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탐닉 - 미술관에서 나는 새로워질 것이다
박정원 지음 / 소라주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난 집에 300만원짜리 그림이 있는데 작가인 친구랑 같이 안국동갤러리에 팔려고 갔다.

그런데 안국동갤러리에 있는 그림들은 몇 천만원에서 억대가 넘는 그림들만 취급한다고 한다.

1억에서 2억인 그림을 봤는데 하얀 바탕에 회색빛 네모 2개만 있었다.

저런 그림을 누가 살까했는데 그 그림을 어떤 정치가가 가지고 있었다.

뉴스에서 봤다.

난 사실 그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법학적성시험에 미학이 나왔다.

미학을 읽어 보고 그림에 대한 이론들이 그렇게 어려운 줄은 처음 알았다.

신사실주의에 대한 제시문이 나오는 것을 봤는데 그림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어서 그런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림을 팔아야 하고 시험을 봐야 해서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고흐는 원래 네덜란드 사람인데 태양빛을 좋아해서 프랑스의 태양빛이 멋있는 마을에 가서 살았다고 한다.

지금 텔레비전을 보는데 어떤 연예인은 고흐와 고갱이 헷갈린다고 했다.

난 그 정도는 아니다.

고흐의 그림은 3000억의 가치가 있다.

현대는 자본주의라서 그림도 돈으로 가치를 매긴다.

고흐의 그림이나 어떤 대기업 사모님이 산 <행복한 눈물>이라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이 85억 5000만원이라고 해서 놀랐다.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그린 그림에는 그 시대의 정치, 철학, 문화, 물리, 심리학, 경제등의 세계관이 전부 들어 가고 작가의 사상이 들어 가서 높은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화상이 있어서 작가의 후원과 시장을 구축하는 것 같다.

앤디 워홀은 미국드라마에도 가끔 등장한다.

그는 엄마가 깡통을 그리라는 농담을 받아 들여서 유명하고 인기있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일상적인 것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내가 그림에 대해 전혀 모를 때는 그림들이 나와도 그냥 그런가보다라고 넘어 갔지만 관심을 갖고 나서 고흐전이나 피카소전, 뭉크전을 보면 뭉크는 내면의 고통과 절망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표현주의이다라는 것도 알게 됐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자신의 동생에게 쓴 편지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림을 그릴 때 완전히 몰입한다고 했다.

고흐처럼만 한다면 무엇을 하든지 성공할 것 같다.

고흐에 대해서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짠해진다.

고흐는 자신이 물감이나 붓을 살 정도만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고 살아 생전 얘기를 했다고 한다.

고흐뿐만 아니라 여러 사조의 화가들은 천재다.

천재는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화가들의 사상이나 아이디어는 보통 사람들은 생각해내기가 힘들 것 같다.

기발하다.

명화는 그 시대와 천재적인 작가가 합동으로 내놓는 작품 같다.

그런 작품에 대해 잘 안다면 시대와 천재의 열정을 알게 될 것 같다.

이 책을 보면 그동안 봤던 궁금했던 그림들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될 것 같다. 

​그림은 한 인간이 세상에서 남긴 흔적이다.

표현하고 싶은 무엇인가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바꾸기 위해 애쓰고 공들인 자국,  감상자는 그 자국을  눈이라는 촉각을 이용해 증거를 찾는 탐정처럼 유심히 더듬게 된다.

그림을 말없이 조용하게, 오직 나의 눈초리로 더듬어 나가는 은밀한 '눈팅'이 미술감상이다.

이 얘기는 공감이 간다.

이 눈팅을 통해서 우리는 화가라는 한 인간을 만난다.

물감이 발린 모양은 화가의 손목이 누르고 간 힘이고, 손놀림의 속도이고, 과거에 이 캔버스 앞에 화가가 존재했다는 물증인 셈이다.

감상자는 그림을 감상하는 동안 물감이 발린 평평한 화면 위에서 화가가 그리고 간 시간이 필요하다.

화가가 작품 앞에서 서성이던 고민의 순간까지도 상상해 본다.

우리는 이렇게 저자의 다른 시간을 살다간 한 인간의 압축된 힘과 에너지를 그림을 통해 만나게 된다.

화가의 시선으로 세상의 장면을 바라볼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 저자는 전혀 상관 없는 누군가의 감정과 생각에 감동하고 공감하게 된다. 

우리에게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과 들을 귀가 있다는 것 만큼이나 공감이라는 소중한 기회를 듬뿍 제공 한다.

이 책을 읽으니까 생각나는 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미술 선생님들은 그림을 하라고 많이 권했다.

사생대회에 나갈때마다상을 휩쓸었다.

