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신학 - 결혼의 큰 비밀, 언약으로 세워지는 부부 상호작용에 대하여
권율 지음 / 샘솟는기쁨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가 쓴 연애신학을 읽었다. 난 그 책을 읽으면 하나님이 예비해두신 배우자를 만날거라고 생각했는데 난 여전히 모솔이다. 나도 저자처럼 SFC출신이다. 나의 엄마는 걸어다니는 성경으로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뜻대로 말씀대로 산다. 그래서 난 엄마가 우주 최고라고 생각한다. 나도 성경말씀대로 살고 싶어서 영어 성경 2개, 쉬운 성경, 분권 성경, 개역 성경을 번갈아 가면서 보고 있다.

고등학교 때 SFC수련회에 갔는데 그때 혼전순결, 금주서약하라고 해서 했다. 대학에 갔더니 또 기독교교수님들이 혼전순결, 불법복제 안하기, 금주서약, 컨닝 안하기 서약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또 했다. 죠이선교회에 가입했는데 거기서는 또 전문인선교사되기를 서약하라고 해서 했는데 그때부터 회계사시험 공부를 하게 되고 투병생활을 하다가 로스쿨준비를 하게 됐다.

앞으로 변호사가 되면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잘 지키도록 노력하는 법조인이 되고 싶다. 저자가 부부관계를 신학적으로 해석해준다고 하니까 정말 읽고 싶었다. 엄마는 아빠가 첫사랑이자 끝사랑인데 나도 그렇게 될 것 같다. 아직까지 모솔이라서 지금 만나면 결혼하고 애낳아서 기독교명문가문을 꼭 이루고 싶다.

대학교경영학과 동기가 이번에 내가 사는 동네에 놀러왔다. 여자애는 서울대박사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남자애는 방송국 국장이 되고 이번에 유럽 여행을 다녀오고 각자 아파트를 3개씩 샀다고 한다. 그런데 나보고 행복해 보인다고 자기는 행복하지가 않다고 했다. 그 부부를 내가 연결시켜준거라고 한다. 난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하나님이 이 우주의 주인이니까 하나님만 소유하고 의지하고 사랑하면 난 모든 걸 가진 것이다. 그래서 배우자도 만나면 하나님안에서 만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진정한 행복이 존재할 것 같다. 여전히 모솔에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이 책을 보면서 공부하고 준비하면 될 것 같다.

인생의 고난과 아픔을 소재로 설교와 글쓰기에 힘쓰는 저자, 권율은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 폭력 및 부모 이혼 등 어려운 환경에서 복음으로 인생이 ‘개혁’되는 체험을 했다. 성경이 말하는 부부의 모습을 갈망하는 저자의 노력은 결국 「부부신학」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경북대학교 영여영문학과(B.A)와 고려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MDiv)를 마치고 대구 경북지역 SFC 간사 역임하였으며, 현재 부산 세계로 병원 원목으로 거제교회 기관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자는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가 실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서로에게 반응하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결혼한 부부가 겪는 여러 상황과 문제들을 성경과 교리에 근거하여 진단하고 상담학적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면 배우자를 사랑하는 마음도 비례해서 커진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이 절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명감에 사로잡힐수록 배우자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에 사로잡힌다.저자의 아내가 위암 진단을 받은 소식은 운전 중에 급브레이크 페달을 밟는 기분이었다. 남편의 사역을 지지하는 건 목회자의 아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했고, 가사와 육아도 남편의 도움 없이 힘겹게 버티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부부 사이에 얼마나 대화가 없었으면 아내의 마음이 상할대로 상해 있었다는 걸 몰랐다.

저자는 아내와 마음을 나누는 대화를 언제 했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았다. 아내가 위암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그제야 말에 집중을 하게 되었다. 불타는 사명감은 에너지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커지면 배우자를 사랑하는 마음도 비례해서 커진다. 중요한 말이라서 계속 반복되는 것 같다.



결혼생활의 목적중의 하나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명자 커플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반면 일중독에 빠진 사람에게로 향하게 하기 때문에 그의 영혼은 내적 공허함에 시달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배우자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다. 배우자를 향한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배우자의 사랑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한쪽이 잘못되면 반드시 다른 한쪽도 잘못되기 마련이다. 하나님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으로 채우면서 사랑에 빠진 저자의 영혼은 내적 공허함에 사로잡혀 배우자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저자의 모습을 인지하게 만든 인생 사건이 바로 아내의 위암 진단이었다.

