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를 만나다 - 구토 나는 세상, 혐오의 시대
백숭기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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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르트르에 대한 얘기는 그의 철학과 연애에 대해서 많이 들어서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 사르트르하면 게약 연애가 바로 딱 생각이 난다. 저자 백승기는 서울대에서 박사 학의를 받았다. 출판사 단행본 편집장, 신문사 편집장, 연구 집단 단장 등을 거쳐 전문 작가로 활동하며 현재 여러 대학에서 철학과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간 문사철로 묶인 여러 주제로 다종다양한 집필과 강연을 통해 책과 독자를 연결하고, 때로는 저자를 대중 앞에 소환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왔다.

에세이스트와 저널리스트의 경계에서 새로운 저자들을 만나고 사귀고 대화하는 일을 사랑하며, 문장 속에 사라져간 작가와 이야기꾼을 도반 삼아 다행히 지금까지 죽지 않고 글밥을 먹으며 지낸다. 글 속에 인생이 있고 책 속에 답이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붙들며 별내 작업실에서 오늘도 열심히 자판을 두들긴다. 저자는 몇권의 저서와 몇권의 역서가 있다. ‘데칸쇼’는 데카르트와 칸트, 쇼펜하우어를 지칭하는 줄임말이다. 자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통기타를 친다고 말하면 주변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너 로망스 칠 줄 알아?” 라는 질문을 받았다. 평소 책 좀 읽었다 하면 대번 “너 데칸쇼는 읽어봤어?”라는 질문이 날아왔다.

최소한 우리나라에서 ‘철학’하면 데카르트와 칸트, 쇼펜하우어는 기본으로 깔고 간다는 의식이 작동한 셈이다. 그만큼 세 철학자는 한국인에게 서양 철학의 전형이자 대표격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가 쇼펜하우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게 허락된 최고의 삶이란 기껏해야 목표를 향해 평생 노력하고, 성취를 했더라도 만족감이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삶이다.” 사회 초년생이 쇼펜하우어의 이 말을 듣고 위로받을 수 있을까? “인생이 고통이다.” “친구를 적게 사귀고 되도록 먼저 손절하라.”사랑에 속고 사람에 속아 고통 가운데 아파하는 이들이 쇼펜하우어의 이런 인생 조언에서 과연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다가 도리어 외로워지는 건 세상이 꼭 그의 조언처럼 흘러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혐오의 시대, 사르트르는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으로서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런 예고 없이 ‘내던져진 존재’라고 고발한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사전 허락을 받았다거나 동의를 구하는 말을 들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때, 그 삶의 편린을 ‘자유’라는 씨실과 ‘선택’이라는 날실로 엮어낼 때, 비로소 자신이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사르트르는 공허한 인생의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 채워나가는 거라고 우리에게 조언했다.



사르트르하면 소설 『구토』가 떠오른다. 저자는 사르트르를 『구토』로 처음 만났다. 모든 소설이 그렇겠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로캉탱은 어쩌면 작가 사르트르의 분신일지 모른다. 나아가 로캉탱은 지금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일지 모른다. 이유와 명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갑자기 로캉탱처럼 원인 모를 구토를 하고 싶은지 모른다. 구토는 생각만해도 속이 안 좋아지는 것 같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부조리한 현실을 보고 구토를 느끼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이 이렇게 엉망인데 속이 뒤집히고 쓴 물이 올라오지 않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은 무의미에 쌓여 스스로 자기 살해의 전형을 짊어진 오이디푸스가 되지 말고, 숨 가쁘게 삶의 여백을 채워가며 운명을 거스르는 프로메테우스가 되라고 말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철학을 소개하려는 의도는 띠고 있지만, 사르트르의 모든 사상을 다 설명하지는 않는다. 철학과 문학은 모두 담을 수 없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철학에 담긴 고갱이는 충실하게 담아보려고 노력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 받았다” 우린 얼마나 자유롭고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이 구호는 훗날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모든 자유주의 국가의 이념이자 헌법 정신이 되었다. 프랑스가 선물했다는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의 상징이자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랜드마크가 되었고, ‘모든 땅,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공표하라’는 글귀가 아로 새겨진 자유의 종은 미국을 넘어 자유와 해방을 꿈꾸는 세계 만국 만인의 상징이 되었다.

인류 근대사가 이토록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갈구했던 시간으로 점철된 것은 인간이 그만큼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삶에서 자유와 평등, 박애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다. 대낮에 등불을 손에 쥐고 ‘한 사람’을 찾았다는 주정뱅이 디오니소스처럼. 젊은 세대는 잘 모르는 노래가 있다. 시인과 촌장의 리더 하덕규가 작사 작곡한 노래 「자유」라는 노래가 있다. “껍질 속에서 살았네, 네 어린 영혼, 껍질이 난지 내가 껍질인지도 모르고,” 헤르만 헤세 『데미안』을 인용한 것 같은 노래이다.