유치원 다니는 4살 때부터 그림을 그려서 상을 받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에도 방학 숙제로 그림을 그려가면 너무 잘 그렸다고 너가 그린거 맞냐고 홍대다니는 삼촌이 그려 준거 아니냐고 안 믿었다.

고등학교 때는 수묵화그림을 그려 갔는데, 미술 선생님은 너무 잘 그렸다고 안 믿어지니까 자기 보는 앞에서 그려 보라고 하고  나의 그림을 돌려주지 않았다.

미술 선생님은 여러 번 수묵화를 그리라고 시켰고 내 그림을 달라고 해도 주지 않았는데 나중에 선생님이 전시회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선생님은 나를 속이고 지금 생각해보면 대작을 시킨 것이다.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뛰어나면 칭찬하고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고 상을 받을 때도 엄마가 식사대접이나 돈을 가져 올 수 있는지 물었고 그렇게 못한다고 하면 전교생앞에서는 내이름이 불렸지만 반에 오면 댓가를 치룬 엄마의 딸에게 상을 나에게 뺐어서 줬다.

앞으로 전문직을 하면서 그림을 취미로 그릴 생각이다.

저자 박정원은 대학에서 회화과를 전공했고 매일 그림을 그리고 세계여행도 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림은 생각과 마음을 물감으로 도화지에 그릴 수 있는게 참 좋고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작업이다.

예술 작품은 그 속에서 담긴 시대를 보여주고, 시대를 살아간 한 인간의 특수한 삶을 들여다 보게 해준다.

더 나아가 걸작은 언제나 시대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갈등에 관한 첨예한 질문을 담아내고 있다.

노동의 고단함, 노화를 통해 겪는 허무,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욕망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사회와 제도, 시대와 계급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인간의 목소리가 예술 작품의 형태와 색깔 속에 있을 때, 관객은 작품 너머에 숨겨진 예술가의 존재를 만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 마그리트의 작품에는 인간의 좌절된 욕망에 관한 테마가 자주 등장한다.

천으로 얼굴을 감싼 연인의 키스는 친밀한 관계 속에서 차가운 낙담과 패배감을 표현하기에 둘도 없는 언어인 것 같다.

헤어진 연인에 대한 아련한 기억과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단념을 생각해 본다면,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풍기는 이 뭉뚝한 모호함은 여전히 쉽게 이해하거나 정의 내릴 수 없는 베일 속 타인의 감정으로 다가올 것이다.

화가는 14세 때 강물에 투신자살한 어머니의 시선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흠뻑 젖은 잠옷이 얼굴에 들러붙은 채 끌어 올려진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화가에게는 치명적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무의식적인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비평가들은 마그리트의 그림두상의 설정이 그의 유년의 기억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화가는 자신의 집 창문 너머로 언덕을 꽃게처럼 비스듬히 기어오르는 장애가 있는 여성 크리스티나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아 사람에 대하여 삶속에서의 용기를 크리스티나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앙상한 팔뚝과 묘하게 비뚤어진 마른 몸이 어딘지 모르게 구슬프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이런 사연이 그림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연의 그림은 20세기 미국 사실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앤드류 와이어스의 걸작이다.

미국 메인주의  쿠싱이라는 시골 마을에 살며 그 곳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온 화가는 가까운 이웃이었던 크리스티나 올슨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크리스티나는 후천적 근육질환으로 30대에 다리 기능을 상실했다.

분홍원피스 속에 부서질 듯한 몸을 감추고 드넓은 초원을 천천히 기어오르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화가가 간절히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세계의 크기는 걸어다니는 사람이 느끼는 것보다 더 높고 거대하다.

걷지 못하고 기어다니는 그녀는 더 섬세하게 대지의 촉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화가는 그런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미술적언어로 여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무수하게 변화하는 풀의 사실적색감과 결은 우리를 살아 숨 쉬는 자연으로 초대한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당시 50대 중반이었다.

그림 속 크리스티나의 두상과 상반신이 당시 20대 중반이던, 화가의 아내를 모델로 하여 그려졌다고 한다.

미국 유수의 현대 미술을 제치고,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공감하는 회화로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당당히 빛을 발하고 있다.

그림은 삶에 대하여 화가의 모든 것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고흐는 살아생전 그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남긴 열정적이고 성실한 화가였다.

 고흐를 생각하면 왠지 짠하고 마음이 아프다.

그에게 예술이란 사치스러운 허영이나 유희가 아니라 아름다운을 추구하기 위한 신성한 노동이었다.

고흐는 수많은 농부와 노동자의 초상화를 남겼는데 이는 진실한 노동의 삶을 살고자 한 화가로서의 다짐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던 무렵 7점의 구두 그림을 더 그렸다.

