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읽는 그리스도인 - 소설은 한 사람을 알게 하는데 그게 나일 수 있다
이정일 지음 / 샘솟는기쁨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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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다. 문해력이 받쳐줘야 신앙도 업그레이된다는 얘기가 뭔지 알고 싶어서 읽었다. 하나님은 지성, 영성, 감성으로 만나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하나님은 성경책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 삶의 목적이나 이유는 하나님이라서 하나님과 관계된 건 전부 다 알고 싶다. 기독교인이 책을 안 읽는다면 그는 가짜 기독교인이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나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데 성경, 신앙서적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읽었다. 난 소설을 잘 안 읽는데 모처럼 파우스트를 읽어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꿈은 우리를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라는데 그것도 알고 싶고 거룩하지만 인간다움을 알고 감정의 뿌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도 너무 궁금한 포인트이다.

저자 이정일은 영문학과 신학을 공부하여 박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뉴욕주립대에서 미국 현대시를 연구하고 세계문학연구소에서 제 3세계 작가들을 연구했다. 대학에서 영어권 소설, 과학소설, 세계문학 등을 가르쳤고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며 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인간 감정의 뿌리가 하나님에게 있다고 슐라이어마허가 밝혀냈다. 성경, 자연으로 하나님을 읽고 소설을 읽는 것도 영적인 일이다. 저자는 소설의 페이지마다 하나님의 바람에 휘청인다고 했다. 소설을 읽는 것이 기도가 될 수 있다. 차례를 보면 1부 삶의 의미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1장 소설은 무엇이고 왜 중요한가, 2장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3장 문해력이 받춰져야 신앙도 업그레이드된다, 4장 그리스도인에게 소설이 필요한 현실적인 이유, 2부 내면의 변화는 나이테 같은 흔적을 남긴다. 5장 주인공은 심리적 죽음을 대면해야 한다, 6장 성장하는 인물은 반드시 감정적 혼돈을 겪는다,



7장 인생을 소설의 플롯에 넣으면 어떻게 보일까, 8장 소설은 한 사람을 알게 하는데 그게 나일 수 있다, 3부 어떻게 소설이 묵상을 힘 있게 만드는가, 9장 소설이 묵상의 도구가 될 수 있다, 10장 작가의 이야기를 독자가 완성한다, 11장 작가가 말하지 않은 것도 읽어내야 한다.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는 법을 신앙서도 가르쳐주지만 소설도 가르쳐준다. 우리는 화낼 일이 많은 세상을 산다. 성경은 그런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살려면 하나님을 아는 게 우선이지만 그 다음엔 나를 알고 인간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이해한대로 보인다.이런 좋은 신앙의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진리는 바뀌지 않지만 시대는 바뀐다. 바뀐 시대의 컨텍스트를 살펴보지 않은 채 좁게 해석한 성경 지식을 갖고 현실을 대처하다 보니 충돌과 모순이 생긴다. 거룩함을 추구해도 인간다움의 감각은 잊지 말아야 한다. 연약함을 드러낼수록 자유로워지고 신실해진다. 소설은 그런 감각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실행이다. 바쁘고 피곤하다고 방심하면 느낀다는 건 자신의 자아를 갖는 일이여서 자기만의 느낌이 있는 사람은 타인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잠시라도 느껴야만 하고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살펴야 한다. 성경을 읽고 어른이 되고 소설을 읽는 게 다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연결되어 있다. 성경을 읽는 건 영적인 일 같고 어른이 되는 건 현실적인 삶 같고 소설을 읽는 건 개인의 취미 같지만 이 셋은 연결되어 있고 동시에 저마다 혼자서도 중요한 작업을 한다. 난 책을 많이 읽기는 하지만 소설은 초등학교 때 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을 읽고는 별로 잘 안 읽는다.



