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은데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라는 것을 요약한 책을 읽었는데 미셸 푸코하면 판옵티콘만 기억에 생생하다.
푸코의 진자도 자꾸 떠오르는데 그는 이탈리아 과학자이다.
프랑스철학자,,,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사람인데 지금 그가 말한 감옥이나 정신병원의 구조인 판옵티콘이 문제이다.
판옵티콘은 영국의 공리학자인 벤담이 처음으로 만들고 막스 베버가 판옵티콘을 정신 병원, 학교, 공장에 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했다.
판옵티콘은 그리스어로 모두 본다는 뜻이다.
이걸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또 자세히 설명했다.
위에서는 아랫사람들이 뭘하는지 전부 잘 보이지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위에 있는 사람들이 뭘하는지 전혀 안 보인다.
지금 우리나라도 권력의 구조가 판옵티콘의 형식이라서 위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알지 못해서 밑에 있는 사람들은 당하고 속는다.
판옵티콘은 조지오웰의 1984년에도 또 등장하는데 빅브라더가 나와서 감시국가를 만드는 것을 또 얘기한다.
지금도 국가나 대기업은 판옵티콘의 형식으로 국민들이나 직원들을 엄청 감시하고 통제할려고 한다.
권력이 아래까지 공유되고 개방되고 열려있지 않으니까 썩고 자기들만 향유하는 것 같다.
소쉬르의 언어구조학도 읽기는 읽었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난다.
그때 그 책을 읽을 때 좀 아팠는데 그래서그런지 소쉬르는 구조언어학만 떠오른다.
내용이 어려웠던 것 같다.
들뢰즈나 베르그송은 이름만 들어 봤고 알랭 바디우는 처음 들어 봤다.
데카르트, 하이데거에 대한 책도 읽기는 읽었는데 별로 인상이 깊지는 않은 것 같다.
레비나스도 들어 보긴 한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철학이 있는 사람하면 왠지 소신이 있고 생각이 깊고 어떤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같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이 철학책을 읽었다.
잠못 이루면서 우리가 하는 걱정의 3%는 이미 지나간일, 40%는 결코 일어나지 않은 일, 22%는 별것 아닌 사소한 일, 나머지 8%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일에 대한 것이었다.
걱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요즘 사람들은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첫째는 돈이다.
사람들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과 보이는 돈이 신이라고 하면서 천박한 가치를 많이 얘기한다.
돈과 권력뿐만 아니라 외모도 정말 중요시하면서 성형왕국이 되고 성형중독이 되는 세상이다.
연예인들처럼 원래 잘생기고 예뻐야지 성형미남이나 성형미인이 되지 아니면 그냥 성형인이 되는 것이다.
아는 언니가 20억이 있다고 자랑하고 강남이나 부자동네에 살아야 하고 학력이 높아야 하고 해외여행을 다녀야 하고 명품만 산다고 얘기를 한다.
같이 대화를 하다가 불어를 하고 영어를 한다.
그 언니는 가족과 사이가 안 좋고 사람을 존중한다거나 귀하게 여기는 것을 모른다.
사람을 이용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나도 책에서 서열사회가 어떤지 잘 아는데 그 언니처럼 못생기고 뚱뚱하면 여성은 서열이 떨어 진다는 것을 책에서 읽었다.
학력도 예체능계라서 낮고 직업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위화감이 조성된다고 하지만 사실 그 언니를 사람들은 무시하고 멀리하고 싶어 한다.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는 철학적인 마인드가 너무 필요하다.
그 언니의 천박한 마인드는 책을 읽지 않고 철학이 없는 속물 근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다.
사람은 돈이 있어도 격이 있어야 한다.
그 언니를 보면서 내적인 면을 더 살펴 봐야 하고 진정성이 있고 속물이 아닌 깊은 철학이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인간은 예뻐지고 싶은 심리, 부자가 되고 싶은, 성공하고 싶은 심리가 누구나 있다.
그래서 불안해 한다.
불안이 과해도 문제겠지만 마치 불안이 패배자에게 특화된 삶의 태도인 것 처럼 긍정을 몰아 붙이는 사회적 분위기도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철학은 이 불안의 정서로 부터 생각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불안하기에 불안을 해소할 방법을 강구하는 노력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 일을 다 아는 듯이 떠들어대는 철학자들이지만 실상 밤으로 찾아든 고민 속에서 해답을 얻어낸 경우들이 적지 않았다.
그 고민의 시간이 꿈의 경계를 넘어서 이어진 경우도 많았고.... 결국 그들도 우리처럼 밤새 소심하게 생각에 잠기는 존재들이다.
