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리히텐슈타인 베이식 아트 2.0
재니스 헨드릭슨 지음, 권근영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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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들만 좋아해서 인상파에 대한 책만 읽었는데 이제는 다른 화풍들도 궁금해서 이 책을 읽었다.

저자 제니스 헨드릭스는 스미스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했고 함부르크에서 마틴 원케 밑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그녀는 작가이자 큐레이터이다.

미국 화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1950년대 후반 뉴욕에서 추상표현주의가 지배하는 시장에 뛰어들며 미술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했고 새로운 예술 용어를 정의했다.

리히텐슈타인은 산업 생산 기법, 만화, 연재만화, 광고와 같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사용했다.

리히텐슈타인은 앤디 워홀, 제임스 로젠퀴스트와 같은 동시대 인물들과 미국 대중매체와 소비문화를 반영하고 풍자했다.

이 책은 추상표현주의와 팝 아트 초기작부터 후기 붓자국과 현대 걸작의 재해석에 이르까지 리히텐슈타인에 대한 필수적인 내용이 나온다.

앤디 워홀 그림과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이 비슷하다는 생각도 좀 들었다.

책 맨 앞표지를 보면 리히텐슈타인의 사인이 있는데 무난한 것 같다.

리히텐슈타인은 강사를 하다가 작품 활동에 전념하려고 그만두었다.

1962년 마흔에 가까워도 리히텐슈타인은 이렇다 할 경력도 없고 그저 반쯤 출제한 정도였다.

1923년 뉴욕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정상적이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차고 및 주차장 전문 부동산 중개인이었다.

리히텐슈타인은 미술 과목이 없는 일반 공립학교를 다니고 재즈에 빠졌다.

마시가 그의 첫 스승이고 리히텐슈타인은 피카소를 존경했다.

나중에 피카소에 대한 책도 읽을 생각인데 연결이 돼서 좋은 것 같다.

1940년 고교 졸업 후 리히텐슈타인은 화가가 되기로 했다.

리히텐슈타인은 오하이오 주립대학에 입학했다.

리히텐슈타인은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석사과정에 입학했고 미술 강사로 채용되었다.

그는 10년 동안 강사로 일했고 이런 지적인 환경은 그의 작품이 더욱 분석적 경향을 띠게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리히텐슈타인은 마음속의 느낌이나 현실세계를 기록하는 것보다는 미술과 미술작품 제작과정을 면밀히 검토하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다.

1950년까지 리히텐슈타인은 말년의 피카소, 브라크, 클레의 영향을 받은 반추상화를 그렸다.

1951년 그는 강사로 채용되지 못하고 아내의 직장이 있는 클리블랜드로 이사해 6년간 살면서 토목 설계사, 창문 장식사, 금속판 디자이너 같은 직업을 전전했다.

그는 그림을 일을 하고나서 그렸다.

그는 실제 풍경, 모델, 순수 추상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뉴욕에서 전시를 했지만 가족을 부양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추상표현주의에 눈을 돌렸다.

추상표현주의에는 외향적 형식과 내향적 형식이 있다.

외향적 형식인 액션 페인팅은 미술가의 에너지와 즉흥적 기법에 의지하는 것으로 물감에 담배 꽁초나 유리를 섞어 커다란 캔버스에 뿌리기도 하고 방울방울 떨어뜨리거나 바르는 것이다.

잭슨 폴록과 윌렘 드 쿠닝이 이런 직접적인 표현방법을 강조했다.

앤디 워홀은 추상표현주의의 세계는 상당히 마초적이라고 했다.

리히텐슈타인은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소리와 촉감 같은 감각, 혹은 중요성이나 흥분 같은 추상적인 성질을 기호로 표현하는 방식에 흥미를 느꼈다.

대중적인 팝 아트의 전형이었던 리히텐슈타인의 미술은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그는 대중적 친밀함을 보여주기 위해 실제로 추하고 저급한 것들을 유별난 방식으로 작품에 표현했다.

앤디 워홀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 그림에서 부러워한 것은 벤데이 점이었다.

나도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을 보면서 저 점들의 집합은 뭔지 항상 궁금했었다.

벤데이 점은 검은 윤곽선이나 제한적으로 선택한 몇 개의 산업적 색보다 그림에서 돋보였다.