저자가 노래를 듣다 보니 놀랍게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를 만난 뒤 나는 알았네, 내가 애타게 찾던 게 뭔지, 그를 만난 뒤 나는 알았네, 내가 목마르게 찾았던 자유” 이어 후렴으로 ‘자유’를 열두 번 외치며 노래는 끝난다. 자유라는 ‘선고’를 받았으니까, ‘그’는 신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일까,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익명의 제삼자일까? 진정 자유를 얻으려면 자신은 누구를 찾고 만나야 할까?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에이리언’프리퀼 시리즈의 사막을 알리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 커버넌트」에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안드로이드 ‘데이비드’ 가 나온다.

데이비드는 그때까지 인류가 쌓아 올린 모든 지식을 습득한 상태였고, 가공할 학습 능력 덕분에 앞으로도 새로운 지식을 무한히 빨아들일 수 있다. 영화는 안드로이드를 직접 만든 창조주 피터 웨이랜드 회장과 눈 뜬지 얼마되지 않은 피조물 데이비드의 대화로 시작한다. 웨이랜드 회장은 뿌듯한 눈으로 데이비드를 바라보며, “너는 나의 피조물 이다”라고 선언한다. 데이비드는 방 한 가운데 서 있는 , 미켈란젤로가 1504년 완성한 회백색 다비드 조각상을 보고는 자기 이름을 ‘데이비드’로 짓는 순발력을 보여준다.

그는 대화부터 걸음걸이, 피아노연주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 이른 바 신인류의 탄생이다. 저자에게 개인적으로 충격을 주었던 부분은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어진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 사이의 사뭇 진지하고 철학적인 대화였다. ‘아들’ 데이비드는 ‘아비’ 웨이렌드에게 정색하며 묻는다. “만약 당신이 나를 창조 했다면, 당신은 누가 창조했나요?”의외로 훅 들어온 질문에 마땅한 답변이 궁색했던 웨이랜드는 ‘내 생각에 인간은 우연히 존재하지 않으며 분명 숨은 기원이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 문제를 나와 함께 탐색해보자.’고 말끝을 얼버무린다.

인간의 감질나고 옹색한 답변에 만족하지 못한 데이비드는 되묻는다. “나를 만든 창조주는 당신이데, 당신은 여전히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왜 당신은 줄곧 안 죽을까?” 인간의 존재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1970년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는 『우연과 필연』에서 생명의 탄생과 진화를 우연과 필연의 합작으로 설명했다는데, 과연 사실일까? 세상에 우연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다른 두 개의 해바라기가 꽂혀 있는 화병에서 반 고흐를 떠올렸다. 갑자기 고흐가 생전에 곁에 두고 즐겨 마셨다는 압생트의 쑥향이 코끝까지 느껴졌다. 후각은 시각보다 판타지에 더 가깝다. 갑자기 눈앞 광경이 확 바뀌며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이 펼쳐졌다. 청년은 철학적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죽음이 두려운 그대에게 “우리는 자유를 그만둘 자유가 없다”

아버지는 당뇨로 먼저 다리를 잃더니 3년 전 멀쩡하던 눈도 보이지 않는 사태에 직면하고서야 겨우 술을 끓었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호인이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주당이었다.

대체 어디에다 그렇게 대폿잔을 기울일 친구들을 잘도 숨겨두었는지 하루가 멀다고 술친구를 만났고, 매일 밤이면 거나하게 술에 만취한 모습으로 비틀비틀 집에 기어들어 오셨다. 아버지도 생전에 할아버지가 고주망태로 술독에 빠져 사시다가 칠월 칠석 불어난 물이 들어찬 논두렁에 머리를 박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부전자전이라고 하던가, 술 좀 작작마시라는 어머니의 애원에도 아버지는 자고로 강호무림 영웅호걸치고 술과 여자 싫다는 인간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늘어놓았다.

아버지는 영웅도 호걸도 아닌, 그냥 술만 좋아하신 건데도 말이다. 막 군대에서 전역하고 이틀 뒤 찾아간 고향 집에서 저자는 병석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아버지 얼굴은 시뻘겋다 못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올챙이배처럼 복수가 가득 찼고, 여러 가지 합병증이 아버지의 육신과 구명을 서서히 집어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딱 일주일, 울고불고할 새도 없이 그렇게 손도 써보지 못하고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생전에 하도 어머니 속을 썩여서 저자는 아버지의 주검이 고집스럽게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자 이유 모를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주책없는 눈물이었다. 그건 어쩌면 미필적 고의에 따른 살인일지 모른다. 저자가 술과 공모해 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어쩌면 그날 납골당은 부친살해의 역사적 범행 현장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담배를 언젠가는 끓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흡연이라는 게 입을 크게 벌리고 바퀴벌레 잡는 에프킬라를 1분간 분사하는 것과 같다는 모 금연 강사의 협박을 들었을 때 1도 타격받지 않았던 청년은 ‘흡연은 파괴적인 소유’라는 사르트르의 한마디에 온 몸이 고드름처럼 와그작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니코틴을 상습적으로 즐기지만 그렇다고 담배와 하나가 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벽시계의 노닥거리는 초침을 보면 인간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과 불가항력적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궁금해져서 이 책을 끝까지 읽는건지도 모른다. 이 책은 사르트르라는 철학자를 만나서 왠지 재미없을거라는 편견을 가질 수 있지만 의외로 아주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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