문해력이 받춰줘야 신앙도 업그레이드된다는 얘기에 확 꽂혔다. 문해력, 이해력, 독해력에 너무 관심이 많은데 문해력이 있어야지 신앙도 성장한다는 얘기가 도대체 뭘까라는 궁금증이 너무 들어서 이 책을 읽는다고 해도 다이다.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어서 신앙생활에선 매우 중요하다. 아,,,,문해력도 신앙에 영향을 끼친다,,,문해력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고 정보와 지식을 흡수하는 자기만의 방식이고 범접할 수 없는 격차를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한 수이다. 와,,이런 문해력을 다들 원해도 손에 못 쥐는 건 이것이 독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책을 깊이 읽은 내공을 가져야만 문해력이 주어진다. 문해력이 생기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언어 너머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평소 우리가 기도와 말씀으로 깨어서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 빛과 소금처럼 사는 삶을 꿈꿔도 이게 말잔치로 끝나는 건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읽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학으로 비유한다면 읽는 것과 읽고 싶다는 것의 차이를 모르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앙의 기초체력인 문해력이 부족한 것이다. 장미의 이름에서 주인공 수도사 윌리엄은 책을 읽는 눈이 없으면 서책은 그저 기호에 불과하다. 글을 읽는 힘이 좋아지면 독서가 기도처럼 느껴진다. 미국 작가 매들렌 렝글은 천천히, 천천히, 나는 기도를 듣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책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인생에 대한 톨스토이의 깊은 사유는 소설뿐 아니라 에세이 인생에 대하여에도 잘 나와 있다. 그는 눈을 뜨기 전까지 꿈은 꿈이 아니며 깨어나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 모든 것이 꿈이 된다라고 썼는데 이런 문장은 그에게 통찰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런 통찰은 문해력을 가진 사람만이 손에 넣는데 그 힘이 꼭 기도 같다. 문해력을 터득할 땐 소설을 읽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소설을 읽으며 배우면 소설뿐 아니라 일반 서적도 독특하게 읽어내는 눈이 열린다. 일반 서적은 말하고 싶은 내용을 처음부터 명확하게 제시하기에 오독이 적다. 반면 소설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뭔가를 말하지만 암시하거나 묘사해서 짜증이 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도 천천히, 꾸준히 읽으면 세상에 맞설 문해력이 내 안에 생기게 된다. 하나님이 이 시대에 작가를 우리 곁에 보내신 이유는 내가 원하지 않는 나가 되거나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나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생은 한 번이라서 실수를 피하기 어렵다. 인생을 다시 산다면 우리는 달라질 것이다. 이걸 아시는 하나님은 작가를 우리 곁에 보내 인생을 후회로 채울 여지를 줄이신다. 후회는 참 아픈 감정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인생의 끝을 후회로 마무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인데 이게 쉽지 않다. 많은 이들이 후회할 걸 알면서도 소신대로 살지 못한다. 이런 점은 레미제라블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소설은 결과가 바빴어도 그걸 경험이 되게 하고 실패를 교훈 삼아 우리가 자신을 성찰하도록 도와준다. 오늘의 삶은 지금껏 한 선택의 결과이므로 이런 결과가 후회된다면 분명 이전 어딘가에서 실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 선택의 순간을 찾아 복기하는 데 그때 인간에 에 대한 작가의 이해가 깊이로 드러난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겸손과 인간다움을 배우고 동시에 내 안의 어둠과 그늘을 보게 된다. 고난이 사람을 고상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그걸 겪지 않았으면 결코 몰랐을 무언가를 소설은 일깨워준다. 소설은 다양한 인간의 감정들이 우리의 내면에 거대한 군상처럼 우뚝 서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다들 인생이 짧다고 말하지만 인생만큼 긴 것도 없다. 소설은 긴 인생을 버틸 힘을 주는데 독자는 소설이 의미하는 걸 아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 의미를 어떻게 드러내는가도 읽어야만 한다.



노인과 바다를 보면 인생은 공평하지 않고 자주 실패할 거라는 게 느껴지고 삶에는 신학으로도 설명하기 쉽지 않은 뭔가가 있다는 게 보인다. 부조리한 세상을 살며 때론 패배하더라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우리가 설교로 듣지만 소설을 읽고 나면 그 말이 뼛속까지 느껴진다. 나도 인생이 뭔지 계속 생각하고 책을 읽고 또 생각하고 성경을 읽고 또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보고 인생이 또 뭔지 또 생각하고 나 자신을 보고 인생이 뭔지 또생각을 하고 자연을 보고 또 인생이 뭔지 또 생각을 하고 미디어를 보고 또 인생이 뭔지를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영화이든 소설이든 이야기가 주는 행복한 느낌이 있는 걸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 어딘가에 이야기 샘을 파놓으셨다. 감성이 부족하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감성을 개발하지 않는 신앙은 삶을 메마르게 한다.

인간의 뇌는 신비롭다. 뇌에는 1000억개가 넘는 신경세포가 복잡한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그 결과 생각이 탄생한다. 생각은 내면의 세계관에서 나오지만 생리적으론 뇌 신경 세포 간의 움직임이다. 신경 세포는 짧게는 1cm미만부터 길게는 10cm에 이른다. 신경 세포는 두 개 이상의 뉴런으로 구성되고 뉴런과 뉴런 사이를 연결하며 신경전달물질의 통로역할을 하는 부위가 시냅스이다. 뇌는 묘사와 암시와 비유가 풍부한 글을 읽을 때 가장 활성화된다고 한다. 소설을 읽을 때 뇌에 주어지는 자극이 커서 독자는 공감 능력이 높아지고 세밀하게 읽게 된다. 이게 결국 문해력을 높여서 깊이 있는 생각을 가능케 한다. 문해력이 그리스도인이게 중요한 능력이라는 것은 다니엘만 봐도 알 수 있다. 문해력이 좋아지면 성경을 읽을 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히 들을 수 있다. 책을 가까이하면 겉모습은 노화되어도 뇌와 속사람은 새로워지게 되어 있고 뇌가 새로워지면 우리는 한 알의 모래알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는 상상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게 그리스도인에게 소설이 필요한 이유이다. 문해력이 좋아지면 하나님 음성을 정학히 들을 수 있다는 얘기에 더 문해력에 집착하게 되고 하나님께 더 지혜를 간구하게 될 것 같다. 이 책에는 뇌에 자극을 주는 새로운 표현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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