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PC 월드
플레이어 지음 / PAGE NOT FOUND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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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홍콩얘기를 들으니까 npc때문에 중국에 넘어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나라도 지금 거의 중국에 넘어갔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난 원래 정치에 무관심하고 책만 읽었는데 패권 전쟁이 여러 분야로 있었다. 그 얘기를 들으니까 이해는 많이 가지만 내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다.

저자 마치 플레이어는 일평생 누구보다 충실한 NPC로 살아왔다. 학교에 가라면 갔고, 군대면 가라면 갔다. 대학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같았다. 코드가 짜인 듯, 가라면 가고 까라면 까는 삶, 그러나 시스템은 업데이트도, 보완도 없었다. 마치 방치된 게임만의 고여 있는 NPC처럼 살았다.

그래서 저자는 저자를 직접 리부트했다. 이 책은 어떻게 시스템이 우리를 설계하고, 방치하는지에 대한 매뉴얼이다. 저자는 이제는 더 이상 조직당하지 않는다. 마치 플레이어처럼. 홍콩의 최근 10년은 법과 제도를 이용한 “자유의 범위”가 축소되는 과정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사실상 겉으로는 크게 바뀐 것이 없는데, 제도는 그대로여도 내용을 바꾸면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그 출발점은 2019년 정부가 추진한 범죄인 인도법 개정이었다. 1997년 영국으로부터 중국에 홍콩이 반환될 당시, 홍콩은 “일국양제”라는 한 날의 두 제도 원칙 아래에서 자유로운 법 “기본법”이라는 준헌법을 가졌는데, 이 준헌법을 통해 중국 본토 기관의 홍콩 영향력을 차단할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그리하여 반환 이후에도 홍콩은 영국식 보통법 체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판례법을 원칙으로 배심제, 독립적 법관 임명 제도를 유지했고, 중국 본토와는 다른 체계를 유지하며 사법적인 독립을 지켜냈다.

하지만 2019년에 추진된 범죄인 인도법 개정의 주된 내용은 법죄자를 중국 본토로 인도하는 길을 여는 조항이 핵심이었고, 시민들은 사법 자치와 표현의 자유가 무너질 위험을 직감했다. 피의자가 중국본토로 인도하는 길을 여는 조항이 핵심이었다.



홍콩인들은 시위에 참여하며 목소리를 냈다. 시위는 “완전 철회와 독립조사, 체포자 사면, 폭도 규정 철회, 보통선거”로 요약된 다섯 가지 요구로 정리됐다. 정부는 일시 중단이라고 말했지만 철회가 아니었다. 같은 달 말부터 경찰력과 충돌이 빈번해졌고, 이에 7월 21일에는“원량역 습격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흰옷을 입은 친 정부 집단이 원량역을 습격해 시위에 참가한 시민과 기자를 무차별 폭행했다. 하지만 신고가 쇄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 측의 대응은 늦었다. 8월 31일 태자역에서는 진압 과정의 과도한 폭력과 더불어 부상자, 실종자에 대한 큰 의혹을 남겼다.

NPC에서 벗어나는 일은 어렵다. 이유는 단순하다. 벗어나는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가 설계한 언어와 구조 속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레임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사고는 끊임없이 편리함을 추구한다. 편리함은 늘 대가를 요구한다. 대가는 시간과 주의,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거리감이다.

사회는 빠른 결론은 좋아한다. “좋아요”는 판단의 대체재가 되고, “요약”은 경험의 대체재가 된다. 그러나 그 속도 속에서 우리는 점점 스스로의 언어를 잃는다. 언어를 잃은 인간은 생각하지 못한다.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동 모드로 살게 된다. 자동적으로 사는 인간은 예측 가능하다. 예측 가능한 인간은 통제하기 쉽다. 통제하기 쉬운 집단은 언제나 가잘 잘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그 완벽함으로 사람을 마비시킨다. 그 안에서 진짜 탈출은 ‘속도’를 거부하는 것, 그리고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을 설명하면서 “사유하지 않음의 평범함”을 말했다. 오늘의 자동화는 바로 그 평범함의 기술적 버전이다. 생각 대신 반응하고, 이해 대신 공유하며, 판단 대신 감정을 수입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 많은 데이터를 보고도 더 적게 이해한다.



