,

고흐는 그림을 수정하는 걸 수십 번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모네의 그림은 비평가나 전문가처럼 뭔지는 잘 몰라도 감성을 건드리는 그림같다.

모네의 그림을 보면 느껴지는게 아름답고 잔잔하다이다.

모네전시회에 가서 봤는데 모네의 주변환경이나 모네의 집과 정원도 정말 아름다웠다.

자신의 정원에 수련이 많았다.

74세에 백내장이 왔는데 수련 연작 8점과 버드나무를 그렸다고  한다.

눈도 안 좋았는데 그 그림들이 크기도 어마어마했다.

백내장수술을 해서 잘 안보이는 수련이나 버드나무를 그리고 신기하다.

그의 정신이나 예술가적인 역량은 뭐라고 표현을 못하겠다.

모네의 그림을 보면 자연이 반사하는 무수한 빛의 향연을 보면 우주적인 감성이 생기는 것 같다.

모네의 그림을 사진으로만 봐도 깃털들이 수만개 모여서 빛과 어떤 형태를 이루는 것 같은데 그런 걸 전시회에 가서 직접 보니까 설레었다.

감성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모네를 생각하면 신기한 감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는 장수를 해서 그런지 삶의 공감각적인 이해에서 비롯한 통찰력과 초연함, 넉넉함, 은은함이 그림에서 느껴진다.

인상파화가들의 그림은 자연이나 정적인 모습, 사물을 많이 그렸는데 모네는 생자르역이라고 역동적인 기차를 그렸다.

기하하적인 기차, 소음이나 증기에서 나오는 연기을 잘 표현한 것 같다.

그때 시절은 사람을 옮기는 수단이 마차가 다 였을텐데 기차를 보고 충격을 어지간히 받았던 것 같다.

기차의 연기도 몽환적으로 표현해 낸 것 같다.

하늘의 구름이 있다면 기차역에는 기차가 뿜어내는 연기가 다.

그 연기가 디테일한 모습이 아니라 주변을 연기로 삼켜서 모든 풍경을 평면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인상주의파는 대상을 명확하게 그려내는 것보다는 풍경속에서 변화하는 빛을 잡아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과거에는 그의 그림을 보고 그림이 온통 안개 투성이라고 조롱했다고  한다.

그런데 모네는 정말 그림에 안개를 접목해서 그리는게 유일한 관심이자 목표였다고  한다.

고흐의 그림색이 노랗고 빨갛고 강렬한 것은 미래에 대한 것과 자신의 고향에 대한 희망을 품어서 그런 색을 많이 썼다.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면 정말 역동적이고 전 우주를 담으려고 노력한게 와닿는다.

고흐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냥 설득이  된다.

