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두 스파이가 걸어온 인생 역전을 보고 들은 그대로, 더하거나 빼거나하지 않고, 오롯이 옮기려 노력했다. 한 사람의 격정적 발자취와 남북 대결 역사가 호흡하고 있었고, 우리시대에 던지는 교훈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책은 중앙일보의 디지털 유료 구독 플랫폼인 더중앙 플러스에 ‘남북 스파이 전쟁 탐구’ 란 제목으로 게재됐던 기사를 바탕으로 엮었다. 저자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저자가 취재한 더 많은 숨겨진 스토리들을 추가로 전하고자 한다. 스파이 전쟁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새로운 뉴스의 창이 되길 희망한다.
국가안보법상 불고지죄가 대한민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남파간첩 김동식이 촉발했다. 김동식이 포섭을 시도했던 운동권 출신 ‘거물’ 들이 불고지죄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북에서 온 노동당 연락대표”라며 간첩 신분을 밝혔는데도 그와의 첩촉을 당국에 신고 하지 않은 혐의로 줄줄이 검거되고 사법처리 위기에 몰렸다. 이 사건이 터지기 두 달여 전 김동식은 남한에 두 번째로 침투했다. 당시 그는 80년대 대학생 시위와 집회를 주름잡던 30대의 386운동권을 직접 만나 “통일운동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그들 중에는 훗날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쟁쟁한 인물들이 포함됐다.
★이인영(고려대총학생회장•전대협 1기 의장)
★허인회(고려대 총학생회장)
★우상호(연세대 총학생회장)
★함운경(서울대 삼민투 위원장•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주도)
★황광우(서울대 경제학과•민중당 지구당위원장)
★정동년(전남대 복학생협의 의장•광주 전남연합의장)
운동권 인사들은 불고지죄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일부는 “정보기관의 프락치 또는 정신이상자로 생각해 신고하지않았다”고 해명했고, 어떤 이는 만남을 부인했다.
간첩 신고를 한 경우도 있었다. 유•무죄의 희비가 엇갈렸다. 북한 노동당 대남공작본부(사회문화부)는 왜 고대, 연대 총학생회장 출신을 찍어 포섭을 시도했을까. 김동식은 대남공작본부에선 전취 대상을 주체사상 신봉자, 학생 및 노동 운동 경력자, 품성이 좋은자 중에서 엄선했다고 했다. 특히 서울대나 고대, 연대 등 최고 명문대 학생회장 출신의 운동권 인물을 선호했다. 그들 중단 한명이라도 전취에 성공한다면 웬만한 다른 대학 학생회장 100명보다 파급효과가 크다고 판단했다.
군정보기관은 열악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아무도 보지 않지만 헌신과 사명감 때문에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왜냐하면 군인이기 때문이다. 국군기무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 수사관이 명령조로 말했다. 국가 안전기획부(안기부, 현 국정원) 로부터 신병을 인계받은 기무사는 정구왕 국군 정보사 중령에게 검은 눈가리개를 씌웠다. 1998년 12월 3일 대공 분실로 가는 차량 안이었다. 정구왕은 북한에서의 악몽을 떠올렸다. 눈가리개를 찬 채 불안에 떨며 어딘가로 끌려다니던 억류의 나날이 덮쳐왔다.
자신의 조국에 와서도 눈가리개를 차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너무도 서러웠다. 남과 북,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회색인이라고 주홍글씨가 새겨진 느낌이다. 정구왕은 평양을 탈출해 1998년 11월 10일 서울 김포공항에 귀환한 직후 안기부에 불려갔다. 10일간에 걸쳐 피랍 배경, 북한 억류 생활, 위장 탈출경위, 역용공작의 가능성과 이중스파이 여부를 추궁 당했다. 정구왕은 또 다른 시련과 고난을 직감했다. 기구한 인생으로 전략한 이유가 무엇인가. 공작원, 즉 스파이가 되지 않았다면 피할 수 있었던 운명의 장난이었다. 중국에서 펼쳤던 비밀 작전들이 주마등같이 그의 머릿속 스쳤다.
정구왕은 1987년 정보사 공작 장교가 된 그는 한때 잘나갔다. 한, 미 합동 공작부대 등 현장 실무와 안기부 첩보교육에 중국 어학연수까지 두루 거치며 유망한 공작관의 코스를 달렸다. 이후 중국 단동의 블랙 요원으로 발탁됐다. 공작 장교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기회였다. 그 업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뒤 명예로운 군인으로 남기를 꿈꿨다. 이런 북한 중국 간첩들이 우리나라의 중요직에 있다는 것도 보통 충격이 아니다. 그런데도 간첩으로 처리를 못한다니 그것도 나라를 너무 위험하게 하는 것 같다. 간첩은 중요한 자리에 있을 수 있어서 우선 그런 사람들을 조심히 관찰해야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