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이 꼭 알아야 할 한국사 개념서 - 2009 개정 교육과정
박찬영 외 지음 / 리베르(학습)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2014년 3월 18일 오후 8시 21분에 저장한 글입니다. reading

2014/03/18 20:21 수정 삭제

복사 http://blog.naver.com/naholy/80209505300

전용뷰어 보기


​일제의 침탈과 국권 수호 운동을 읽으면서 고등학교때처럼 우리나라 역사가 정말 더 알고 싶었다. 
그때는 국사책 한권의 연도를  다 외우다 싶이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일본은 지금도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고 억지를 부린다.
일본은 남의 나라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우기는 것이 얼마나 간사한지를 알 수 있다.
러 일 전쟁에서 승리를 잡은 일본은 1904년 8월 제1차 한 일 협약 체결을 강요했다.
그때 우리나라는 외교를 잘 몰랐던 것같다.
우리나라는 외교를 잘못하고 약한 탓에 결국 억울한 일을 당했다.
러 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 보이자, 아시아 침략의 교두보가 필요하였던 미국과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 아시아 동반자가 필요하였던 영국은 일본과 손을 잡았다.
이를 통해 두 나라는 각각 청과 조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권을 침해받을 경우 공동 대응하기로 하였다.
1905년 7월 일본과 미국은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며,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하지 않는다.' 라는 내용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남의 나라를 가지고 힘있는 나라끼리 협약을 했다니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든다.
한국의 역사를 다시 보면서 일본 때문에 우리나라는 외교권이 박탈 돼어 그렇게 묶여서 외교가 늣어진 것을 생각하며 가슴에 분노가 치민다.
어린시절에는 을사보호 조약이 진짜인줄 알았는데 고종황제는 끝까지 싸인을 하지 않았었다.
일본은 대한 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군대를 동원하여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는 가운데 1905년 11월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을사조약때문에 우리 나라는 일본에게 모든 권리를 빼앗꼈다.
고종황제는 끝까지 서명을 거부 했는데 가짜로 을사조약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모든 역사를 눈가리고 아웅식으로 지금도 한국을 괴롭힌다. 
그 시대는 그렇게 나라를 사랑하는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의 우리나라는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우황좌황한다.
민영환은 후일을 부탁하는 글을 남기고 자결을 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조 미 수호 통상 조약을 근거로 미국에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독일, 러시아, 프랑스에도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통고하고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냉혹한 국제 정세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렇게 고종 황제는 많은 노력을 했지만 강제 퇴위됐다.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픈 사연을 보면서  그때에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하지만 지난 우리나라 역사를 다시 한번 되돌려서 이 책을 읽고 싶었다.
꺼져가는 촛불 처럼 그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끌고가서 무자비 하게 짓밝은 일본을 우리는 무엇으로 보상을 받는단 말인가,,,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 아닌 나라의 약함을 다 짊어지고 싫다는 말도 어리광도 앙탈도 부리지 못한채 내 나라가 아닌 곳으로 부모 형제와 떨어 지게 되었다.
그리고 짐승 취급을 받았던 그 악몽들을 그녀들은 어떤 것으로 보상을 받아야 억울함이 풀릴까?
얼마전 TV에 김진명 작가가 나와서 우리 명성황후가 뮤지컬이나 영화에서 처럼 당당하게 대항을 할 수 있었던게 아니라 일본 야쿠자들에게 무자비 하게 살해 당했다는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며, 온 몸이 떨렸다.
이런 우리의 아픈 역사를 다음 세대 나라의 주인이 될 사람들에게 역사 과목을 없애고 선택과목으로 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 나라를 누가 지킬까?
조금 살만 하면 미국 어디로 유학을 보내서 내 나라의 소중함을 잃어 버리게 한다.
거리의 간판들만 해도 그렇다.
우리 한국말은 제대로 없다.
그저 황금 만능주의 속에 묻혀서 아무 의식나 견해가 없이 극도로 이기주의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런 이기주의에서 정신을 차려야지 일본은 지금도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긴다.       

고종황제는 끝까지 나라를 지키려고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보낸 친서(1905,12월) ​를 보냈지만 이미 미국과 일본은 자기들끼리 조약을 맺고 고종황제의 친서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 하고 국제적으로 외교를 통하여 국제적 지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1905년 12월에 유럽주제 한국공사들에게 고종의 의사를 전달하라는 훈령을 보냈으며, 1906년 1월 독일의 빌헬름 2세에게 일본의 침탈과 침략을 고발하고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밀서를 보내기도 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주권 침탈과 침략을 알리고자 했다.
그 전에 미국에 힐버트 특사를 파견하여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렇게 힘이 약하면 주위에서도 돌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애국 계몽 운동가들은 그래도 나라를 지키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다.
이희영씨 같은 분은 모든 재물을 투자해서 후학을 가르쳤다.
그래도 이런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다.
유인석, 이소응, 허위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의병을 주도하였는데, 농민과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가담하여 전국으로 확대했다.
을미의병 항쟁은 아관 파천을 계기로 친일 정권이 무너지고 단발령이 철회되자 대부분 종식 되었다.
을사의병은 을사조약을 계기로 다시 봉기한 의병들은 을사조약의 폐기와 친일 내각의 타도를 내세우며 무장 항전을 벌였다.
최익현 부대는 순창에서 대한제국 정부가 보낸 진위대와 대치하게 되자 '일본군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겠지만, 임금의 군대와는 싸울 수 없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포로가 되었다.
그 뒤 최익현은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 단식 끝에 순국했다.
그 때는 그래도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도 내놓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게 목숨을 많이 내놓을  국민들이 많을지 의심스럽다.
일본은 지금도 독도를 빼앗아 가기 위해 학생들의 역사 책에 넣어놓고 주입을 시킨다.
 언젠가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할 생각이다.
우리도 내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물론 지금 독도 지킴이들도 있고 독도를 지키기 위한 대대적인 활동들이 많다.
일본은 근성이 나쁘다.
옛날에 우리나라 국유지를 억지로 강탈해 갔다.
그리고 사유지를 대한제국이 사게 하여 결국은 자신들이 모두 강탈해 갔다.
외국인은 토지 매매를 할 수 없었는데 억지로 빼앗아 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 너무 억울한 일이다.
방곡령은 개항 이후 일본은 곡물 유출이 급증하면서 곡물가격이 급등했다.
그래서 지주와 부농은 더 많은 이익을 얻었다.
그렇다 지금도 부자는 더부자가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진자만이 더 많이 가갖게 돼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우리 나라가 장하기도 하고 가슴 아프기도 하고 우리 나라에 대한 연민과 애착과 관심이 더 생기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