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올바름을 겉으로 드러난 국익보다 우선시한 훌륭한 사례글도 있다. 도덕적으로 부끄러운 일은 결코 유익할 수 없으며, 아무리 유익하게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유익하지 않다. 도덕적으로 부끄러운 일을 유익하다고 착각하는 자체가 재앙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유익한 것과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 정말로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과 상충하는지, 혹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세심하게 검토해야 한다.
이런 문제와 관련된 사례를 보면, 로도스에 기근이 들어 곡물 가격이 폭등했을 때, 한 선량한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많은 곡물을 싣고 로도스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그가 로도스인들에게 이 사실 알려야 하는가? 아니면 침묵한 채 자신이 가져온 곡물을 가장 비싼 가격에 팔아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 지혜롭고 선량한 사람의 예를 들고 있다.
이 사실을 숨기는 것이 도덕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판단된다면, 그는 로도스인들에게 사실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사실을 숨기는 것이 도덕적으로 부끄러운 일인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람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논의할 수 있다.
이 경우, 위대하고 금욕주의적 스토아학파 철학자 바빌로니아의 디오게네스와 그의 제자이며 매우 예리한 통찰력을 지녔던 안티파테르의 견해는 서로 달랐다. 안티파테르는 판매자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구매자에게 공개하여 모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디오게네스는 판매자 시민법이 밝힐 의무는 없으며, 속임수만 쓰지 않는다면 상품을 가장 높은 가격에 팔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기원전 585년 밀레토스가 활동을 시작한 시점부터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아카데미아를 폐쇄한 기원후 529년까지 그리스인들이 수행한 철학을 가리키며, 크게 세 시기 로 나뉜다. 제 1세기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시기로,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자연철학이 특징이며, 이오니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제 2세기 아테네 철학 시기로,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48)에서 승리한 후 저명한 사상가들이 아테네로 모여들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이 꽃을 피운 시기다. 이 시기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활동했다. 키케로는 제 2기와 제 3기에 속한 모든 철학 학파의 사상을 두루 섭렵해 논할 때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지만, 실천적 측면에서는 비슷했다.
키케로는 적대적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철학을 실천에서 적용해 얻는 실용적 철학을 추구했다. 소크라테스(기원적 약 470-399년) 는 당시 유물론적 자연 철학에 반대하여 이성과 이성적 추론을 통해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도 처음에는 자연을 관찰하여 진리를 찾으려 했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오로지 이성에 의지하여 진리를 발견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우주론에 기초한 윤리학에서 벗어나 오직 이성과 논리적 추론에 기초한 철학을 개척하여 이후에 이성을 중지하는 모든 철학의 시조가 되었다. 아카데미아학파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기원전427-347) 은 유명한 이데아설을 제시했다. 그는 오직 ‘이데아’만 비물질적이고 영원하며 초월적인 절대적 실재라고 주장했다.
반면,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존재는 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며, 감각에 의존한 경험적 사물의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나 모상에 불과하다는 이원적 세계관을 취했다. 플라톤은 인간의 불멸하는 영혼이 본래 이데아계에 존재했다가 현세에 태어났으며, 이 영혼이 세계 혼의 인도 아래 이데아를 회상할 때 비로소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소요학파의 시조는 마케도니아 스타게이라 출신의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기원전 367-347년까지 아카데미아에서 연구하다가, 기원전 335년에 아테네 동부의 리케이온 학교을 세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리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하면서도 플라톤의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에서 중간 입장을 취했다. 만물과 그 현상은 이데아의 타락한 형태라고 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는 만물과 그 현상에 내재되어 있으므로 거기서 이데아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소크라스의 제자이자 견유학파의 창시자인 아테네 출신 안티스테네스(기원전445-365년)는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덕을 추구하는 것만이 최고의 삶이라고 주장했다. 행복이란 인간의 본성적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본성적인 것은 부끄러운 흉함이 아니므로 감출 필요가 없다고 했다.
스토아학파 창시자인 제논 (지원적약 335-263) 은 지중해 동부 키프로스섬 그리스 식민지시 키티온 출신이다. 30세쯤 아테네로 와 여러 학파에서 배운 후 견유학파 철학을 훨씬 더 발전시키고 체계화 한 독자적인 철학을 정립했다. 의무론은 키케로가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에게 쓴 편지 형식이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자연과 지혜를 따르고 쾌락과 나태함을 조심하라고 했다. 나도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고 국제정세에 대한 책이나 다양한 주제의 책만 방구석에서 5000권 가까이 읽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까 애국심도 생기고 내가 살고 싶은 체제가 자유민주의의, 자유시장경제라서 그 체제를 지키려면 반국가세력들(민주당, 중국, 선관위, 헌재, 공산주의,사회주의, 북한)과 싸우고 대항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바로 키케로의 의무론에 입각해서 사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