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문서는 히브리어로 쓰여 있었는데, 그 땅이 그리스의 세력 밑에 놓인 기원전 3~1세기경에 공용어였던 그리스어로 쓰인 역본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리스어 역본에는 히브리어 역본에는 포함되지 않은 문서도 있어서, 어디까지를 정전으로 인정할지 두고 문제가 불거졌다. 기원전 90년경 예루살렘 서부 도시 야브네(얌니아)에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논의한 결과, 히브리어로 쓴 39권을 정전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그즈음에 이미 넓은 지역에 퍼져 포교 활동을 하던 기독교는 그리스어 역본을 사용했다.
그래서 그 시기에 정전으로 인정되지 않던 문서도 속편(아포크리파, 외경) 으로 불리며 정전에 준하는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다윗과 솔로몬이 구축한 영광의 이스라엘 왕국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한 예언자였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북녘에서 재앙이 쏟아져 내리리라.” 이후 아시리아는 분리 독립한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 당하지만 그 위협이 유다 왕국에도 미치게 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비극에 휩싸이게 한 이유는 백성들이 진정한 신앙을 잃었기 때문이고, 그것을 깨달게 하기 위해 ‘나의 종 바빌로니이의 왕 느부갓네살’을 보낼 것이라고 예레미야에게 말했다. 그리고 경고는 현실이 되고 예루살렘은 침략을 받아 장로와 제사장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끌려갔다. 그러한 사태가 벌어져도 사람들을 낙관적인 거짓 예언에 매달리려고 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모든 집을 불태워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백성들은 분노하여 예레미야를 체포해서 죽이려고 하지만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침략당하고 왕궁도 파괴되어버렸다. 왕자와 귀족들은 살해되었고 왕과 백성들은 바빌로니아 수도 바빌론으로 연행되었다. 『신약성경』또는 기독교의 시작이 예수라는 놀라운 ‘인물’과 사람들의 만남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 가르침, 삶과, 죽음, 부활을 알았던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하는까?” (마태복음8:27)라고 생각했다. 그 감동을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후세에 남긴 예수와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하거나 편지로 쓴 것이 『신약 성경』 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예레미야의 예언에 있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계약(예레미야 31:31)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 기록을 『신약성경』이라고 불렀다. 『신약성경』은 히브리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처음에 쓴 글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같은 바울의 편지로, 50년 정도의 것으로 여겨진다. 복음서 중에서 마르코의 복음서(마가복음)가 가장 오래되었고, 요한의 복음서(요한복음)가 가장 마지막에 성립되었다고 본다. 또한 사도행전은 원래 룩기의 복음서(누가복음)중 일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