이 정물화들은 농부의 초상화를 보는 것 이상으로 우리 가슴에 인간의 삶과 노동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고흐의 구두 한 켤레는 구겨진 못생긴 구두 한 켤레를 보여준다.

구두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조용히 놓인 그 사물의 표정을 살피게 된다.

구두 한 컬레 빼곤 누렇게 물든 저녁 햇살뿐인 이 그림은 오로지 구두와 사연에만 주의를 집중하도록 만든다.

화가의 두터운 붓질은 캔버스 위에 누런 진흙을 으깨워 바르듯 물감의 결을 만들어 나갔다.

힘주어 꾹꾹 눌러 칠한 투박한 물감의 흔적은 꾸밈없고 솔직한 고흐가 이 보잘것 없는 사물에게 바치는 진지한 고백처럼 느껴진다.

인간의 고된 삶과 노동, 그리고 그것을 지탱해 주는 끈질긴 살아있음, 그 에너지를 담고 이리저리 일그려져 버린 산발의 표정을 보면서 우리는 이 정물화가 생명없는 단순한 사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얀반 에이크의 그림 속 남자는 아르놀피나라는 이탈리아의 부유한 상인이다.

그는 당시 최고의 경제 도시 네델란드 브루게에 살았다.

그가 얀반 에이크라는 화가의 눈과 손을 빌려 자신을 포함한 두 사람의 중요한 순간을 담아 두고자 했다는 사실 말고 우리가 확실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한 가운데 걸려 있는 거울 속에 반사된  관객들을 통해 부부앞에 중인 두 명이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반짝거리는 샹들리에, 거울의 테두리 장식, 장신구의 하이라이트, 원단의 질감까지 표현한 드레스와 코트는 이 그림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하도록 우리의 혼을 쏙 빼 놓는다. 

섬세하게 표현된 두 남편의 인체가 고급스러운 물건의 묘사에 눌려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화가는 오브제의 질감에 집중하고 있다.

과연 화가는 이 섬세하고 충실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려는 것일까?

사진과 비디오가 없었던 시대에 이미지로 기록하는 도구는 사람의 눈과 손뿐이었으므로,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업적과 지나온 자취를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그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가의 기록은 의뢰인의 의도와 목적을 충분히 수렴한 것이어야 했다.

이 부유한 상인은 자신의 가장 돋보이는 부분, 또 당시 네델란드에서 가장 돋보일 수 있는 가치를 남겨 과시하고 싶었을 거다.

부유함과 풍족함, 유행에 민감한 인테리어 취향, 앞서가는 패션 거기에 곁들여진 약간의 신앙과 교양 등, 아르놀피니는 이 모든 것을 너무도 탁월하고 매력적으로 기록해 줄 임자를 만난것 같다.

얀 반 에이크는 어떤 것도 이상화시키지 않고 참으로 정직하게 그들의 부유한 현실을 붓으로 세공해 놓았다.

기름에 많은 유화 물감을 얇게 쌓아 가면서 공예품을 만들 듯 천천히 그린 듯한 그림은 작은 화면 안에 화가의 시간을 정교하게 압축해 놓았다.

은근 슬쩍 명품의 라벨을 노출시키고 싶은 부자의 허영이 효과적으로 재현된 작업인 것으로만 본다면 그림이 조금 멋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북구 르네상스의 대표작 하면 단면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 꼽히는 이유는 이 그림 속에 현실 세계의 경쾌함과 아름다움이 너무도 세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서양사에는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1000년을 넘게 신의 뜻과 성서의 이야기만을 곱씹으며 기독교의 권위를 드러내야 했던 지난 시기가 있었다.

그러한 중세적 인간에게 벗어나 인간의 소소한 욕구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 네델란드의 르네상스는 분명 이  그림 속에 풍경처럼 낯설지만 한편으론 신선한 공기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미술이 일개 부자 상인의욕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변화할 때, 오히려 인간적인 공감과 미감을 체험 하게 되는 것이다.

기대하고 추상적인 신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중세 사람들의 노력과 지극히 상반되는, 이해하려는 중세 사람들의 노력과 지극히 상반되는 구체적인 현실의 인물들과 사물들을 공들여 묘사한 얀 반 에이크의 시간이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속에서 진귀한 보석처럼 생생히 반짝인다.  

고흐의 그림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주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은 그냥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서 좋다.

감상을 하고 뭔가를 더 알고 싶다면 작가의 의견을 수렴하면 된다.

나의 감상력과 저자의 감상글이 시너지를 일으키는 책이다.

이 책만 있으면 그림을 한정없이 탐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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