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의 개전 경위는 오랫동안 명료하지 않은 점이 많았지만, 현재까지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군이 소련과 중공의 지원과 묵인 아래 남한을 침공했다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북한군은 서울 점령으로 전쟁은 끝난 것으로 생각했지만, 후퇴하는 동안 전열을 가다듬은 한국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이러한 북한의 무력 침공을 미국은 국제법을 위반한 침략으로 규정하고,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소했다.
국제연합은 소련이 참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엔군의 파견을 결정했고, 맥아더 원수가 지휘하는 미군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한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되었다. 북한군은 7월 말에 낙동강 전선까지 육박했지만, 9월에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에 성공해 북한군의 병참선을 끓어버리고 반격에 나섰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한 후, 도리어 북한의 수도 평양을 점령한 데 이어서 중국과 북한의 국경인 압록강에 도달했다. 그러나 11월 이후, 이번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해방군이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됐다.
다음 해인 1951년 1월 인민해방군과 북한군은 다시 서울을 점령하지만, 3월에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재탈환하는 등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 이어졌다. 북한군과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압록강 이북의 중국 영내에서 전쟁 물자를 지원받아 전쟁을 계속했다. 이에 맥아더는 대만의 중화민국군을 동원해 중국 본토를 침공하고 원폭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중국, 소련과의 전면 전쟁을 두려워했던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전격적으로 해임되어 전장을 떠나고 말았다.
오늘날에는, 당시 국공내전을 막 끝낸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미국의 기습을 받았더라도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힘이 없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트루먼은 압록강 이북에 대한 공격과 포격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미군은 상대의 진영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되어 인민해방군의 병참을 끓지 못했고, 승패의 전망이 오리무중인 채로 전선 38도선 근처에서 교전을 주고받는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것은 미국이 시빌리언 컨트롤을 위해 문관 지휘자가 군의 작전에 개입하는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한국 전쟁은 제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미국에는 최초의 ‘승리 없는 전쟁’이 되었다. 1951년 7월 이후에 소련의 제안으로 스탈린 서기장이 사망함으로써 양 진영 사이에 점차 합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같은 해 7월에는 휴전이 성립되었다. 한편 한국 전쟁 중에 동아시아 지역의 미군 기지가 되었던 일본은 군수물자 보급을 통해 특수 경기를 맞게 된다.
또한 한반도에 동원된 미군의 빈자리를 메우는 형태로 경찰예비가 결성되어 이것이 나중에 자위대로 발전했다. 한국 전쟁 후 한국은 몇 차례의 정변의 교체를 거쳐서 모범적인 민주국가로 발전했지만, 국제법상으로는 휴전 상태 중이라서 여전히 징병제가 있다. 반면 북한은 한국 전쟁 후에 일당독재 체제가 강화되어 핵무기 개발 등으로 국제 사회에서 테러 지원국가로 지정되어 있다. 요컨대 한국 전쟁은 현재도 끝나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금은 하이브리드전쟁중이고 폭스뉴스에 반미 좌파진영과 중국 북한이 대한민국을 브네수엘라같은 공산국가로 만들려고 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정말 걱정이 많이 돼서 아빠랑 집회도 나가고 뭔가를 하려고 하지만 정말 힘이 없는 것 같다. 하나님한테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인간인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절실히 느끼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