그의 그림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내사랑 고흐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고흐뿐만 아니라 덤으로 고갱도만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서로  라이벌인 화가들을 같이 세트로 모아 두어서 한 사람만 만나려해도 또 다른 사람을 같이 만날 수 있다. 고갱과 고흐는 시각적인 즉흥성을 화면 속에 담아내려 한 인상주의 예술가와는 다르게 단단히 고정될 수 있는 근본적인 것을 찾아 내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색채였다. 예술가의 감정을 담아 내고 고유하고 주관적인 색채를 찾아 내려 한 것이 고갱과 고흐이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와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이다. 두 작가는 여러 측면에서 대중에게 잘못 알려져 있다. 뭐가 잘못 알려졌다는 것일까,,사람들이 기억하는 반 고흐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과 소통을 하지 못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다고 알고 있고 철저하게 예술만을 위해 살았다고 알고 있다. 고갱은 고흐의 귀를 자르게 한 장본이이고 그에게서 예술적 영향을 받은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고갱은 늘 고흐와 함께 다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고갱에게는 너무 억울한 일이다. 고흐의 삶 역시 많은 부분이 잘못 알려졌지만 고갱이야말로 고흐로 인해 큰 손해를 본 작이다. 고흐때문에 유명해진 건 아니고,,,,   고흐는 누구보다도 작품이 많이 팔리기를 원했고 화가로서 성공하고 싶어 했다. 생전에는 성공의 기쁨을 맛보지 못했고 사후 11년 째 되던 1901년에 파리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작품이 잘 팔리는 유명한 화가 되었다. 살았을 때 잘 팔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고흐에게 열광한 사람들이 고흐 신화화 작업으로 어린 시절 평범했던 그의 모습도 사실과 다르게 각색되기 시작했다. 대중은 고흐의 감각적인 색채에도 반했지만 불행한 그의 일생에도 관심을 가졌다. 고흐가 흠모한 자가가 바로 고갱이다. 고갱은 이미 파리 미술계에서 유명한 작가였고 고흐의 3번의 부탁으로 그와 같이 지내며 작업을 하게 된다.  그들의 동거는 2개월정도였고 고흐가 사망하면서 그들의 동거에 대한 얘기는 더 부풀려 졌다. 고갱은 영국의 작가 윌리엄 서머 셋 몸이 쓴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이다.  그 책을 읽었지만 그 주인공이 고갱이라는 건 처음 알았다. 예술을 위해 가족을 버린 비정하고 이기적인 화가 찰스 스트릭랜드가 바로 고갱을 모티프로 탄생한 인물이다. 그 소설로 인해 더 이기적이고 자유로운 예술가로 낙인 찍혔다. 그는 저널리스인 아버지와 페루계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갱은 어린 시절 페루에서 살게 되면서  잉카문명을 접했다. 그는 평생 유랑자의 살면서 이상향을 찾아 헤매는데 그 모습이 근원적이고 순수한 원시 세계였다.  유랑이 체질인 그는 선원이 직업적으로 맞았다. 항해사가 돼서 세계 각지를 떠돌다가  23살에 파리의 증권거래소 베르탱 상회에 취직을 했다. 결혼을 해서 자식도 다섯이나 낳았다. 안정적인 생활을 하다가 35살에 예술가가 되기로 하고 가족을 외면했다. 경제적인 안정을 이룬 인상파의 젊은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했다. 수집가로서 그림에 관심을 갖다가 직접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직장도 그만두고 코펜하겐에 갔다가 아들만 데리고 프랑스에 다시 와서 그림을 그렸지만 생활이 힘들었다.

어떤 작가의 영향으로 퐁타방에 와서 생활하면서 고갱 특유의 예술적 특징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퐁타방에서 지내며 고갱은 시각에 포착된 장면의 즉각적인 인상을 담아내려 한 인상주의와 결별한다.

그는 인상주의가 주목한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시골, 미개지의 순박하고 원시적인 이미지에 사로잡혔고 자신만의 색채로 원시적 모습을 그려 내고자 했다.

고갱은 예술가로서 자신감을 키워 갔지만 여전히 근근이 생활했다.

그런 그에게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작업해 보자고 지속적으로 제안한 작가기 빈센트 반 고흐이다.

파리의 구필 화랑에서 일하는 잘나가는 미술상인 동생 태오 덕분에 고흐는 여러 화가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알게 된 고갱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친분을 쌓은 것이다.

화가공동체를 제안한 고흐는 동생 테오가 돈을 대주고 작품에 대한 일부의 소유권을 태오에게 주기로 한 것이다.

고갱은 그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집세를 못 낼 정도가 되니까 고흐가 있는 아를로 간 것이다.

공동 생활은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으로 끝이 난다.

이들의 공동 생활이 처음부터 나빴던 것은 아니다.

아를의 곳곳을 다니면서 같이 그림도 그리고 원만하게 잘 지냈다.

고갱은 아를에서의  생활이 별로였지만 절실했던 고흐는 점점 고갱에게 집착을 했다.

성격도 달랐고 가톨릭과 개신교인 종교도 달랐고 작업하는 방식도 대조적이었다.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분분하다.