철학은 미래에 대한 예언서가 아니다.
현대 철학은 차라리 우연을 긍정하는 편이다.
따라서 어떤 확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때로는 너 자신이 되라고 하면서도, 때로는 나와 다른 타자의 가치를 미래의 시간으로 규정하는 모순 속에 어디까지가 아집이며 이에 대한 '실존'도 저 스스로 알아서 판단해야 할 일이다.
이런 무책임한 사유들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문제 해결력이다.
신이 정말 있다면 나에게 왜 이러시는 거지라는 물음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할려고 한다.
'철학자' 하면 떠오르는 표상은 아마도 '신은 죽었다.' 로 대변되는 니체 일것이다.
저자는 철학이 전공도 아닌데 철학에 대한 연구와 책을 쓴 것이 대단해 보인다.
철학은 왠지 모르게 따분한 느낌이 드는 것 같다.
니체의 말처럼 신은 죽었다는 것이 정말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인지 과학의 발달로 신의 역할이 줄어 들었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것은 스피노자이다.
그런데 그 사과나무와 관련한 이 어록의 저작권은 스피노자가 아닌 마르틴 루터에게 있다. 아이제나흐 라는 독일의 한 시골마을에는 그 글귀가 새겨진 루터의 기념비가 한 그루의 사과나무 그늘 아래 세워져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이 어록을 스피노자의 것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세상에 종말이 다가와도 아브라함의 후예인 스피노자는 신에게 기도를 올리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저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뿐이라고 한다.
스피노자에게는 사과나무를 심는 행위가 신을 향한 기도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우연의 순간마다 절실한 필연을 기도하는 인간의 삶,
그 우연과 필연을 모두 위로하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담았다는 점에서 이 어록은 그냥 스피노자가 논리적으로 증명해낸 신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다.
인간은 그저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인간은 그저 신의 속성으로부터 뻗어 나온 한 표현에 불과하다.
인간 뿐만이 아니다.
신이 창조한 만물 모두가 신의 속성을 나누어 가진 신의 표현들이다.
그래서 그 모두를 사랑하되,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무한의 속성에 일정한 형태가 있을 수 없을 뿐더러, 실상 무한이라는 인간의 언어 개념조차 이길 수가 없는 절대존재가 신이다.
때문에 인간의 지력과 지각으로는 결코 신을 인식할 수 없다.
인간의 한계내에서 인식할 수 있는 신의 모습은, 바로 자연 그 자체의 생명력 뿐이다.
지구의 종말이 정말 신의 뜻인지 선악과를 따지 말라는 신의 명령은, 정작 선악과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최초의 인류에게는 도리어 자신들의 선악과를 딸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사건이기도 했다.
신앙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해석은,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악이 따르게 될 것이란 신의 경고가, 이미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선택적 자유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식은 그저 신을 사랑하는 것일 뿐, 인간은 신의 모습대로 창조되지 않았다.
인간이 인간의 모습대로 신을 상상할 뿐이다.
스피노자는 당대 기독교의 교조적 권위를 미신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 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은 인간의 욕망으로 들끓는 종교 시설일뿐이다.
교회라기보다는 성황당에 더 가깝다.
성황당이 지닌 문화인류학적 가치를 따져본다면 이런 비교가 도리어 성황당에 미안한 일이기도 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진게타로보' 세계 최후의 날의 마지막에서 보여준 인문주의다.
진게타로보와 함께한 두 제네데이션은 인류의 미래를 구원하기 위해, 최대 출력의 에너지로 삶의 마지막을 향해 돌진한다.
태초의 빛으로 지어올린 궁극의 필살기, '샤인스파크'를 굳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쳐대며 돌진 직전에 찾아온 깨닫음이 있었으니, 게타선의 절대적인 힘에 의존해 왔던 자신들이, 결국엔 게타선의 존재 여부와는 별개로 스스로의 미래를 위한 희생은 자신들이 감당하기도 하고, 미래 그 자체인 현재의 제네데이션을 샤인스파크 밖으로 밀쳐낸다.
분명 신이라는 절대 정신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신의 존재 의미는 의지다.
이미 나의 존재 자체가 그 절대정신의 한 표이며, 무조건적으로 신에게 의지 하려는 나약함은 도리어 나약한 신을 섬기는 신앙을 고백 하는 불경이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숙명의 서사대로 기다리는 순간이 아니라, 너 스스로가 다가가 맞이 해야 하는 순간이다.
