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일기장 - 백문백답으로 읽는 인간 다산과 천주교에 얽힌 속내
정민 지음 / 김영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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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조선 최고의 천재인 정약용의 일기를 읽는 일은 매력적인 일 같다.정약용 할아버지가 윤두서인가인데 그의 초상화가 정말 유명하다고 했다. 나도 나의 집안에 대해서 들은 일은 고려 시대 최고의 천재가 있고 조선시대 과거급제를 4위를 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안은 박사나 장관, 서울대, 의사, 변호사, 판사들이 많이 나왔다. 내 친구가 공부보다는 운동을 좋아해서 친구 집안을 찾아보니까 고려시대때부터 무관이 많았다. 그래서 조상이나 DNA가 영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약용 자손들도 찾아보면 사회 곳곳에 중요한 인물들이 많을 것 같다. 정약용에 대한 책은 6권 정도 읽었는데 그의 인생은 많이 힘들었는데 그는 책에 많이 의지한 것 같다. 그의 일기장을 읽으면 그동안 읽은 그의 책과 접목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이해가 더해질 것 같다.

저자인 고전학자 정민 교수가 세밀한 독법으로 밝혀낸 다산 정약용의 일기의 숨은 진실은 “젊은 날의 다산이 감추었던 행간을 풀어내자 비로소 온전한 그의 시대가 보였다”. 다산은 신을 버렸지만 완전히 떠나지 못했고 임금을 사랑했지만 천주도 사랑했다. 다산에게는 천주교는 양날의 검이었다고 했다. 저자 정민은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선 지성사의 전 방위 분야를 탐사하여 문학 문헌에 담김 깊은 사유와 성찰을 우리 사회에 전해온 인문학자이자 고전학자이다.

저서로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살핀 《비슷한 것은 가짜》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 18세기 조선 지식인과 문헌을 파고든 《호서집》 《고전, 발견의 기쁨》 《열덟살 이덕무》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 《미쳐야 미친다》, 한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우리 한시 삼백수》 《한시 미학 삼책》등 이 있다. 청언소품집인 《점검》 《습정》 《조심》 《일침》, 조선후기 차 문화사 총정리환 《한국의 다서》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산문집 《체수 유병집- 글밭의 이삭줍기》 《사람을 읽고 책과 만다》, 어린이를 위한 한시 입문서《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등 다수의 책을 지었다.

조선에 서학 열풍을 불러온 천주교 수양서 《칠극》을 번역해 제25회 한국가톨릭 학술상 번역상을 받았고, 서학 연구의 연장선으로 초기 교회사를 집대성한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를 저술해 제회 롯데출판문화대상을 받았다. 《서양 선비, 우정을 논하다》 《역주 눌암 기략》 《역주 송담 유록》등 서학 관련 주요 문헌 역주해 펴냈다.오랜 시간 다산 정약용을 연구해 《파란》 《다산과 강진 용혈》 《다산 증언첩》 《삶을 바꾼 만남》 《다산 의 재발견》 《다산어록청산》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등 역사적 ⸱ 문화적 ⸱ 개인적 맥락에서 다산의 복잡한 면모를 되살려왔다.

《다산의 일기장》은 다산 천주교 신앙 문제에 관한 논란을 그가 직접 남긴 일기 〈금정일록〉 〈죽란일기〉 〈규영일기〉 〈함주 일록〉을 통해 정면을 돌파한다. 일기 4종은 1795년 주문모 신부 실포 사건에 연루된 다산이 충청도 굼정찰방으로 좌천된 후부터 1797년 황해도 곡산부사로 취임하기 직전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일기 본문과 《다산시문집》이 실린 편지 ⸱ 시문, 《정조실록》《일성록》 《승정원 일기》와 각종 상소문 및 척사 기록 등을 종합 검토함으로써 역사적 사실과 일기 속 정황을 교차 검증하고 일기의 이면에 숨은 다산의 의도와 속내를 실증적으로 파헤친다.

다산 자신의 목소리로 그의 시대를 더 깊이, 더 정직하게 들여다본다. 다산 자신의 목소리로 그의 시대를 더 깊이, 더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다산 4종 일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글쓴이의 내밀한 독백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다산은 일기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팩트만 제시한다. 다산의 의도는 팩트를 선별하고 배열하는 시선을 통해서만 포착한다. 하지만 막상 적어둔 사실이 별 맥락 없이 보이는 경우도 있어 혼란스럽다. 불쑥 끼어든 엉뚱한 에피소드도 그냥 쓴 것이 아니다.