그들이 싸운 이유가 바로 이 그림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초점없이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표현된 자신의 모습을 본 고흐가 매우 분노했다는 것이다.

고흐의 분신이기도 한 해바라기는 시들어 생기가 없고 손에 들린 붓도 너무나 가늘어 그림 한 번도 완성할 수 없어 보인다.

고흐의 독단적인 성격에 질린 고갱이 그림으로 복수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고갱은 그림을 통해서 고흐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다.

고흐의 천재적 재능에 대한 질투심과 그러한 재능과 열정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고흐에게 연민도 느꼈다고 한다.

두 사람이 헤어지기 전 고흐가 그린 그림을 보면 고갱의 의자는 팔걸이가 있고 전체적으로 화려하지만 어두운 색감이며 의자에는 책과 양초가 올려져 있다.

이는 고흐가 바라본 도시인 고갱의 이미지였다.

의자에 놓인 책은 체계적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고갱에 대한 동경을 나타낸 것이다.

고흐의 의자는 소박하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단순한 형태이다.

의자위에 담뱃대 하나가 놓여져 있다.

고흐가 생각한 예술가는 농촌의 생활과 그곳 사람들의 삶 자체를 담아 내는 밀레와 같은 모습이었다.

주인없이 비어 있는 두 의자는 더 이상 함께하기 어려운 당시 그들의 모습을 암시하며 고흐가 스스로 인식한 고갱과 자신의 차이를 보여 준다.

고흐와 동거가 비극적으로 끝난 후 도피하듯 파리로 갔다가 다시 퐁타방으로 돌아가 그의 역작중에 하나인 <황색 그리스도>를 완성한다.

나도 이 그림을 싫어하는 교회오빠가 핸드폰으로 보내줘서 갖고 있었는데 평상시의 붉은 계열의 고갱그림이 아니라 신앙이 느껴지는 그림이어서 보관하고 봤던 적이 있다.

고갱이 타히티로 떠나기 전 그린 것 중 최고의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강렬한 노란색으로 칠한 예수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의 깡마른 몸과 표정이 너무나도 단순하게 표현되어 샛노란 색채가 더욱 강조된다.

사람이 몸이 너무 안 좋으면 황달에 걸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고갱도 그걸 나타낸 건지 궁금하다.

이 작품은 인상주의 화풍에서 벗어난 고갱의 양식적 변화가 잘 드러나는데 작가의 주관이 담긴 강렬한 색채와 그것을 더욱 부각해 주는 평면화된 화면이  나타난다.

그는 원근법과 명암 표현을 의도적으로 생략했고 각 채색면의 둘레를 윤곽선으로 감쌌다.

평면의 채색면과 굵은 윤곽선이 두드러지는 이 기법은 클루라조니즘이라고 하고 인상주의에서 비롯된 형태의 해체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작품의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고 있는 여인들은 브르타뉴 지방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즉 그의 그림 속에는 현실과 환상의 세계가 섞여 있다.

그는 공간과 색채는 의도적으로 단순화했지만 사실적 요소를 작품에 함께 담았다.

이것이 주관과 객관의 조화를 추구한 고갱의 종합주의다.

이런 종합주의는 야수주의와 추상에 이르는 현대 회화에 영향을 주었다.

고갱은 타히티의 수도와 떨어진 곳에 정착을 해서 원주민의 삶에 주목했고 13살의 원주민 소녀  테후라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그녀를 모델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나이는 43살이었기에 대중은 그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당시에는 유럽인들말고는 전부 미개하고 구제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했는데 고갱은 원주만들을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표현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유럽인들에게는 고갱의 그림은 신성모독이었다.

고갱은 그의 작품을 뤽상부르 박물관에 기증하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희망을 품고 온 파리에서 전시회는 실패하고 그림을 전혀 팔지 못해서 다시 타히티로 돌아 간다.

