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반역자들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같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더 강조하기 위한 역설같기도 하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셀프혁명을 읽었다.
그 책을 읽을 때 나보다도 아주 옛날시절 사람인데도 어떻게 여성의 권익에 대한 그런 의식이 구축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힐러리나 오프리 윈프라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고 굉장히 독립적이고 멋진 여성이었다.
난 페미니즘을 대학교교양수업에서 들었다.
그때는 정말 센세이션하고 마음을 뻥 뚫어 주었다.
내적인 여성해방을 경험했다고 할까,,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얘기들이었다.
가끔씩 여성학강의를 듣는 남학생들은 교수님에게 반박을 많이 했었다.
우리 엄마도 여성학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할아버지가 맨날 양반은 어떻고 여자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하고를 교육시켜서 엄마도 가끔 구시대적인 발상이 나온다.
난 남동생이 있는데 4대독자외아들장손이다.
그런데 그냥 아들이라는 이유로 자기가 가장 사랑를 받는다고 했다.
난 그 얘기가 너무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했다.
성은 그냥 정해져서 나오는건데 왜 그것때문에 차별을 받고 덜 사랑을 받아야 하는건지 납득이 안되었다.
엄마는 나이와 실력위주로 대우를 해주겠다고 했는데 다행히 남동생이 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좋은 대학을 못가서 여성상위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재산적인 분배나 돈분배에서 차별을 느꼈다.
내 주변에는 엘리트부모님들이 많아서 그런지 딸들도 아들이랑 똑같이 대우를 하고 공부를 시켰다.
가끔 엄마는 나보고 성공을 하면 나한테 해달라고 하는게 너무 많은데 남동생에게는 뭔가가 생기면 주겠다는 얘기를 많이 하셨다.
그래서 법적으로 안된다고 하면 말을 바꾸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페미니즘에 대한 책들을 찾아서 읽었지만 많이 없었다.
여성 그대의 사명은을 읽었는데 예수님이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나오는데 이 책을 보니까 프랑스의 올랭드 구주인가보다.
그냥 남자랑 똑같이 대우해 달라고 했다고 사형을 당했다고 한다.
왠지 짠하고 정말 슬프다.
페미니스트의 책을 읽으면 가슴깊이 뭔가가 끓어 오르는 것 같고 뜨거운게 느껴진다.
그것의 실체가 감동인 것 같다.
아니면 호르몬작용인가,,
요즘도 김치녀가 어떻고 하면서 여성차별적인 얘기들이 많다.
여성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장애인, 빈곤층, 노인층으로 확대된다.
조금이라도 약하고 다르면 적자생존같은 사회에서는 존중하지 않는게 문제같다.
항상 차별에 대항하고 이기고 싶다.
그냥 그렇게 넘어가면 불합리한 것이 합리적이고 옳은 것으로 받아 들여지게 된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은 그냥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 그것을 뿌리치고 더 나은 세계와 여성을 위한 삶을 산 것 같다.
나도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처럼 불합리한 것과 싸울 수 있는 용기와 사고의 균형을 가지고 싶다.
정의, 평등, 공의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인생을 살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다.
저자 조이 크리스데일은 교육자이자 언론인으로 20년 넘게 방송 뉴스, 시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험버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다.
아름다운 반역자들은 역사에 도전한 여성 운동가들이다.
성경에서 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해서 성의 우월성을 표현했고, 여자는 아주머니(아이를 넣는 주머니)로 표현했다.
여성은 자유롭고 태어나면서 부터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살아간다.
이 세상에 여성이 없다면 이 세상은 삭막하고 황폐 할것이다.
생육하고 번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자의 위대한 힘중에 하나이다.
그런 점은 남성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엄마라는 단어는 모든 사람의 가슴을 녹이는 단어이다.
반역자들은 남의 눈을 상관하지 않는다.
이들은 낭만이 있고 감성이 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들이 하라는 대로 하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세상의 이치를 받아들이면서 터덜터덜 걸어갈 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만나는 반역자들이 어찌 보면 다소 거슬리는 존재라는 사실도 곧 눈치채게 된다.
반역자라는 용어를 붙이고 싶은 한 사람이 내 곁에도 있다.
바로 우리 엄마이다.
