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 이후의 중국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나라가 중국에 의해서 잠식 당하고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이 책을 읽고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언론이 중국의 투자로 전부 잠식 당하고 정치계가 중국에 의해 전부 잠식 당하고 자국민보다 중국인들이나 외국인들이 더 혜택이 많고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으로 우리나라도 홍콩이나 대만, 위그루족처럼 되고 있다고 해서 법을 찾아 보니까 법안이 진짜 외국인들에게 더 우세한 법이라서 대한민국 국민이나 대한민국이 걱정이 많이 된다. 이 책을 보고 대비를 하고 싶다.

저자 프랑크 디쾨터는 독보적인 중국 현대사 연구이자, 1961년 네델란드에서 태어났다. 스위스 제네바 대학교를 역사학과 러시아어 복수전공으로 졸업했다. 이후 2년간의 중국체류기간을 거쳐 영국런던으로 이주했고, 1990년 런던대학교 SOAS(동양 아프리카연구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영국 학술원 박사 후 선임 연구원이자 웰컴 연구원 자격으로 SOAS에 머무르다 2002년에 중국 현대사 교수로서 학과장에 올랐다. 2006년부터 홍공대학교 인문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후버 연구소 선임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디쾨터가 종국을 주제로 펴낸 10여 권의 저서들은 현대 중국을 주제로 바라보는 역사들의 시각을 바꿔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인민 3부작⟩은 비교적 최근에서야 일반에 공개된 중국 공산당 기록보관소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마오쩌둥의 공산주의가 중국 인민들의 삶에 끼친 영향을 현장감 있게 그려 낸다. 그중 『해방의 비극』은 2014년 오웰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먼저 출간된 『마오의 대기근』은 2011년 영국에서 논픽션 부문중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알려진 새뮤얼 존슨상을 수상했다.

그 후 『문화 대혁명』이 출간되어 ⟨인민3부작⟩이 완성되었다. 이번 『마오 이후의 중국』은 중화 인민 공화국이 어떻게 초강대국으로 도약하게 되었는지를 면밀하게 탐구하는 책으로, 중국현대사를 가장 통찰력 있게 분석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1985년 여름에 스위스 제네바 대학교 학생이었던 저자는 중국어 공부를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 외교부는 베이징에서 가까운 인구 5백만의 거대 해안 도시 텐진에 소재한 난카이 대학교에 배정했다. 비행기를 타고 홍콩까지 간 다음에 그곳에서 국경을 넘었고, 기차를 타고 일주일 동안 북쪽으로 이동했다. 여정 중에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저자의 성을 기억하지 못했는지 나중에 ⟨중국 텐진에 사는 네덜란드인 프랑크 앞⟩이라고 써서 엽서를 보내왔다. 그럼에도 엽서는 아무런 문제없이 저자에게 배달되었다. 도시에 거주하는 외국인이라고는 일곱 명의 네덜란드인을 포함해 고작 여든 명이 전부였고 그 일곱 명의 네덜란드인 가운데 프랑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주요 도시가 그렇듯이 텐진에도 1950년대에 소련 전문가들의 도움 받아 건설된 도로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교통 정체는 없었다. 10억이 넘는 인구에도 불구하고 자가용은 2만 대가 채 되지 않았다. 대신에 양쪽 도로와 트럭, 가끔씩 보이는 자가용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 해가 지기 전에 퇴근했기 때문에 도시는 밤 9시만 되어도 적막에 휩싸였다. 때때로 희미한 가로등 불에 의지한 채 자전거를 타고 6차선 도로를 혼자 달리고는 했다. 몇 년 전 중화인민 공화국은 덩샤오핑이 1978년 12월에 도입한 경제 개혁 프로그램⟨개혁 개방⟩40주년을 공식적으로 기념했다.

저자가 35년 전에 기숙사에 들어갔을 때 그것의 외국인이 베이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추론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중국 관찰자가 되었다. 그리고 크램린 관찰자들의 기술을 차용했다. 즉 그들은 신뢰할 만한 정보가 부족했고 그래서 베이징 자금성 근처에서 중국 공산당의 핵심 기관들이 모여 있는 중난하이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텐안먼 광장에서 진행된 열병식에서 각 지도자들이 사열대의 어디에 자리했는지, 『인민일보』가 뉴스기사를 어떻게 배치했는지, 라디오에서 특정 문구가 얼마나 자주 반복되는지와 같은 지극히 추상적인 징후들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총리 본인이 총전력 소비량과 연계해 경제 성장률을 추적 관찰하는 데 사용하는 지수가 있다. 그럼에도 저자가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은 여전하다. 중국 관찰자 제임스 파머가 최근에 말했듯이 ⟨중국 정부를 포함해 그 누구도 중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모든 정보가 신뢰할 수 없거나 불완전하거나 왜곡되어 있다. 훌륭한 연구자들은 누구나 소크라테스의 역설을 염두에 둔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적어도 중국에 관한 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중국의 지방 정부들은 경제 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막대한 부채를 쌓아 가고 있었다. 수십 개의 도시들이 중국의 유명한 경제 기적을 보여 주는 도시로 거듭나고자 대규모 사회 기반 시설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다수의 사치스러운 관공서를 갖춘 완전히 새로운 금융 지구가 포함된 총 1천2백억 달러 규모의 종합 계획을 추진했다.

중국 전역에는 이런 지방 정부의 공식 대차 대조표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중국 전역에는 이런 지방 정부 금융 투자 기관이 1만개 넘게 존재했다. 한 추산에 따르면 시진핑이 2012년 11월 15일에 후진타오로부터 공식적으로 인계받기 이전부터 도지방 정부의 총부채는 3조 달러에 육박했는데, 이는 중국의 군자금인 외한 보유고와 맞먹는 금액이었다.

이 같은 방식은 2010년에 지방 정부의 수입 가운데 약 절반이 토지 양도 수수료와 토지 임대료에서 나왔을 정도로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자칫하여 부동산 시장이 폭락하면 지방 정부가 막대한 부채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중앙 정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중앙 정부가 주택 시장의 인플레이션도 억제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쩌면 지방 정부로부터 보다 많은 악성 부채를 떠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금이 지방 정부와 거대 국영 기업으로 흘러가면서 국영 은행은 실물 경제 특히 보다 작은 기업들의 수요를 충족하기에 현금이 너무 부족했다.

신용도 부족해서 신규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다. 결국 삼각 부채와 같은 익숙한 문제들이 2012년에 재등장했고 약속 어음이 다시 보편화되었다. 약속 어음은 차라리 사소한 문제에 가까웠다. 경제가 둔화되고 기업 수익이 감소했음에도 주식 시장은 급등했다.

오랫동안 주식 거래소는 중국 경제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했으며 주식의 대부분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구매할 수 없도록 신중하게 차단되었다. 중국은 망할 것 같으면서도 공산당만 강력해서 안 망하는 것 같다. 윤리도덕 기준도 낮고 공산주의인데도 돈밖에 모르고 공산당이 신인 나라라고 한다. 책을 읽을수록 가까이 하면 안 될 나라처럼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