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 진정한 복을 배우다 - 역설의 진리, 팔복으로의 초대 예수께 배우다
김건우 지음 / 샘솟는기쁨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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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복은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조금 다른 것 같다. 난 하나님한테 엄청나게 축복해달라는 기도를 드린 적이 있다. 하나님의 응답은 만나의 축복만 주시고 더 있다가 엄청난 축복을 하신다고 했다. 그 뒤로 꼭 필요한 것만 해결되는 걸 보고 하나님은 대단하시고 정확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의미를 잘 알고 거기에 맞게 살고 싶다. 성경이 나의 모든 것이고 나의 지표이니까말이다.

이번에 국가적인 위기에서 대형교회가 침묵하고 거짓선지자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속에서도 진정한 기독교인들이 또한 많고 난 성경말씀대로 따르고 행동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나님의 복에 대해서도 깊이 잘 알고 싶다. 내가 공부를 하고 책을 읽는 이유도 전부 하나님때문이다. 저자 김건우는 서울대(B,A) 총신신학대학원(M,Div) 숭실대학교 기독교학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옥한흠 목사가 설립한 국제제자훈련원 대표 총무로 섬기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한 목회자와 평신도 훈련에 오랜 시간 헌신했다.

저자는 목회자와 목회자 가정을 치유하고 돌보는 일, 목회컨설팅과 티칭사역으로 동역자들과 한국 교회를 섬기고 있다. 시카고 헤브론교회를 담임하였으며, 좋은 씨앗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예수께 기도를 배우다』『예수께 진정한 복음을 배우다』 가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기신 산상수훈(마5:1-7:29)의 문을 열면, 가장 먼저 ‘팔복’이라 불리는 말씀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중요한 가르침, 산상수훈에서 가장 먼저 ‘복’이 있나니 이 원리들은 그 나라 백성 모두의 행동을 주관하는 도덕적, 윤리적, 영적 지침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5장 3-11절에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무려 아홉 번이나 반복된다. 분명 기복 신앙을 멀리해야 한다고 자주 들었는데, 정작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주어진 도덕적, 윤리적, 영적 지침인 산상수훈이 온통 ‘복’이라는 단어가 가득한 가르침으로 그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고 은혜 베풀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정한 복을 말씀하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앉으셨고,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복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복은 모든 인간의 관심사이다. 하지만 곧 실망하거나 경악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복이라고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저주라고 생각하던 것들을 예수님은 ‘복’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거듭났다고 하는 그리스도인 상당수가 여전히 복에 대한 기준은 세상적이다. 복에 대한 가치관과 기준은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이후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질투하고 시기한다. 이렇듯 복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인생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향하게 한다. 결코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다. 기복신앙은 복을 바라는 신앙 행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기복신앙이 추구하는 복이란 현세에서 이득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재물을 많이 얻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잘되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 기복신앙은 기독교가 한국 땅에 자리 잡고 부흥하는 데 일조했다. 동시에 교회를 타락시키고 냄새나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신앙이 상당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세계관으로 남게 된 데는 영적 지도자들의 잘못이 적지 않다. 세상의 복과 하나님의 복의 차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잘못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 사람들을 예수 제자로 세우라는 주님의 명령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잘못이다.

부유함이 복이라면, 부자 되는 것이 복된 인생의 결정적인 기준이라면, 그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전력을 다해야한다. 부자가 아니라면 실패한 인생, 박복한 인생이라는 생각으로 기죽어 살다가 죽게 될 것이다. 가진 사람들을 원망하고 질투하며, 부정적이고 삐뚤어진 시선으로 살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부를 가질 수는 없다. 얼마나 소유해야 복을 받은 자의 반열에 오를지 그 기준도 모호하다. 물질적인 부유함이 복의 유일한 기준이라면 대부분 박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을 얼마나 소유했는지가 복의 기준이라면 누구나 복된 자가 될 수는 없었다.

초기 그리스도인 중 다수는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였다. 사회에서 천대받고 인권조차 없던 그들이었으나 예수님은 그들을 품고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듣고 거듭났으며 천국 소망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노예로 살아야 했고, 때로는 악한 주인 아래 핍박당해야 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더 큰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박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난하고 천한 신분의 그들은 복 있는 자가 될 수 없는 걸까?

어떤 기독교인은 명절에 가족이 모이면 예수 믿는다면서 너무 가난해서 가족 볼 면목이 없었다. 돈도 잘 벌어야 예수님을 자신 있게 증거할 수 있을텐데, 그러지 못해 기가 죽는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안타깝게도 복에 대한 우리 생각은 오염되고 어그러져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당시 유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축복하신다는 증거가 물질의 번영이나 건강, 형통 같은 것이라 배우고 믿어 왔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씀한다.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받으라고 말씀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우리의 내면세계에 던지는 폭탄과 같다. 그중에서 ‘팔복’은 우리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말씀이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우리 본성에 어긋나고,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말하는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불행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예수님의 성품을 닮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불행한 일이다. 물론 하늘의 복을 택한다고 해서 반드시 세상의 복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치신 예수님,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했다. 우는 자, 슬퍼하는 자, 눈물을 흘리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산 넘어 산이라는 느낌이 든다. ‘애통’으로 번역된 헬라어 펜데오는 비통하다, 울부짖다 등의 의미를 가졌으며 극심한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적당한 슬픔이나 실컷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고 개운해지는 그런 슬픔이 아니다. 극심한 슬픔과 가슴 아픈 슬픔이다.

야곱은 아들 요셉이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애통했다. 그가 노년에 얻은 사랑하는 아들이다. 일찍 떠나 버린 아내 라헬을 기억나게 하는 아들을 잃은 것이다. 라헬이 막내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로 죽었기에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아들, 그래서 야곱이 생명처럼 여기던 아들을 잃었다. 아버지 야곱은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었다. 자녀의 위로를 거절하고, 자신도 “스올로 내려가” 아들을 따라 가겠다며 울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애통하는 자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온유와 겸손이 한 몸처럼 붙어 있는 구절들을 볼 수 있다. 실제로도 온유를 뜻하는 헬라어 프라우스는 ‘겸손한’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교만한 사람이 온유한 것을 본적이 있을까? 교만은 자기 의가 있는 마음,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온유할 수 있을까? 교만과 온유는 절대 함께할 수 없다. 온유와 겸손은 언제나 함께할 수 있다. 한 몸과 같다. 겸손은 온유의 뿌리이며, 온유는 겸손이라는 옷을 입고 있다. 그 진리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온유와 겸손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은 온유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깨뜨린다. 온유한 사람이 나약하다는 생각은 우리가 온유함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편견이 오해이다. 그러나 나약한 사람은 겸손할 수 없다. 온유함은 나약함이 아니라 성숙함이다. 성숙한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고, 그래서 온유할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다. 성숙한 사람이다. 이 책을 읽어보니까 기독교에서의 복은 예수님 그 자체를 닮아가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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