다산이 일기 속에서 하고 있는 말과 하고 싶었던 말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액면 그대로 읽으면 의도에서 멀어지므로 세심한 독법이 요구된다. 일기에는 전체의 의도가 있고, 선택된 각각의 에소피드가 그 의도를 뒷받침한다. 등장하는 많은 인물도 그날 어쩌다 만난 사람이 아니라, 인용된 글로 다 뜻이 있다. 의도 안에 수렴될 수 있는 사람과 공간과 사건과 선별해 무심한 듯 기록했다. 하나하나는 따로 놀지만, 전체 구성으로 보면 의도된 배치다.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일일이 족보까지 찾아 뒤져보아야 그다음 연결 고리가 나온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은 얼핏 보아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름이 이름을 불러내어 그들끼리 네트워크를 만든다. 처음엔 하나도 안 보이다가, 나중에는 모를 것이 없게 된다. 그만큼 치밀하게 교직된 정치적인 텍스트가 바로 다산의 4종 일기다.

〈금정일록〉에서 다산이 예산까지 조문을 위해 찾아간 한강동의 한산이씨들은 주문모 신부를 밀고한 한영익과 얽혀 있고, 다산의 사촌과도 사돈으로 엮이면서, 자구 동심원을 그리며 관계망이 퍼져나간다. 서울서 금정으로 우연히 그때그때 도착한 편지나 시도 모두 나름의 행간이 있다. 그런데 일기를 쓴 이가 그것을 언표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죽란 일기〉에 뜬금없이 끼어든 김종수의 금강산 여행이나 경군조직에 관한 이야기가 뚱딴지같아 보여도 당시 일촉즉발 정국의 숨가쁜 수싸움이 깔려 있다. 일기 속의 다산은 때로 자기 모순적이고 부정합적이다. 읽는 동안 곳곳에서 그의 속내와 겉으로 한 말이 따로 논다는 생각을 했다. 일기에서 그가 어떤 말을 꺼낼 때 전에 그가 했던 다른 말이 목에 컥 걸린다. 초기 교회 10인의 가상직 신부 중 한 사람으로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킨 당사자였던 다산이 백성들을 상대로 천당⸱지옥의 허구성을 설파하고 제사를 권면하는 모습에서 특히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처럼 지성으로 천주학을 공부하던 정비반회 시절과, 제사와 관련된 문제가 출제되었다고 이승훈과 나란히 월과에 백지답안지를 제출하던 다산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는 그때 조금의 거리낌 없이 당당했을지 의문이 든다. 사실을 비틀어 자신을 변호하는 〈변방소〉의 몇 몇 대목도 눈에 거슬렸다. 천주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며 상관인 홍주 목사에게 으름장을 놓은 장면은 특히나 더 그랬다. 자기 속내를 감추고 이도명에게 훈계조로 충고하는 대목은 이도명의 입장이 되어 듣더라도 기분 나빴을 것 같다.

천주교와 관련된 다산의 말과 행동에는 모순적 양가감정이 병존한다. 그는 신앙을 버렸지만 완전히 떠나지 못했고, 임금을 사랑했지만 천주도 사랑했다. 해배 후 그가 지은 권철신, 이기환, 이기양, 오석충, 정약진 등 5인의 묘지명에 그들이 실제로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가짜 정보를 섞기도 했다. 다산의 모순을 넘어 그 시대의 모순이었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 거짓을 고했고, 한때 스스로도 그 거짓을 진실로 믿어버렸던 것 같다. 일종의 자기최면 상태에 빠진 것이다. 천주교 문제에 관한 한 다산에게서 수미관통, 초지일관을 기대할 수 없다. 그는 모순의 시대에 모순의 갈등 속을 살다가간 인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행보를 통해 역설적으로 그의 시대를, 더 정직하게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이때 다산은 천주와 정주라는 두 하늘을 가슴에 품고 있었고, 둘은 공존할 수 없었다. 어느 하나를 명백하게 포기하지 않은 채 공존할 수 없는 두 하늘을 품으려니 신념과 행동 사이에서 여러 불일치가 발생했다. 당시 남인 내부의 시각에서 다산을 살펴본 이재기의 《눌암기략》 과 강제성의 《송담유록》에 언뜻언뜻 비치는 다산의 모습은 그래서 더 낯설다. 본격적인 일기 읽기에 앞서 그 몇 장면을 먼저 살펴 당시 다산이 놓였던 처지와 행동 성향까지 함께 가늠해 볼 수 있다.

