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 인간은 왜 믿음을 저버리는가
아비샤이 마갈릿 지음, 황미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배신은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과 의를 저버리는 것이다.

인간을 못 믿는 것이다.

난  어제도 내가 읽고 있던 책을 도둑맞았다.

그래서 정말 속상했다.

도서관에서 지갑과 가방채로 도둑 맞은 적이 있다.

핸드폰이나 컴퓨터 해킹을 당해서 70만원을 잃어 버린 적이 있고 카페에서 내가 쓰지도 않은 글때문에 강퇴를 당했다.

내가 보내지도 않은 메일때문에 오해를 받았다.

내가 하지도 않은 얘기를 내가 했다고 뒤집은 쓴 적도 있다.

내가 쓴 글의 표현을 자기가 했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

나는 사실 약과이다.

우리  아빠는 연대보증을 서서 빌라, 땅 , 시골집을 전부 날리셨다.

횡령,  배임하는 총장에게 대항하다가 월급 하나도 못 받고 학교에서 쫓겨 나셔서 9년 넘어가게 소송을 하고  계시다.

그 총장은 학교를 돈의 수단으로 삼아서 건물을 사고, 미국에 돈을 엄청 보내구말이다.

자신에게 돈을 가져 오는 사람들만 교수나 직원으로  쓴다.

수십 명하고 소송을 해도 돈을 써서 법적인 처단을 받지 않는다.

김영란법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같지만은 않다.

엄마도 집을 사는데 집을 파는 사람이 이중, 삼중으로 계약을 해서 또 소송을 하고 집도 날라 갔다.

코람데오라고 하나님이 두 눈부릅뜨고 쳐다 본다고 해서 교통법규 한 번 안 어기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돌아 오는건 사기 치고 이용할려고 하는 사람들 천지이다.

바로 양심이 없는 사람들이 주변이나 가까이에 너무나 많다.

아무도 못 믿겠고 뉴스를 보면 공포 그 자체이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하고 사람을 진정으로 대하기 보다는 이용의 수단으로 삼을려고만  한다.

물론 전부다 그런 건 아니지만말이다.

우리집앞에 꽃나무들이 있는데 벌써 4번째 도둑맞았다.

남의 물건을 왜 그렇게 욕심내고 훔쳐 가는지 정말 인간은 믿을 수가 없다.

뉴스를 봐도 정말 심하다.

드라마를 봐도 그렇구말이다.

나도 정직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100% 진실하기만 하는 건 아니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지만 약간 양념이 쳐진 하얀 거짓말같은 건 하는데 아는 얘가 자기는 태어나서 한 번도 거짓말을 안했다고 하는데 그게 거짓말같다.

주변에 또라이같은 인간이 있으면 손해를 보고 내 노트북에 있는 자료도 다 지운 경우도 있다.

난 돈도 없는데 나중에 돈이라도 생기면 더 큰 일 날 것 같고 범죄상황이 생길까봐 두렵다.

그런 모든 문제들은 또라이같은 사람들때문인 것 같은데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 미리 알고 대처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거지나 백수가 되는 것도 시간 문제이고 아니면 정말 인생도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것 같다.

 

 


​인간은 왜 믿음을 저버릴까,,,

배신은 왜 할까,,

이 책의 주제이다.​

신의를 저버리고 자신들의 유용을 위해서 막나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아도 마음을 비우고 약속을 지킬줄 아는 그런 사람이 필요한 때다.

마바샤이마갈릿은 1939년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저자는 한국 나이로는 79세이다.

저자는 히브리대를 졸업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영국의 옥스퍼드대, 독일의 자유 베를린대 및 막스프랑크연구소 미국의 뉴욕대 등에서 강의 연구활동을 해왔다.

현재 예루살렘 히브리대 철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왜 배신인가"?라는 질문에 흔히 따라오는 근본적인 의심은  배신이 대중의 관심을 받을 만한 주제인가가 아니라  배신이 철학에서 다루기에 적절한 주제인가다.