우리 엄마는 옛날 양반 이라는 가문의 다섯 딸 중 네째 딸로 태어 낳고, 그 가정의 테두리를 너무 싫어 했던 것같다.
그래서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리고 교회를 갔고 그래서 가정에서 요즈음 말하는 왕따에 아주 내놓은 자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성경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윤리도덕을 철처히 지키며 힘들게 살아 왔다고 한다.
절대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온 엄마는 지금도 책과 글을 학습하면서 남들과 좀 다르게 살기를 원한다.
아빠께서 학교에 있을 때 교직원 가족의 장학금으로 박사과정을 하다가 아빠께서 총장의 비리를 너무 많이 안다는 이유로 밀려나서 박사과정을 휴학을 했는데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계시다.
아직도 나이는 신경 쓰지 않고 나머지 박사공부를 하겠다고 하신다.
여기에 등장한 여성들도 좋아서이거나 쉽게 행동한 것은 아니다.
행동한 대가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들은 자기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앞장선 게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적인 삶보다, 더 크고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바로 정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반역자들에 포함시킬 수 있는 운동가의 사건은 너무나 많다.
'반역자들'의 명석한 사고와 대담한 행동을 따라잡으려면 수십년 혹은 수백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들은 어떤 식으로 변화를 일궈내는지를 보여준 본보기다.
올랭프 드 구주 (1748-1793) 는 프랑스에서 선거권을 주장하다가 단두대에 목숨을 잃었다.
그녀는 조국의 아이들이여, 반드시 내 죽음에 대해 복수하라고 했다.
그녀가 남긴 평등에 관한 예언은 수백년이나 시대를 앞선 것이다.
이 시대에 이런 여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하다.
그 사실이 너무 멋지고 여성의 자부심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파리의 어느 광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올랭프 드 구주는 처형을 지켜보는 군중을 향해 연설을 했다.
1793년 11월은 프랑스 역사상 손꼽을 만큼 끔찍한 '공포 정치' 시절이 막 시작 될 때 였다.
수많은 이들이 구주와 마찬가지로 기요린에게 목숨을 잃었다.
기요린은 사람의 목을 단칼에 자르는 단두대로 발명자인 의사의 이름을 딴 기계였다. 구주는 자기의 선견지명과 용기가 얼마나 특별한지 따를 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죽은 뒤에 복수는 커녕 격렬하게 비난을 받았다.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들이 깨끗한 환경에서 아이를 낳도록 위생적인 산부인과 병원을 만들자고 촉구하기도 했다.
당시 여성들은 네명중 한명이 아이를 낳다가 목숨을 잃었다.
구주는 열일곱 살 무렵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구주는 남편보다 자기의 사회적 지위가 더 높다고 생각했다.
남편 루이이브오브리는 남의 집 하인으로 일한 듯하다.
구주의 삶은 예감하게 한 혹은 조금이나마 암시 해주는 유년기를 전하는 것이 없다.
1748년 프랑스 남부 중세 도시인 몽르방의 변변찮은 집안에서 태어 났는데, 구주의 원래 이른은 마리구즈였다.
마리구즈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훗날 작가가 된 뒤 "교육 혜택을 받지 못했다고" 했지만 구즈는 자기의 '무지'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무지하기 때문에 창의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구즈는 어려서 부터 어마어마한 미래가 펼쳐질 운명이라고 믿었다.
선언문 서문에서 구주는 '누가 남성들에게 우리 여성을 억압한 권리를 부여했는가?'라고 질문했다.
헉,,,,정말 대단한 여성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런 생각이 도대체 어디서 부터 나온 것일까,,
그러고 나서 여성과 남성이 지적으로 동등함에도 남성은 여성위에 '군림 하려 든다'고 꼬집었다.
우와~~~
또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여성이 국가에 의해 사형당할 수 있다면 국가를 운영하는 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여성인권에 대해서는 완전히 천재적인 여성같다.
올랭프 드 구주의 선언문은 새정부의 선언문만큼이나 혁명적이었다.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 이 역사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20세기 내내 투표권을 비롯한 여성의 여러 권리를 얻어 내기 위한 투쟁, 여성에 관련된 법을 바꾸려는 투쟁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계속 싸워야 하는 문제가 하나 더 있다.