겨우내 자신을 피워내기 위한 의지로 봄을 기다리는 꽃의 생명력처럼 말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인지라,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행위는 기복을 위함이 아닌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 되어야 한다.
'지켜주세요'. 이루어주세요가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낼테니 '지켜봐 주세요'.가 되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일어나라는 것이고 자기 스스로 이루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삶의 불확실성에 던지는 샤인 스파크는 당신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낸 신의 '의지'다.
종교적 예정설을 철학의 화법으로 풀어 놓은 것이 라이프니르의 모아드 이론으로 쉽게 요약하자면 타인의 가치를 배제한 자신만의 인생 방정식을 일컫는다.
모든 철학은 들뢰즈로 통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자신이 도리어 겁탈을 당했다고 고백한 유일한 철학자가 니체이며, '철학의 그리스도라'는 숭고한 지위로 떠 받든 철학자가 스피노자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스피노자-니체-들뢰즈를 계보로 묶으며, 조금 더 디테일한 경로를 그리고자 하는 이들은 베르그송을 추가 한다.
들뢰즈 철학의 기저에는 라이프니츠의 낭만주의적 요소가 다분하며, 그 흔적이 바로 .주름. 키워드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이론을 단순히 속명론으로 단정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주름' 때문이기도 하다.
라이프니츠는 세계의 실체를 정신의 원자인 '모나드'로 파악한다.
모나드는 생각과 존재방식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정신으로 품은 우주의 섭리다.
여기에 주름이라는 개념을 덧붙인다.
그 작은 모나드 안에는 자신의 운명이 꾸깃꾸깃 접혀 들어차 있다.
모나드는 주름들이 응축된 형태며, 맞닥뜨리는 우연적 사건마다 주름으로 접혀져 있던 잠재적 서사들이 하나씩 펼쳐진다.
얼굴에 생기는 주름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일생을 말해주는 흔적이기도 하지만 미래를 알려주는 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은 성형으로 자연을 파계한다.
얼굴에 주름 하나만 생겨도 야단인 것 같다.
비닐 장판을 덮어 씌운듯한 번들거림이 보기가 흉할 때도 있다.
그래서 살아온 세월을 가늠 할 수 없다.
무슨 약물도 그리 많은지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을 얼굴에 주사로 놓는다고 했다.
인간은 불안한 존재다.
그러나 인생이 아름다운 까닭은 불안전성이 지닌 잠재성 때문이기도 하다.
이성적 존재들에게는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사안이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가 원인이 되지 못하는 사안이 '불안'이다.
이런 불안을 위로하고자 발생한 인문이 신을 향한 믿음이었고, 신앙에서 이성적 사고로 나온 학문이 철학이었다.
그 이성적 사고가 정말 합리적인지에 대한 검증으로 분리된 영역이 과학이다.
불안은 알 수 없는 미래의 시간대에 그 원인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규명하려는 목적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이기도 하다.
플라톤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단어는 '관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철학에 대한 이미지 즉 난해한 개념들과 생각을 늘어 놓고서, '다시 말해서' 쉽게 말해를 반복해도 도대체 뭐가 어떻다는 것인지 모를 일방적인 전개들이 대부분 '관념'에 관한 담론들이다.
철학적 화법으로 서술된 난해하고 지루한 풀이를 이해 하려는 수고를 하지 않았도 그저 우리가 익히 아는 관념이란 정도가 된다.
생각의 매개물에 관한 다시 말해 이데아와 현상계를 변별할 수 있는 정신 능력이다.
이성의 토대가 바로 관념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현상을 보는 것은 동굴에 비친 그림자를 보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동굴에 묶여서 실질적인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만 볼 뿐이고 동굴을 나가서 진짜 빛을 봐도 그게 진짜 빛인지를 모른다.
플라톤은 철인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는 것이 철인만이 진짜 빛을 보기때문이다.
그런 생각들이 엘리트의식을 만들기도 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철학의 용어들은 거의 모두가 일본식 한자어다.
우리 역사의 '실학'이라는 단어조차도 한자어다.
실상 철학과 인문이 아니어도 우리가 쓰는 한자어의 대다수가 일본식이다.
소심하다는 것도 일본식한자인지 궁금하다.
소심하다는 것은 대담하지 못하고 조심성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철학이나 인간의 사고에 대해서 소심한 것은 의미가 있고 격이 있는 태도같다.
속물근성에 빠진 너무나 가벼운 사람의 얘기를 듣다가 이 책을 읽으니까 나의 생각과 마음이 정화가 되는 것 같았다.
인간은 추상적이고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 추구하고 찾을 줄 아는 정말 무겁고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