이 질문에는 상투적이고도 모범적인 답이 있다.

바로 인간과 관련된 것중에 철학에서 다루지 못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범 답으로는 충분치 않다.

배신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는 예술을 예로 드는 방식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부조리 연극으로 유명한 해럴드 핀터의 배신을 보거나, 존트카레가 배신에 대해 긁적거린 글을 읽는 것이 배신에 대해 파헤친 철학논문을 훑는 것보다, 현대사의 배신에 대해 더나은 통찰력을 제공할 수도 있다.

배신은 웃음처럼 인간 존재의 기본 구성요소지만, 철학적 연구 대상이 될 경우에 웃음과 달리 참담할 정도로 지루한 결과물을 생산해 낼지도 모른다.

배신이  철학의 주제로서 적절한가라는 의심은 은밀히 말해서 배신과 별로 상관이 없다.

어떤 주제를 선택하든 이런 의심이 따르기 때문이다.

주제가 중요하다고 해서 그 주제를 다룰만한 가치가 있는 여러 중요한 측면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주제에 대해 재미없는 글을 쓸 수도 있고, 유머에 대해 전혀 웃기지 않는 글을 쓸 수도 있으니, 배신이라는 흥미진진한 주제에 대해 지루한 글을 쓸 수도 있다.

이는 진부(뒤떨어져 새로운 것이 없음)하지만 사실이며, 결국 "증거는 푸딩안에 있다"라는 상투적인 말로 끝날 수 밖에 없다.

배신에 대해 논의 하자면 두터운 인간관계에 대한 관념을 지배하는 어떤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사람은 친한척하면 멀리 해야 한다.

관계를 생각할 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그림은 두 개 이상의 무엇인가 접착제로 붙어 있는 모습이다.

이런 사람은 옆에 붙이지 않는게 좋다.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이 접착제가 바로 관계다.

무언가로 관계하는 그 관계 안에 있는 것들을 넘어서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논리학에서 접착제라는 은유는 아주 오래된 골칫거리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면 된다.

이 부자 관계를 연결하는 접착제가 두 사람 사이에 있다면 '이브라함과 접착제 그리고 이삭과 접착제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 관계 속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슈퍼 접착제가 필요하며, 무한 후퇴에 빠지기 쉽다.

논리학자는 관계를 집합으로 환원함으로써 접착제 그림의 흡인성 즉 관계 속에 세 번째 요소를 필요로 하는 성질을 없애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예를 들어 유대인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씨'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 결과 '아브라함의 씨' 라는 유대인의 접착제는 이중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유대교의 율법학자는 유대인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이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유대인어머니에게 태어난 아이는 누구든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 아버지의 씨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유대인의 자격을 얻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기준이 생긴 것은 아마도 어머니가 누구인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로부터 내려온 사생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피와 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인간관계의 특성으로 '두텁다'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빽빽한 숲속에 있는 나무처럼 물리적으로 밀도가 높은 것을 비유적으로 확장한 표현이다.

인간관계 측면에서 가족과 친구는 투터운 인간관계의 대표적인 사례이므로 이를 바탕으로 어떤 비유적 확장이 자연스럽고 또 과장되었는지 살펴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자꾸만 변해가고 있다.

가족도 친구도 그리 투터운 사이가 아니라 서로 경쟁의식으로 질투하고 괴롭히는 그런 것이 많은 것 같다.

현실은 누구와도 투터운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무서운 세상으로 변화하고 있다.   

배신은 접착제가 떼어지는 관계성을 말한다.

그 접착제를 신뢰와 윤리 도덕적으로 더 두텁게 붙여야 하는데 그게 안돼서 배신이 생기는 것이다.

그 배신에 대한 멀티스러운 시각을 저자는 가르쳐 준다.

너무 배신에 집착하거나 실망하지  않게 깊은 사고를 갖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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