만화에서 특정 장면만 따로 떼어 낸 이미지는 오랫동안 순수미술과 결합되어 왔지만 아무도 콜라주나 회화적 모티프 이상의 표현으로 확장할 방법을 몰랐다.

그런데 리히텐슈타인은 벤데이 점 같은 인쇄기술을 참고해 인쇄된 출처에 적용된 구상을 그대로 살렸다.

자신이 원용한 출처에서 거리를 두지 않았다고 리히텐슈타인을 비난한 비평가와 상업미술가들은 확실히 그림의 내용뿐 아니라 양식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리히텐슈타인이 모든 초기작에서 벤데이 점을 쓴 것은 아니지만 벤데이 점은 그의 작품과 동의어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벤데이 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처음에 벤데이는 한 가지 톤만 시도했지만 목판화 같은 효과를 얻는 선과 결에 의한 그러데이션이다.

이를 위해 리헤텐슈타인은 음영을 표현할 필름을 필요한 위치에 고정하는 장치를 고안했다.

위치를 고정하는 정밀 기기를 사용해 인쇄 필름을 서서히 바꿀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원하는 만큼 움직임을 반복해 첫 판에 색을 더하며 정확한 위치로 인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제작한 드로잉은 후에 포토 인그레이빙 과정을 거쳐 판으로 복제했다.

쇠라의 점묘법의 점은 리히텐슈타인의 점과 시각적 연관성이 있다.

자기 양식을 확립한 지 5년 뒤 리히텐슈타인은 새로운 방향으로 관심을 돌렸다.

리히텐슈타인은 그림을 그릴 때 미술이란 무엇이고 무엇을 이루었는지 누가 무엇을 위해 언제 작품을 만들었고 그 미술가가 그것을 원했는지 아닌지 생각하며 모든 종류의 미술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그는 미술적인 자의식을 자신의 방식에 사용했다.

다른 작품을 참고하거나 연상시키는 방식이었다.

리히텐슈타인은 피카소의 작품에 만화 형태를 적용했다.

리히텐슈타인은 형태에 검은 윤곽선을 그리고 평면적 모양으로 형태를 단순화하는 피카소의 양식에 매력을 느꼈고 미술가로서의 피카소 위상에 기대려는 의도도 있었다.

리히텐슈타인은 피카소의 특정 회화가 아니라 피카소라는 인물의 의미를 사용했다.

미술 사조는 인상주의, 입체주의, 야수주의, 미래주의, 표현주의가 있다.

오늘날 인상주의는 가장 인기가 있다.

인상주의에는 모든 이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있다.

한때는 전위적이고 기이한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19세기 말 저속해 보였던 주제는 오늘날 아주 존경할 만한하고 심지어 예뻐 보이기까지 한다.

형태의 해체와 빛의 유희는 한때 미숙한 회화로 간주되었지만 지금은 8월의 오후처럼 편안하고 조화로워 보인다.

리히텐슈타인이 인상주의를 작품의 주제로 삼은 것은 대중성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의 풍경화 연작은 외광회화를 그리던 인상주의자들의 수많은 풍경화에서 영감을 얻기는 했지만 리히텐슈타인은 몇 점의 인상주의 작품만 특별히 참고했다.

<루앙 대성당세트 2번>은 날 각기 다른 햇빛에 잠겨 있는 대성당의 파사드를 그린 것이다.

리히텐슈타인은 제목에서 모네의 의도를 고수했지만 그 의도를 자신이 완성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리히텐슈타인은 검은 윤곽선을 뺐는데 모네의 이미지를 원래 양식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게 하는 게 중요했다.

그는 모네의 그림에서 쓸 수 있는 특징들만 받아들이고 새로운 특징을 첨가하지는 않았다.

단순하고 겹쳐진 벤데이 점은 인상주의 회화의 붓자국 같은 얼룩을 기계적으로 만들어냈다.

1970년대 말에 착수한 초현실주의 연작에서 리히텐슈타인은 실내장식을 버리고 패스티시 양식으로 옮겼다.

리히텐슈타인이 만화만 그린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여러 가지 탐험을 했지만 모더니티의 미로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행 중에 많은 영역을 발견하고 또 재발견했다.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경 거슬리는 모순과 숨겨진 유어이다.

그는 우리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변형함으로써 21세기에 미술이란 또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의 여지를 남겼다.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은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작품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그를 초현실주의라고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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