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사유하기보다는 말의 홍수에 산다. 날마다 말의 바다에서 헤엄치기와 다름없다. 명상을 포기하는 것은 정신적인 파산 선고와 같다. 어릴 때 슈바이처 박사를 아주 좋아했다. 슈바이처 박사의 어린 시절에 가난한 친구와 싸우다 이겼을 때 “너처럼 매일 고기를 먹었으면 내가 이겼을 텐데” 라는 말을 듣고 슈바이처 박사는 육식을 끓었다는 에피소드는 여전히 살아있다.
단독에 살면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단풍나무 밑도 좋고, 덩굴장미 아래도 좋다. 손바닥만 한 정원에도 정이 가는 구석이 있다. 어렵던 유학시절 벤치에 앉아 고향 생각을 달랬다. 귀국할 때 벤치는 짐이 된다며 이구동성 버리고 가라고 했지만 화물 편에 포함시켰다. 유년 시절, 시골 앞산에 뻐꾸기가 많았다. 그 소리를 듣으면서 낮잠에 빠졌고 그 소리에 잠 깨어 어머니에게 칭얼대기도 했다.
뻐꾸기 울음 고향 ═고향이라는 등식이 저자에게는 있다. 볕이 속절없이 따뜻한 봄날 한 곡조 뽑을 때 블루투스음원이 필요하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밀리 떠나라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과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사월의 노래> 박목월시, 김순애 곡이다.
나무를 베었을 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크고 작은 온갖 나무들은 저자에게는 숭배의 대상이다. 특히 겨울나무가 좋다. 눈 덮인 응달에 외로이 서 있는 겨울나무야 말로 저자에게 진정한 외경의 대상이다. 그래서 이원수 선생은 겨울나무를 두고 “평생을 살아봐도 늘 한 자리 넓은 세상 얘기로 바람께 듣고 꽃피던 봄, 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는” 존재로 묘사했다.
고교시절 배운 이양하 선생의 수필<나무> 덕분에 나무는 저자에게 하나의 거룩한 종교로 각인 되었다. 나무는 덕을 지녔다.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한다.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며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을 안다.
나무를 신앙처럼 경배하던 저자가 나무를 베었다. 해마다 늦여름이면 태풍이 분다. 드디어 아랫집에서 들고 일어났다. 태풍에 나뭇가지가 집 쪽으로 쓰러지면 인명사고가 날 수 있다고 겁을 잔뜩 준다. 저자의 고민은 깊어 갔다. 애지중지한 나무를 베어 죽여야 한다니 그러나 아랫집의 위험함을 지나치기에는 나무가 너무 컸다. 베어내야 하나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했다.
환청인지는 몰라도 나무가 저자에게 속삭였다. 저자는 나무를 너무 사랑한다. 그런데 베어 내려니 환청까지 들렸다. 잠도 몇일을 걸렀다. 결국 다음날 아침 저자는 결정했다. 생에 단 한번 피는 대나무 꽃을 기다리며 아침저녁 골목길에서 이웃을 만나게 된다. 단독주택에 살면 어쩔 수 없이 이웃과 알은체 하게 된다.
저자는 왜냐고 묻지 말라고 한다. 그냥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고 한다. 아파트에서 사는 동안에는 그런 경우가 드물었다. 정원에는 대나무가 있다. 정확하게는 집 바깥 정원이다. 10여 그루가 넘으니 꽤 무성한 편이다. 일급비밀을 공개하자면 이 집은 전설적인 건축가 김수근 선생의 작품이다. 대나무는 서양에서는 쳐주지 않지만 유독 한국, 일본, 중국에서는 인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