1793년 겨울 다산은 처삼촌인 홍수보와 사촌 처남 홍인호를 공격하는 통문을 작성하려고 자기 집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모여 글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날 사정을 전혀 몰랐던 홍수보가 지나던 길에 다산의 집에 불쑥 들렀다. 당시 사랑방에 가득하던 사람들이 뜻밖의 상황에 대경실색했다. 다산은 급히 홍수보를 내실로 모셨고, 그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그 당사자를 탄핵 통문을 탈고했다.

《송담유록》에서도 이가환과 정약용, 홍인호 대감이 엄한 하교를 받고 홍낙안이 쓴 글을 바쳤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때를 틈타서 얽어넣을 수 있겠다고 여겼다. 모여 의논하여 홍인호를 함께 엮어서 넣을 수 있겠다고 여겼다. 모여 의논하여 홍인호를 함께 엮어서 해치고자, 홍낙안을 공격하는 통문을 지으면서 홍인호부자도 엮어서 날조하였다. 종이 가득 늘어놓아 온갖 방법으로 꾸짖어 욕하니, 아는 이들을 곱절이나 두려워 겁을 내고, 심지어 가까운 인척이나 친척조차도 감히 찾아가지 못하였다라고 썼다.



정치적 입장 차에 따라 처삼촌 부자를 성토하는 것은 물론 통문 자성을 직접 주도한 셈인데, 이런 풍경은 다산이 얼마나 정치적 책략에 능했던가를 보여 준다. 이 밖에도 《눌암기략》에서는 다산과 이승훈 등이 자신들을 타깃으로 배척 상소를 올리려고 하는 성균관 유생들이 개별적으로 으르고 위협해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체제공의 뜻을 움직이려고 말을 부풀리거나 없는 일을 꾸며 사달을 만드는 장면이 자주 목격된다.

사학을 배우는 사람이 없는 듯하나, 사학을 두둔하는 풍조는 신유년 이전보다 심한 점이 있다. 이기환과 정약용이 독한 심보를 부리던 때에는 반드시 정론과 다투어 이겨 선한 부류를 해치려고 거짓말을 만들고 비방을 조작해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 이것이 대체 무슨 심보이며, 또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 어리석고도 현혹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금 뒷날의 일이기는 하지만 특별히 1799년 여름 다산과 대단히 가까웠다 이익운이 영춘헌에 입시해 정조를 만났을 때 정조와 나눈 대화도 인상적이다.

주상께서 ” 정약용이 경의 단점을 많이 말해 내게 들리게끔 한다. 어떤 이는 그 사람이 믿을 만하지 않다고 하고, 어떤 이는 권위가 채제공보다 열 배나 된다고 하며, 어떤 이는 남인 쪽에 보탬이 없다고 한다. 이석 또한 경의 일에 대해 자꾸 드러내어 지적하는 것이 서인들보다 심하니, 내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경이 이들에게 거슬림을 입은 것은 어찌하여 그런 것인가?" "약용은 신이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그 형 정약현을 위하여 여러 번 첫 벼슬을 구하였지만 신이 한 번도 물망에 올리지 않자 과연 크게 원망을 품었습니다. 금년정초 이후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다산은 이정운⸱이익운 형제와 대단히 친밀한 사이였고, 특히 이익운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다산과 이벽의 동생 이석 등이 왜 그대를 계속 비방하느냐는 물음에 이익운은 다산이 큰형에게 음직으로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탁했는데, 자신이 들어주지 않자 유감을 품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어지는 글에서 이익운은, 이석의 경우 형 이격이 혼사를 청했을 때 그가 무관인데다 사람됨을 좋지 않게 여겨 거절한 일때문에 그런 모양이라고 대답했다.

정조가 이에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괴이하다고 의심했는데 말을 듣고 보니 까닭을 알겠다고 말했다. 이익운과 다산이 훗날 틀어진 것은 채체공과 얽힌 문제로 정파적 입장이 갈린 때문이겠지만, 정조 또한 다산의 이 같은 모나고 강파른 성향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금정찰방 시절 이도명과 등과의 설전에서나 윤취협에게 보낸 편지 등에서 그런 면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다산은 결국 중앙에서 발을 붙이지 못한 채 다시 곡산부식사의 직을 받아 황해도 깊은 산골로 떠나야 했다.