경제적으로 빈곤해지고 문란하게 생활해서 매독에 걸렸다.

그래서 고갱이 싫은 거다.

자신의 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 무력감과 우울증에 빠졌다.

고갱은 자살시도도 했지만 실패하고 매독과 영양실조로 인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둘 때까지 티히티 원주민의 삶을 매개로 이국적 원시주의를 시각화해서 그렸다.

난 화가든지 작가든지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은 정말 싫어한다.

가우디를 좋아하는 것도 금욕주의자라서 좋아한다.

고갱에게는 관심없지만 고흐와 관련이 돼서 읽는 것이다.

최후의 승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빈센트 반 고흐이다.

고흐는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해서 10년 동안 1000점의 그림을 남겼다.

멋지다,,,,,








고흐는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서 작업량이 왕성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했고 원하는 것을 가져 보기도 못했다.

실패의 아이콘인 것 같다.

고흐는 자신의 형이 죽고 이름을 그대로 물려 받았고 생일을 제대로 맞아 본 적이 없다.

그의 엄마는 고흐의 생일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형을 애도했다.

고흐는 자신의 탄생이 어머니에게 행복이 아니라는 생각에 어머니에게 인정받는 아들이 되고자 더욱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고 어머니와의 갈등은 점점 깊어 졌다.

그가 생전에 보여 주었던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와 그것이 실패했을 때의 깊은 상실감을 넘어선 절망감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게 뭔지 아니까 정말 마음이 아프다.

고흐는  내성적이어서 기숙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삼촌이 설립한 파리 구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서 판매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있는 시기에 거장의 작품을  많이 접하게 된다.

구필 화랑 런던 지점으로 발령을 받은 후 본점을 파리로 옮겼는데 그 이유는 여자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로 꼽히지만 그의 러브스토리나 그의 연인에 대해서 아는게 없다.

그냥 짝사랑을 하고 자른 귀를 창녀에게 줬다는 얘기는 들었다.

고흐는 신기할 정도로 일관되게 비정상적인 사랑 혹은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사랑을 했다.

그것도 거의 짝사랑이었다.

첫 번째 짝사랑 상대는 런전 시절 하숙집 주인의 딸 유제니 로외였다.

이미 다른 남자와 약혼한 그녀에게 거절당하자 고흐는 패배감에 시달렸다.

이 일로 화랑의 업무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삼촌의 배려로 파리지점으로 가게 된 것이다.

고흐는 항상 짠한 사람이다.

파리에서도 동료와 손님을 업신여기고 고객과 언쟁을 벌여서 일을 그만두었다.

상업적인 미술계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종교에 심취를 했다.

신학대학을 가려 했지만 못가고 선교사를 하다가 교단과 갈등을 빚어서  또 실패를 한다.

종교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을 접고 다시 예술의 길로 눈을 돌렸다.

헤이그의 화실에서 미술교육을 받는데 렘브란트에게 영향을 받는다.

음영이 뚜렸한 색채 기법과 전체의 강렬한 효과를 위해 세부 묘사를 생략하는 방식등을 렘브란트이 작품을 통해 익혔다.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리는데 그는 극빈층 노동자의 삶을 멀리서 연민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난의 고통을 체험하며 그들의 일상을 담아 냈다.

그에게 기법에 영향을 준 사람이 렘브란트라면 주제 면에서 영향을  준 사람은 밀레다.

고흐가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는 것은 고흐 신화화작업때문이다.

고흐는 미술학교에 다닌 적이 있고 불성실해서 퇴학을 당했다.

아틉[르펜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엄청난 수확이었다.

이곳에서 일본의 목판화인 우키요에를 접한 것이다.

일본 에도시대에 유행한 일본의 풍속화로 극도로 평면적인 화면 속에 축약된 이미지를 담고 있다.

