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가르침과 사건들의 연관성을 짚어보면서 이야기의 기본 뼈대를 세워간다. 성경을 관통하는 전체 의미를 살피면서 그 속에 담긴 정신과 의미를 파악하여 총체적으로 보는 방법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공부할 때 한 본문, 한 단락, 한 장 나아가 크게는 한권 정도로 나누어 보는 경향이 있다. 성경은 한 분의 저자가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 권의 책이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 말씀을 담은 한 권의 책으로 전체 맥락 가운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의 전반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총체성이라는 맥락에서 공부해야 한다. 팀머의 선교사서 경험은 그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성경은 아직 ‘내 백성’ 이 되지 않은 사람들과 하나님 나라가 확립되지 못한 땅 그리고 그 땅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언약이자 왕의 통치로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선별적으로 성경을 읽는다. 어떤 책은 즐겨 읽고 어떤 책은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입술로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성경 일부에만 관심을 제한하고 나머지는 무시한다.
그 결과는 매우 가치 있는 대부분 본문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성경 본문의 깊은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성경 본문의 깊은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 이어질 전체적인 맥락을 따로 분리하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성경을 묶음집이 아닌 하나의 이야기를 담은 한 권의 책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창세기 1장을 신화로 보는 것이 유행이다. 하지만 창세기는 신화가 아니다. 신화란 신에 대한 사유나 표상이 반영된 이야기다. 그러나 창세기는 신화와는 정반대다.
옛사람들의 사유가 만들어낸 신화를 거부하고 반박하며 파괴한다. 창세기 1장은 이방종교들의 핵심을 망치로 깨부수고 있다. 하나님은 실제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내 앞에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한 너의 주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다른 신은 없기 때문이다. 이집트 사람, 바벨론 사람, 그리고 페르시아 사람들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결정하는 신으로 태양, 달, 별 등을 신으로 섬겼다. 또 가나안 민족은 출산과 번식이라는 자연적 과정을 거룩하다고 믿었다.
창세기 1장의 주장은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이 신이라고 믿는 것들은 결코 신이 아니다. 그저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른 피조물일 뿐이다. 창조주라는 범주의 신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있으며, 다른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반복적으로 주변의 정치적 강대국들이 믿는 신들의 공격을 받았다. 창세기 1장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피조물을 신적 위치까지 높이고 숭배하는 유혹에 대해 대적하라고 명령한다. 태초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마지막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한 성전은 타락 이후에야 필요했다.
태초에 창조를 성전으로 묘사하고 있는 창세기 1장과 새 창조를 성전이 없는 거룩한 성으로 비유하는 요한 계시록 21장 사이에서 잃어버린 피조물을 인간의 역사 안으로 침투하시는 드라마가 펼쳐진다. 창조는 단지 태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존재하도록 하셨다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창조는 지속적인 혼돈의 위협에 대항해서 하나님이 계속 창조를 지탱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의 영원하신 뜻과 섭리로 천지의 모든 것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셨을 때 공허한 흑암 속에서 세상을 빚어내는 일을 시작하셨다. 밤은 지금의 창조 가운데 일부로 남게 된 흑암의 흔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매일 밤 피조물의 윤곽은 형태 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매일의, 아침은 일종의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밤은 이 세상에 혼돈의 어둠 같은 것을 다시 가져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