다행히 훌륭한 의사를 만나 아내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마쳤고 이제는 완치 판정을 받아 건강하게 살고 있다. 일중독 남편을 정신 차리게 만든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 이제 저자 삶의 목적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분리할 수 없다. 결혼생활과 신앙생활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신앙생활이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우리가 그분을 평소에 어떻게 섬기는지를 보여 주는 삶의 방식이다. 예수님은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신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첫째 계명과 둘째계명이 같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측면에서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또한 둘 중에 어느 한쪽만을 사랑할 수도 없다는 의미이다.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 역시 이웃을 사랑하는 둘째 계명에 포함된다. 따라서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측면에서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말은 사랑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알려 준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이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배우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자와 무관한 하나님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신부인 교회가 온전치 못해도 절대 버리시지 않는다.

남편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데도 아내가 무조건 남편에게 맞추고 복종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남편의 불순한 의도에 아내가 이용당할 가능성이 크다. 부부만큼 신기하고 희한한 관계도 없는 것 같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어느 순간에 뒤틀리기 시작하면 언제 봤다는 듯이 싸우다가 심지어 남남으로 갈라서기도 한다.

부부라는 ‘법적 관계’로 진입했지만 부부라는 ‘실제 관계’로 살아 내지 못한 것이다. 부부가 되는 순간 중요한 게 아니라 부부로 지속되는 과정이 더욱더 중요하다. 이것은 결혼식과 결혼생활이 다르다는 말과 같다. 결혼식은 부부가 되게 하는 ‘한 날’이지만, 결혼생활은 부부로서 실제로 살아내는 인생의 ‘오랜 기간이다.’ 사랑을 이루는 두 요소중에 감정 상태가 이전과는 달라진다는 말이다.

이때 부부들이 자주 오해하면서 이런 푸념들을 늘어놓는다. 사랑의 호르몬이 고갈되면서 그러한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진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자체가 변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사랑에는 감정의 요소보다 의지의 요소가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호르몬 분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사랑의 감정을 지탱하는 사랑의 의지가 결혼생활에 필수적이다.

사랑의 의지는 감정 상태에서 큰 영향을 받는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 사랑에 ‘빠진’ 남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런 반응이기 때문이다.

결혼 전 연애 기간에는 사랑의 감정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해서 사랑의 의지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부부에게 있는 사랑의 의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세상에 드러내는 욕구이다. 부부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의지는 그 의지를 사랑하겠다는 가벼운 결심 정도가 아니다.



서로를 향한 사랑의 의지는 거룩한 언약에 뿌리내리고 있고, 그 의지는 결국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향한 갈망으로 나타난다. 성도인 부부라면 이러한 사랑의 의지를 서로에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원래 모습을 잃어버린 ‘에덴동산’이다. 어설프더라도 우리의 순종과 기도와 헌신을 사용하기 원하신다. 바로 이러한 실존적 상황이 우리 모두에게 처해 있는 것이다.

저자부부는 저자의 부부에게 주신 사명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한때는 사명에 대한 열정이 지나쳐 일중독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 사실 예전 보다 더 분주한 일상이지만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아내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저자 부부에게 주신 사명을 함께 감당하며 사는 것이 기쁘기 때문이다. 아내와 나누는 사랑의 감정이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역동적인 감정 상태는 아니지만 서로 깊이 갈망하는 또 다른 차원의 로맨스를 느낀다. 거룩한 정서에서 비롯되는 사랑의 감정이 틀림없다. 배우자 ‘첫사랑’으로 고백하는 크리스천 부부는 그 사랑을 계속 유지하며 새롭게 할 의무가 있다. 부부의 사랑은 전인격적인 측면에서 확인되어야 하지만 특히 성관계를 통해 확인된다. 성경은 결혼이라는 언약적 테두리 안에서 성생활을 ‘적극적으로’ 허용한다. (창2:24, 레20:10고전7:3-5)

부부간의 성생활은 단순히 욕구를 해소하는 수단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여러 가지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겠지만 특히 언약과 관련지어 정리할 수 있다. 이 언약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는 현장이 바로 주일예배이다. 예배는 언약 갱신의 현장이다. 우리 부분이 삼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노출되어 기꺼이 그분의 통치를 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아름답고 숭고한 순간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생활이 결혼식 당일에 맺어진 언약을 확증하는 데서 시작되었고, 그 후로 계속되는 부부 성생활은 결혼 언약을 새롭게 인식하고 갱신하는 성격이 아주 짙다. 단순히 욕구를 해소하는 수단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천 부부는 성생활에 임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서로 한 몸 됨을 다시 확인하며 결혼 언약에 충실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기뻐해야 한다. 젊은 때처럼 욕구가 흡족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뜻인 결혼의 언약과 한 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앙이 뜨거워도 부부 싸움을 많이 하는 특이한 경우이다. 신앙이 뜨거운 게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더 큰 문제이다.