1797년 윤 6월 6일의 일은 다양했다. 금정에서 이존창을 검거하고, 서암 강학회를 주도 했으며, 〈도간사수록〉을 집필하고도 천주교의 협의를 벗기기에는 역부족이다. 〈변방소〉라는 회심의 카드를 내밀었지만 임금과 대신들은 입으로만 칭찬하고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이삼환의 충고대로 ‘변명하자 말라’ 는 가르침을 따랐던 것만 못한 결과를 낳았다. 정조는 앞서 살핀 〈자친묘지명〉에서 다산을 곡산부사로 내려 보내며 ‘지난번 상소’ 가 훌륭해 한차례 쓰려 했으나 의론이 괴롭게 많아 외직에 잠시 보내는 것이니, 한두 해 늦더라도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고 위로했다. 애를 쓸수록 도리어 역효과가 났다.

다산의 위의 글을 쓰고 나서 “ 당시 귀신들로서 참소하고 미워하는 자가 많으니, 주상의 의사는 약용으로 하여금 외직에 수년간 있게 함으로써 냉각기를 두려 한 것이다”라고 썼다. 다산은 이 말을 쓰면서 가슴이 아렸을 것이다. 《사암선생연보》에도 이때 다산은 한 번 더 분루를 삼키며 도성을 떠나야 했다. 이날 어전을 물러나며 쓴 시 한수에 다산의 심경이 오룻이 담겨 있다. 제목은 ‘장차 곡산으로 가면서 궁궐을 떠나던 날, 서글퍼서 짓다’ 이다. 송나라 때등원발과 소송 이야기3〜4구에 인용했다.

다산의 일기는 객관적 동선을 설명하고 있으나, 그에 선행하는 의도가 있다. 천주교 문제는 숙명처럼 다산의 발목을 잡았다. 임금 정조가 다산을 그토록 아꼈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드러내놓고 편들 수가 없었다. 시기적으로 주문모 신부 실포 사건에서 1797년 곡산부사 취임 직전까지 다뤘고, 이 기간 다산은 천주교와 표면상 적대적 자리에 서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못했다. 다산에게 천주교는 이른바 양날의 검이었다. 다산이 천주교에 등을 돌려 전향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천주교 지도자 검거에 앞장섰어도 아무도 그의 진실성을 믿어주지 않았다.

비방은 점점 커지기만 했고, 그는 끓임 없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일기는 이 같은 안간힘의 결과라는 점에서 모순의 덩어리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 시기의 다산은 천주교와 군주 사이에 길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일기는 자신의 삶에서 천주교의 흔적을 어떻게 지워내려고 애쓰던 시절의 기록일 수 있었던 사실을 부정하고, 속마음으로 따른 일에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이 혐오하고 경멸하던 지들에게 자신의 진정을 믿어달라고 쓴 기록인 까닭이다.

천주교 지도자 검거와 성호악의 정리 주도로도 자신의 상황은 종결되지 않았다. 움직이기만 하면 비방과 비난이 따라왔다. 천주학을 버렸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했고, 정학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술수를 부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다산의 일기를 통해 드러나는 일부 부정합과 첨예한 갈등 속에는 다산과 그 시대가 맞닥뜨렸던 거대한 모순이 담겨 있다. 이를 두고 어느 한쪽의 잘잘못을 따져 편을 갈라 시비를 가리고야 말겠다는 태도는 오히려 사실과 진신을 호도할 수 있었다.

난 이승만책을 읽고 대한민국을 사랑하게 되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것은 전부 궁금하고 알고 싶어서 고조선에 대한 책까지 읽었다. 우리민족의 뿌리가 동이족이고 동이족이 한자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 책도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그와 관련된 조선과 정약용이라는 인물까지 확장하는 입장에서 읽었다. 옛날 언어라서 어려웠고 그 시대에도 가짜 뉴스때문에 힘들었고 정쟁과 새로운 천주교에 대한 갈등과 임금과 주변 사람들과의 정치적 갈등때문에 인간관계도 끓기는 것을 보았다. 요즘과 너무나 비슷한 모습으로 오버랩돼서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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