이 악순환 끊는 방법은 단순하다. 매일 아주 잠깐이라도 스스로의 문장을 써보는 일이다. 그 문장이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의 이론을 인용하지 않아도 된다. 단 한 문장이 완벽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어조로, 스스로의 어휘로, 스스로의 맥락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 문장 하나가 타인의 알고리즘이 아닌 자기 사고의 단서가 된다.

NPC처럼 보이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힘을 잃은 사람이다. 그들은 세상이 정한 박자에 맞춰 움직이지만, 왜 그 박자인지를 묻지 않는다. 반대라고 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그 또한 불확실성과 혼돈 속에 산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자신의 혼란을 의식한다. 이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주권이다. 확신 대신 의심을, 안정 대신 관찰을 택하는 태도, 그 태도가 우리를 다시 인간으로 만든다. NPC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세상의 속도에서 벗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속도를 인식한 채로 자기 리듬을 세우는 일이다. 감정을 휘두를 때, 자극이 몰려올 때, 우리는 잠시 그 리듬을 의심해야 한다.

이건 내가 느끼는 분노인가, 아니면 설계된 분노인가, 이건 내가 선택한 루틴인가, 아니면 추천된 루틴인가, 이건 내가 찍은 사진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찍으라고 한 순간인가, 이 질문을 버리지 않는 한 완전히 자동은 불가능하다. 시스템은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적어도 자신은 그 안에서 ‘다르게 움직이는 점’으로 남을 수 있다. NPC에서 벗어나려는 일은 완결형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평생의 반복이다. 세상이 던지는 언어와 감정, 구조와 루틴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벗겨 세우는 끊임없는 조정이다. 오늘의 결심이 내일의 자동으로 변하지 않도록, 매일 다른 각도로 질문을 갱신하는 일이다. 완벽한 자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유의 흔적은 남는다. 그 흔적이 많아질수록 사회의 루프는 느려진다. 루프가 느려지면 틈이 생긴다. 그 틈에서 새로운 언어가 태어난다.

그래서 진짜 탈출은 지도 위에 없다. 오직 고민의 지속 속에만 있다. 내가 세상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지, 그 질문 하나를 매일 새롭게 던지는 것 그게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남는 유일한 방식이다. 난 오랫동안 국제정세와 패권전쟁에 대한 책을 읽고 읽고를 계속 했다. 뉴스도 외국 뉴스를 보는데 우리나라 뉴스와 왜 이렇게 다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뉴스가 왜곡되거나 가짜뉴스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건 중국투자를 받아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중국이 전 세계를 경제, 선거, 정치, 엔터테인먼트, 에너지, 사이버로 개입한다는 얘기를 책에서 읽었다. 중국이 미국, 아프리카, 캐나다, 이태리, 프랑스, 캄보디아, 동남아, 호주에 개입한다고 했다. 책을 읽으면서 게속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을 해서 알아 보니까 중국옆에 있는 우리나라도 안전하지 않았다.

중국이 우리나라에 많이 개입하고 있었고 홍콩의 초반과 많이 닮아서 언론이 제대로 뉴스를 내보내지 않았고 공산화를 시키는 입법들을 통과시키려고 한다는 걸 알았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정치에 관심을 안 가지면 내가 사랑하는 나라가 공산화가 되는 걸 지켜봐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외국 뉴스를 계속 보고 책을 찾아보면서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로 계속 지키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을 한다. 그게 나에게는 npc에서 벗어나는 것인 것 같다. 계속 공부하고 책을 읽고 전 세계 정보를 검색하고 사유하고 의심하고 생각하는 것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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