아내는 남편의 독설에 초연해지려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은혜를 구했다. 그랬더니 어느 날부터 긍휼의 마음을 품고 남편의 태도에 반응 하게 되었다. 남편이 자신의 태도와 말투를 교정하고 아내처럼 변화되면 좋은 데, 남편의 태도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아내는 기도하며 은혜를 받아 그렇게 반응한다고 확신하는데, 오히려 남편은 자신의 말에 귀를 안 기울이는 아내의 태도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부부 사이에는 그런 부분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남편과 아내는 어느 한 쪽만 회복된다고 부부 사이가 회복되는 게 아니다. 부부가 서로 대화하며 이런 저런 교감을 통해 함께 회복해 가야 한다. 공감 능력은 남편과 아내에게 모두 필수적이다. 공감해 주는 지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남편은 아내의 ‘감정’과 ‘기분’에 공감해야 더욱 사랑을 받는다. 부부 사이에는 ‘공감적 사람 읽기’ 라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혼생활 중에 한 번도 싸우지 않으면 부부 사이가 좋다는 것일까? 그럴 수 있겠지만 세상에서 그런 일은 없다.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 부부일수록 실제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어느 한 쪽이 죽을 힘을 다해 무작정 참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부부 싸움의 목적은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하는 것임을 서로가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부부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하면 극단적인 경우에 다시 안 볼 것처럼 싸울 수도 있지만, 부부 사이라고 한다면 이혼하지 않는 이상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계속 갈등 상황에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부부가 화해하지 않고 계속 갈등 상황에 있다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와 교회가 계속 불화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부부가 서로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우리 주님을 생각해서라도 갈등을 풀고 빨리 화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혼은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결혼 언약을 파기하는 무서운 범죄이다. 저자도 결혼 주례를 서지만, 신랑 신부는 하나님이 세우신 주례자 앞에서 혼인 서약을 하고 죽음이 둘 사이를 갈라놓을 때까지 그 언약을 지키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한다. 주례자는 그 부부의 언약을 입증하기 위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혼 공포를 한다.

즉, 신랑 신부가 마침내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걸었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그 언약을 깨뜨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 막10:9) 그럼에도 완악한 인간들은 성격이 안 맞다는 이유로, 또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서약한 결혼 언약을 깨뜨려 버린다.

크리스천 부부들이 쉽게 이혼을 결정하는 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결혼식 당일에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엄숙하게 서약하지 않았는가? 부부가 이혼하게 되면 자녀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준다. 어릴 때 저자의 부모님은 몰래 싸운답시고 두 아들을 깊이 재우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일방적으로 폭력과 폭언을 했는데, 저자는 잠결에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무서웠지만 모르는 체하고 잠자는 척했다. 심지어 아버지가 부부 문제에 간섭하는 할머니한테 식칼을 들고 죽여버린다고 소리치는 장면도 생생히 기억난다. 부부의 이혼은 자녀의 부모 됨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저자는 아버지의 모습을 절대로 닮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결혼하면 아버지 같은 남편으로 살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버지 같은 ‘폭군’ 남편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문제는 자녀를 키우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대하는 저자의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이었다. 수십 년에 전에 아버지의 폭언에 놀라는 저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버지와 좋은 추억을 쌓을 만큼 자녀에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다행히 지금은 그런 모습이 없어졌다. 저자의 아들 삼형제에게만 만큼은 수 십 년 전 저자가 소년시절 겪었던 트라우마를 절대로 대물러 주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이전보다 여러모로 노력하지만 아직도 아내가 보기에, 아들들이 보기에 아버지로서 부족한 부분이 많다.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도록 계속 노력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짐한다. 저자의 신학은 연애에서 부부, 자녀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나도 그런 연애신학과 부부신학, 자녀신학의 영향권에 놓이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증정 받아 직접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