우키요에에서 드러나는 흐릿하지 않은 확실한 그림체와 대담한 구도, 그림자의 부제 등의 특징은 회화에서 대상의 사실적 재현'에 익숙했던 유럽 사람들에게 이색적인 매력으로 다가와 일본 문화 열풍이 불었다.

글로벌한 세상을 많이 넓게 접하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데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고흐는 아를로 와서 화가공동체를 꿈꿨고 테오의 도움으로 고갱과 함께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고흐가 자신의 귀를 전체적으로 싹뚝 잘랐다고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귀볼을 살짝 잘랐다.

그 사건을 신문에 나왔고 그 일로 고갱은 뒤도 안 돌아 보고 고흐를 떠났다.

고흐도 마을에서 추방이 되었다.

고흐는 사람들이 자신을 감금시켜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상처를 받고 정신병원으로 들어 간다.

테오는 결혼을 하고 고흐는 그 사실에 더 소외감을 느끼고 어두운 정신병원병실에서 걸작들을 탄생시킨다.

그 작품이 바로 <별이 빛나는 밤>이다.

나도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다.

그 그림은 뉴욕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뉴욕에 가면 고흐그림을 꼭 보고 싶다.

직접 보면 그 동안 고흐에 대해서 공부하고 읽었던 책들때문에 감동이 더 클 것 같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고흐가 3일 밤을 새워 완성한 것이다.

파란빛과 보랏빛, 초록빛을 머금은 밤하늘이 힘차게 밤짝이는 노란 별들을  품고 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진다.

짧지만 거친 선으로 드러나는 감각적인 붓터치로 칠흑 같은 밤하늘과 그 아래 조용히 잠든 마을을 그려 냈고 밤의 풍경 한 쪽에는 거대한 탑처럼 사이프러스 나무가 솟아 있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고흐가 이 시기에 즐겨 그리던 것으로 서구 문화권에서는 이 나무가 주로 무덤가에서 자란다는 이유로 죽음이나 외로움, 고독을 상징하기도 한다.

반짝이는 밤의 풍경을 마치 검은 그림자처럼 가로막고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에서 고흐의 소외감과 고독이 느껴지는 듯하다.

고흐는 색을 그 자체로 인간으로서의 화가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이 작품에서 전해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쓸쓸함과 처연함은 당시 작가의 내면이었을 것 같다.

고흐는 가셰박사의 치료와 격려를 받았다.

고흐가 가셰박사의 딸을 사랑하니까 그때부터 냉랭해져 고흐가 자살을 선택했다는 얘기도 있다.

고흐는 가계박사의 딸인 마르그리트의 초상화를 여러 점을 그렸고 마르그리트는 7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은둔해 살았다고 한다.

가셰는 고흐가 죽자 그림의 소유권을 가로채고 그의 작품을 모사했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고흐 고갱은 다른 듯하지만 그들만의 주관적 색채를 찾아가려는 노력을 했다.

살았을 때는 성공적이지 않아 보였지만 후기 인상주의라고 이름이 알려졌고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후기 인상주의는 프랑스에서 나타난 예술 사조이다.

이 책은 물론 너무 재미있고 그동안 잘 몰랐던 미술사사건을 알게 됐다.

난 언제나 고흐에만 빠져 있고 고흐만 좋아하고 고흐만 사랑한다.

고흐를 통해서 고갱에 대해서 알게 됐고 고흐를 통해서 인상파, 모네, 마네, 렘브란트, 아를, 뉴욕, 일본미술을 알게 됐다.

언제나 고흐를  시작점으로 화가들과 화풍을 알아가고 확장한다.

고흐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서 라이벌인 고갱에 대해서  읽고  서양미술까지 관심을 갖게 됐다.

고흐에게 영향을 주는 건 모두 알고 싶어서이다.

미술이라는 장르에 시선이 멈추게 만든 건 바로 고흐이다.

이 책은 소장하고 있다가  시선을 끄는 그림이나 화가가 만났을 때 책장을 펼치면 멋진 미술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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