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예찬 - 불확실성을 환대하는 방법
안 뒤푸르망텔 지음, 이세진 옮김 / 사람in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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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불확실성을 환대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저자 안 뒤푸르망텔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 미국 브라운대학교와 프랑스 소르본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환대에 대하여』(공저), 『모성의 야만성』『온화의 힘』등 다양한 인문 에세이를 출간했다. 그 가운데 『위험 예찬』은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세계 각국에서 출간되면서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이 책에서 뒤푸르망텔은 철학적 사유, 내담자들의 실제경험, 문학 작품을 엮어내면서 다채로운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평생 실천해온 삶의 원칙을 담았다. 우리 시대는 위험의 영향 아래 있다. 확률 계산, 표본조사, 주가 폭락을 둘러싼 시나리오들, 개인들의 심리평가, 자연재해 예측, 위기관리센터, 감시카메라, 이제 정치적이든 윤리적이든 어떤 담론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날 사전 예방원칙은 표준이 되었다. 인명, 사고, 테러, 사회적 요구라는 면에서 사전예방원칙의 기준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집단 동원력과 경제적 이권에 따라 이동한다. 그런데도 그 가치는 의문시되지 않고 건재하다. ‘생을 걸다’ 는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표현 중 하나다. 이는 필연적으로 죽음과 맞서서 살아남는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결정의 순간에 위험을 우리가 시간과 맺고 있는 내밀한 관계에 질문을 던진다.

위험은 우리가 상대를 모르는 채 임하는 싸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욕망, 우리가 얼굴도 모르는 사랑, 순수한 사건이다. 위험을 감수하는 일은 영웅적 행위, 순전히 미친 것, 일탈행동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문화가 장차 어찌 될지 묻지 않을 수 있는가? 위험의 감수를 행동으로 실행하기도 전에 어떤 영역을 확정한다면, 그것이 특정한 존재방식을 전개하고 지평을 구축한다면 생을 견디는 것은 일단, 죽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온갖 종류의 포기, 증상을 잘 드러나지 않는 우울증, 희생의 형태로 죽는다.



행위로서의 위험 감수는 우연히 개입할 여지를 준다.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고자 하나 위험은 불명확성, 검증불가능성,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여기서 평가하거나 제거할 수 없는 것, 즉 죽지 않음이라는 지평에서 위험을 검토한다. 어떻게 죽음의 확실성이 우리의 실존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이 확실성과 가장 먼 거리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소망하고 실현했던 모든 것이 언젠가 사라질 것임을 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동안 죽지 않는 것이 모든 위험 가운데 으뜸이고 그 위험이 탄생과 죽음에 인간이 밀착해 있을 때 굴절되어 나타난다면 위험 감수는 그리스어에서 말하는 결정적 시간, 즉 카이로스이다. 그것이 결정하는 것은 비단 미래만이 아니요, 과거이기도 하다.

심리적 장과 진실 사이의 관계를 의문시하는 것은 우리 모두 주체로서 자신이 ‘내밀한 예언’ 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계 맺고 있음을 사유하는 것이다. 준비되고 예고되는 것을 우리가 어느 순간 ‘볼’ 수 있는 이유는 현실과 쾌락 원칙 사이의 신경증적일상적 분열을 초과하는 진실을 탐색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분석의 장이 삶의 어느 시점에서 이 통찰, 이 간극에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가?

낯선 언어를 더없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이해하라, 내밀한 예언은 다가오는 것을 증언할 수 있는 우리 안의 능력이다. 얀 파토치카는 「균형 있는 삶, 폭넓은 삶」에서 폭넓게 산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한계를 느끼고 화해되지 않은 것을 감히 우리 안에 들이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사슬에 묶인 자야말로 자신의 구속 상태를 완성하는 데 가장효과적으로 협력하는 자다.”- 플라톤, 「파이돈」 욕망을 어떻게 글로 쓸까? 우리 삶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그것에, 어떻게 하면 은유나 어림잡음 없어, 더듬대지 않고 다가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빗겨나거나 미치지 못함 없이, 찾을 수도 없고 검증할 수도 없는 이 실재, 우리 몸의 진실을 둘러싼 상상을 멈추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욕망은 무엇보다 몸의 언어다. 몸의 이야기 말이다. 몸의 암호, 몸의 계보와, 욕망의 결핍 상태에 있지 않은 몸은 없다. 욕망의 효과는 우리에게 전 미래 시제로 도달한다. 만회할 수 없는 지연의 시간에서 사유가 탄생한다. 결핍의 자리에서 욕망을 사유하는 능력 말이다.

욕망은 손에서 손으로 달아나지만 움켜쥘 수 없는 스카프 같아서 그것이 지나간 후에나 이렇게 외칠 수 있다. 여기 있었서, 무엇이 욕망을 글쓰기 옆에, 욕망을 글쓰기 자체로 구성하는 바로 그것 안에 붙들어놓는가? 저자는 욕망 때문에 글이 쓰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꼭 책으로만 쓰이는 게 아니라 흔적, 기입, 회고, 아카이브,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를 연결하는 모든 것으로 쓰이는 것이다. 욕망에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할 때 우리는 눈에 띄지 않게 죽어간다. 이젠 아무것도 끌어당겨지지 않고, 의미는 사라지고, 일을 기계적으로 하게 된다. 사랑하는 얼굴들마저 구원이 되지 못하고 우리를 짓누른다.

불안마저 그 얼굴들에 서서히 전염된다. 우울증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렇게 탈진한 욕망이 도달하는 곳이 우리 분석가들의 반쯤 닫힌 방이다. 글 쓰는 이는 때때로 정확히 무엇이 쓰이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글이 자기를 앞서간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어둠 속을 나아간다. 때로는 오해 때문에 친구나 편집자의 부탁 때문에 간다.

제출해야 할 것들, 기사, 꿈 노트, 야생적 사유를 적어두는 메모장, 어쩌면 이보다 불가해한 일은 없다. 욕망은 정확히 그것에서 진정으로 위험을 무릅쓴다. 치료 과정에서 글쓰기라는 무기를 사용하는 일은 어렵고 불안하지만 흥미진진하다. 적어도 그 무기를 불러내는 일은 그러하다. 어떤 면에서 구어와, 주어지고 들리고 받아들여지는 말의 덧없음과 겨루어보는 위험을 감수하기 때문이다. 위험 예찬이라서 그런지 위험스럽게 어려운 얘기가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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