1791년 이후로 위대한 프랑스 영웅들은 파리의 팡테웅에 묻혔다.
하지만 2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업적을 인정받아 이곳에 묻힌 여성은 단 한 명 뿐이다.
올랭프 드 구주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저어 트루스(1797-1883)"는 온 민족의 힘이 자신과 함께 하는 것같다고 했다.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소저어 트루스는 남북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연설을 하려고 했다.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백인 학생들은 흑인을 무시했다.
그녀에게 야유를 보내고 의자를 쿵쿵 두드리고 비웃으면서 경멸을 드러냈다.
키가 180센미터나 되는 위풍당당한 트루스는 위엄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적대적인 청중을 향해 질문했다.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의 질문을 받을 것입니다. 왜 흑인을 미워했느냐고 말이지요. 답을 준비해뒀나요?'
트루스는 오직 믿음이 이끄는 대로 힘겹게 오래도록 미지의 길을 걸었다.
그녀에게는 큰 소리로 말하는 재능이 있었다.
기자들이 '사랑이 깃든 심장'과 '불같은 혀를 지닌 여성이라고 말했다.
소저어 트루스는 1864년 보스턴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만났고 노예제 반대 운동에 대한 링컨 대통령의 지지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눴다.
노예제 폐지를 위해 싸워 역사에 기록된 흑인들은 대부분 마부 출신 노예들이었다.
노예는 출생 기록이 많지 않았는데, 트루스는 1797년경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145킬로 미터가량 떨어진 헐리 마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어머니 엘리자베스와 아버지 제임스는 딸 이름을 이저벨리로 지었다.
이저벨리를 처음 소유한 가족은 뉴욕주 주민 대다수를 차지한 네델란드 인이었다.
이저벨리는 아홉살 때 노예로 사간 가족은 영어를 섰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린 소녀에게 채찍질을 했다.
사람을 팔고 사고한다는 것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데 채찍질을 한다는 것이 절대로 이해가 안된다.
1810년경 이저벨라는 존 듀몬트라라는 남자에게 팔려갔다.
이렇게 팔려 다니는 사람의 인격이나 자존감의 형성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너무 궁금하다.
열 세살에 이미 키가 다 자란 소녀는 부엌일과 들일을 했다.
듀몬트는 이저벨라가 백인의 여섯명 몫을 한다고 자랑하곤 했다.
그렇게 자랑을 하고 다니면서도 걸핏하면 매질을 했는데, 당시에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열여덟 살 무렵 이저벨라는 듀몬드의 또 다른 노예인 토머스와 결혼했다.
노예 주인들은 보통 자기 노예들끼리 결혼을 시켰다.
두 노예 사이에 태어난 아이 역시 자기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저벨라는 아이를 다섯이나 낳았지만 모두 듀몬트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 자식 이지만 노예는 자기 새끼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듀몬트가 어린 아들 피터를 팔자 획기적인 소송으로 정면 도전 했다.
이저벨리는 이미 1826년에 듀몬드 집안에서 도망친 상태였다.
16년 동안 노예로 지냈는데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저벨리는 쉬지 않고 노예 제도에 반대한 것이다.
노예제도를 유지하면서 미합중국에서 분리 독립하려는 남부 11개 주에 맞서 북부 편에서 싸우던 흑인 군대와 함께 하기도 했다.
1863년 남북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에이브레햄 링컨 대통령은 노예 수백만명을 자유의 몸으로 만드는 노예 해방령을 내렸다.
북군이 싸우던 지역에서는 노예 수천 명이 워싱턴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 왔다.
워싱턴에는 먹을거리도 일할 곳도 없었다.
지낼 데라고는 난민 수용소뿐이었다.
1864년 이들을 돕기 위해 워싱턴으로 간 트루스는 눈앞의 광경을 두고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노예 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된 뒤에도 200년 넘게 관습으로 남아 있었다. 아니 현재에도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인종 차별은 계속 되고 있는것 같다.
한때는 이저벨라였다가 신념 넘치는 투사 소저너 트루스로 다시 태어난 그녀는 비참한 생활을 감내한 수많은 노예들 처럼 그냥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트루스는 40년 여정을 통해 고통을 끝내고 새로운 해방으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데 헌신했다.
