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 육성회고록 - 독립유공자의 아들, 모국어의 혼불로 시를 피우다
이근배 지음 / 스타북스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부터 엄마가 신춘문예 응모를 시작해서 이 책을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저자는 이근배는 천재시인, 신춘문예 10관왕으로 60년대를 휩쓸고 한국시인협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에 올랐다. 건국훈장애족장을 수훈한 독립유공자의 아들로 분단전쟁의 한복판에서 일으켜 세운 한국시의 새 경지를 이룬 시대 상황을 펼친, 대서사시의 광맥을 새긴다.

저자는 1940년 충남 당진에서 독립유공자 이선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58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장학생으로 입학, 김동리 서정주 교수의 지도로소설과 시를 공부했다. 1961년 사이 경향, 서울, 조선, 동아 등 일간지 신춘문예에 시, 시조, 동시 등이 당선,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노래여 노래여⌟⸀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추사를 훔치다⌋와 기념시집 ⌈대백두 바친다⌋⌈종소리는 끝없이 새벽을 깨운다⌋시조집 ⌈동해바닷속의 돌 끝없이 새벽을 깨운다⌋⌈달은 해를 물고⌋, 장편서사시집 ⌈한강⌋시산집 ⌈사랑 앞에서는 돌도 운다⌋,한국대 표명시선 ⌈살다가 보면⌋기행문집 ⌈시가 있는 국토기행⌋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 중앙시조대상, 가람문학상, 현대 불교문학상, 편운문학상, 심훈문학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만해대상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서울예대, 추계예대, 재능대, 신성대 등에서 초빙, 석좌교수 등으로 시 창작 강의를 했다. 월간 ‘한국문학’ 발행인 겸 주간, 계간 ‘민족과 문학’ 주간, 계간, ‘문학의 문학’ 주간,

간행물윤리위원장, 대한민국예술원 원장,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중앙대 초빙교수, 서울시인협회 명예회장, 윤동주 시 정신선양회장을 맡고 있다. 대학에 입학할 때 소설 전공을 목표로 했는데, 소설은 이미 앞서 나간 천승세, 송상옥 등에 밀렸다. 시는 문학의 밤에서도 동아일보 등 독자 투고 원고료도 받고 하면서 정지용, 서정주 시집에 꽂혀 그런대로 잘 써지는 느낌이었다.



저자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가서 문학 천재들을 많이 만났다. 그때까지╔학원╝지도, 소월 시집도 못 읽고 겨우 교과서와 삼촌이 빌려오는 소설책읽기를 학교 공부보다 더 열심히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집에서 가까운 세 마지기 논에서 새를 쫓았는데, 박화성 작가의 두꺼운 장편소설 두꺼운 장편소설 ╔백화╝를 읽었던 것 이 떠오른다.

저자가 당진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읍내 조선일보, 동아일보 보급소에 하학 후 들러 심문곶이에서 뽑아오면서 한문투성이 기사를 읽으면서 한지를 퍼즐 퀴즈로 짚고 넘어 갔었다. 대학에 입학할 때 소설 전공을 목표로 했는데, 소설은 이미 앞서 나간 천승세, 송상옥 등에게 밀렸다. 1960년 가을 나는 당진에 내려와서 낫을 들고 혼자 콩 꺾기를 하면서 뽕나무 그늘에서 노트와 연필을 들고 신춘문예 응모작을 한두 편 써나갔다.

저자가 고등학교 때 교내 백일장에서 늘 1등 하던 것이 시와 시조 였다. 특히 시조는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고 읽을 책도 없어서 몇 편 교과서에 실렸던 앞선 신춘문예 당선작들의 시조를 읽었을 뿐이었다. 그런 작품들을 다시 읽을 것도 없이 혼자 생각으로 노트에 그적인 것을 원고지에 잘 정리해서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자유시 등단으로 저자 신춘문예 투고 벽이 끝난 줄 알았는데, 1964년 4월인가 신촌서 같은 하숙생이던 연세대 국문과 이전영이 영천 하숙집으로 찾아왔다. 신인예술상 투고 작품을 봐 달라는 것이었다. 저자는 ⸀신춘지⌟에 발표할 생각으로 써놓았던 시 ⸀노래여 노래여⌋가 마침 있었다. 저자는 순간적으로 무엇에 홀린 듯 “그럼 이것도 갖다 내 줘!” 하고 하숙생인 이선규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저자는 놀랐다. 대개 특상작은 소설이 차지했는데, 심사위원 모윤숙 선생이 소리 높여 읽고 양주동 등 당대 대표 시인들이 손뼉을 쳐서 환호성을 울렸다는 것이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서정주, 이어령 이런 분들이었다. 저자랑 동인인 조태일 등 신문사에⟪노래여 노래여⟫ 의 표절 이라고 당선 취소 요청해서 풍파가 일었다.



한국일보사에 있던 손기상 문학담당 기자도 아는 사이여서, 창간 첫 신년호에 크게 빛을 낸 작품을 취소하면 이병철 회장에게 면목이 없어 망설이고 있었다. 신문 양면에 실어 대조하면서 “표절이냐 아니냐” 하는 기사가 크게 있었다. 저자 신춘문예 일곱 번과 신인예술상 세 번 합쳐서 문단에서는 ‘신춘문예 10관왕’ 이라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이름을 붙이기도 했었다.

아무튼, 신춘문예 투고벽은 조금 시끄럽게 끝이 난 것이다. 저자는 신춘문예에 여러 번 당선하고, 한국시인협회 회장이 되고, 대한 민국예술원 회원이 되고, 예술원 회장이 될 수 있었던 힘도 모두 아버지가 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여러 학교 대학교수가 된 것도 ‘한국문학’ ‘민족과 문학’ ‘문학의 문학’ 등의 잡지를 하게 된 것도 가람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심훈문학상 만해문학상등 큰 상을 많이 받게 된 것도 아버지가 주신 것이다.

“고 이선준은 대한민국 자주독립과 국가건립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다음 훈장을 추서 한다는 훈장증을 외아들인 저자가 대신 받았다. 너무나 감격스럽고 영광스런 아버지의 훈장으로 할아버지가 그토록 아프게 여기시던 큰아들의 독립투쟁이 가문을 빛나게 했다. 이제 하늘도 땅도 기뻐하실 일인데도 저자는 부끄럽고 부끄럽다. 할아버지는 “애비를 꼭 닮았다.”고 했다. 아버지를 따를게 없으니 저자가 받은 영광이 너무도 크고 무겁기만 하다. 저자의 회고록이라서 그런지 저자의 업적이 잘 정리되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