정부가 있는 워싱턴 주 의회의상에 소저너 트루스의 동상이 세워졌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등장한 흑인 여성동상이다.
제막식에는 노예 후손이자 흑인 최초의 대통령 버락오마바와 부인 미셜 오마바가 동상을 공개했다.
사로지나는 1879년 2월 13일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고르니스 차토피댜야는 과학자이자 교육자였고, 어머니는 바라순다리는 시를 섰다.
사로지나는 여덟아이 가운데 맏이였다.
사로지나는 10대 시절까지만 해도 시에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인도를 위해 할일을 계속해 나갔다.
언니도 최초로 여성 주지사가 되었다.
사로지나는 간디가 세상을 뜨고 1년 뒤인 1949년 3월 21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때 그녀의 나이는 일흔이었다.
불과 열네살에 "숭고한 이상이 나의 빛나는 꿈이 되었네"라는 시구를 지은 사로지나는 일평생 인도 독립이라는 드높은 이상을 위해 헌신했다.
사로지나는 간디와 함께 대영제국을 뒤엎는 역사를 이루어 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모든 백인이 아파르트헤이트가 부여한 특별한 권력을 누렸다. 이런 불평등 정책에 반발하는 백인은 거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루스와 조가 반대하고 나섰다.
정부가 반대하는 이들을 가혹하게 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와 루스는 아파르트 헤이트와 관련된 모든 규정을 어겼다.
정부에서 반대하는 책, 잡지, 신문도 금지 됐다.
아파르트헤이트 법을 위반한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 내려고 경찰이 운동가들의 집에 불시에 들이 닥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루스 퍼스의 위업 가운데 하나는 역사적 자유 헌장을 만드는데 기여한 것이다.
자유헌장은 이런 선인문으로 시작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모든 사람, 백인, 흑인, 모든 사람의 것이다.
1955년 6월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는 공화국을 위한 자유 헌장을 채택하기 위해 모두가 모였다.
루스와 조가 벌이는 일은 거의 대부분 불법이었다.
루스는 모든 저항운동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1948년 스물세살이 된 루스와 조슬로보와 사귀기 시작했다.
조는 루스와 다른 가정이다.
부모가 가난했기 때문에 열 네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하면서 독학을 해서 변호사가 됐다.
조와 루스는 모두 열성적인 공산주의 였고 정치적 신념과 정치 활동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었다.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이 그를 영웅으로 여긴다.
루스 퍼드가 다닌 고등학교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된 상을 만들었다.
결혼생활과 사회생활을 병행하는 법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남자는 여지껏 본적이 없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1969년 3월 30대 중반이었고 뉴욕 시에서 사는 성공한 작가이자 언론인이었다.
당시의 미국은 여성평등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고용주는 여성을 채용하지 않으려 했고, 여자들이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가장 질 낮은 것들이 있다.
남성 언론인들은 '미친 여자들' 인 페미니스트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글로리아에게 경고했다.
너무나 힘들게 경력을 쌓아 성공했는데 페미니스트가 되면 그 동안 이룬 모든 것을 망치게 될 거라고 했다.
글로리아에게 1980년대는 개인적으로 힘겨운 시기였다.
아버지는 여러 해전에 홀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뇌졸증으로 쓰러지자 글로리아는 어머니에게 만큼은 아버지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1986년 글로리아는 유방암 선고를 받았지만 수술을 받고 회복됐다.
2000년 예순 여섯의 나이로 글로리아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운동가인 데이비드 베일과 결혼한 것이다.
글로리아는 결혼자체를 반대한 적이 없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글로리아를 두고 거의 반세기를 견뎌온 페미니즘의 얼굴이라고 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가운데 하나인 오프라 원프리는 수백만 명을 대신해 글로리아는 자신에게나 스스로 여자라고 말하는 모든 이들의 개척자이자 선구자이다.
우리를 해방으로 이끌어준 그녀에게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고마움의 빚을 지고 있다.
항상 남보다 앞서 간다는 것은 언제나 힘들지만 이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영원히 변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선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과거의 여자, 남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써의 평등을 누리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여성운동가들의 사진과 사회적인 배경과 그녀들의 업적을 정리해 놓아서 더 읽기가 좋았다.
그녀들의 사진을 보면서 나도 그녀들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