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똑똑해지는 생활문화 속 비하인드 스토리 EBS 알똑비 시리즈 4
EBS 오디오 콘텐츠팀 지음 / EBS BOOKS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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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부분 욕을 말로 하지만 몸짓이나 손짓으로도 욕을 할 수 있다.

상대방에게 주먹, 감자주먹을 보이는 것은 많은 나라에서 욕이 된다.

주먹감자라는 명칭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프랑스어로 브라도뇌르(영광의 팔)라고 하니 유럽 쪽에서 이 욕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주먹을 쥔 한 쪽 팔을 L자형으로 구부리고 다른 한 손으로 굽힌 팔의 팔뚝을 잡고 주먹을 힘차게 뻗어 올리는 주먹감자는 에스파냐, 프랑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라틴아메리타 등지에서 자주 욕으로 사용된다.

주먹감자와 마찬가지로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는 것도 모욕적 표현이다.

하지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것이 원래 욕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운뎃손가락을 펴서 가리키는 것은 그 사람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동성애를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위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였으므로 가운뎃손가락을 펴는 것에 모욕이나 욕설의 의미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 로마시대에 가운뎃손가락이 비로소 욕을 뜻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나중에는 포악스럽게 낭비를 일삼아 원성을 산 3대 황제 칼리굴라가 관련되어 있다.

칼리굴라의 충성스러운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는데 생김새가 단아하고 목소리까지 가늘었다.

칼리굴라는 이런 카시우스가 손에 입맞춤할 때마다 가운뎃손가락을 펴 보이며 그를 동성애자라고 놀렸다.

궁궐의 다른 사람들도 따라 하면서 가운뎃손가락을 쭉 펴 보이는 행위가 점점 성적인 모욕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로마의 세력권이 미치는 것으로 퍼져나갔다.

칼리굴라는 나중에 카이레아를 비롯한 신하들의 손에 삶을 마감한다.

손가락 욕과 관련해 16세기 독일의 화가 한스 홀바인은 의미있는 미술 작품을 남겼다.

사실적인 초상화를 남긴 화가로 평가받는 홀바인은 1521년 무덤 속 예수의 시신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을 보면 관 속에 누워 있는 예수의 가운뎃손가락이 펴져 있다.

16세기에는 마르틴 루터가 주도한 종교개혁이 진행되었고 홀바인은 그 한복판에 있었다.

홀바인은 교회를 비판하는 그림을 그리다가 밥줄이 끊기기도 했다.

손가락이나 손을 들어 올리는 행위는 나라마다 의미가 다르다.

손바닥을 바깥쪽으로 해서 검지와 중지로 브이를 나타내면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는 승리를 뜻한다.

하지만 그리스 등에서 손바닥을 몸 쪽으로 하고 두 손가락으로 만든 브이는 여성의 성기를 상징한다고 보아 욕이 된다.

서아시아에서는 엄지를 세우는 것을 욕으로 생각한다.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는 행위는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모욕적인 제스처이지만 일본에서는 한판 붙자는 의미가 더 강하다.

검지와 엄지 끝을 붙여 원을 만드는 것은 미국에서는 OK, 우리나라에서는 OK나 돈을 뜻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당신은 쓸모없는 인간이다라는 모욕적인 의미로 쓰이고 브라질에서는 항문을 뜻해서 욕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꼴뚜기질이 있었다.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욕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 욕이 성과 관련되어 있듯이 꼴뚜기질의 가운뎃손가락은 남성의 성기를 가리킨다.

어떤 나라에서는 일상에서 좋은 뜻으로 쓰이는 제스처가 다른 나라에서는 욕이 되는 일도 있다.

도르래의 원리와 인력을 이용해 수직으로 사물을 운반하는 원시적인 엘리베이터는 이미 기원전에 발명되었다.

기원전 230년경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가 도르래와 밧줄로 만든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최초로 알려져 있다.

사람이 타는 엘리베이터는 17세기 중반 루이 15세 때 등장한다.

수동식이었고 왕궁에서만 사용되었다.

현대식 엘리베이터는 미국의 발명자이자 사업가인 엘리샤 그레이브스 오티스가 만들었다.

그의 엘리베이터는 속도가 느려서 엘리베이터 안에 거울을 설치했다.

사람들이 그 거울을 보면서 속도가 느린 것에 무감각해졌다.

요즘엔 엘리베이터안에 거울을 설치하는 이유와 범죄예방과 심리적 안정이다.

솔 달린 칫솔은 중국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1780년 현대적인 칫솔은 당시 폭동을 선동한 윌리엄 애디스라는 죄수가 발명했다.

동물의 털로 만든 칫솔은 파스퇴르에 의해 세균이 번식할 수 있다고 해서 1938년 미국의 듀폰사가 나일론으로 만든 칫솔을 만들었다.

조선은 음력을 사용하고 달과 절기를 중심으로 한해를 살았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집권한 김홍집 내각이 을미개혁을 추진하면서 태양력을 도입하여 요일을 사용했다.

당시 일본은 이미 서양이 7일 분화를 받아들여 요일 개념이 정착되어 있었는데 게르만족이 쓰던 것을 월화수목금토일로 바꾼 것이다.

요일 이름은 천체, 그리스와 로마신화, 게르만신화와 얽혀 있다.

처음에는 요일을 그리스신화에서 유래한 천체의 이름으로 부르다가 게르만족이 자신들의 문화를 활용해 이름을 바꾸면서 요일의 영어 이름이 달라졌다.

일주일이 7일로 정해진 이유는 여러 학설이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인이 7을 신성한 숫자로 생각했다.

유대교 안식일 의식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요일 이름을 천체 이름에서 따왔다는 점에서 하늘에 천체가 7개 있어서 7일로 정해졌다는 설이 가장 지지를 받고 있다.

많은 언어권에서 고대 로마인이 고대의 일곱 행성인 태양,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에 따라 붙인 이름을 따랐다고 한다.

과거에는 태양과 달도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보아 일곱 개 행성이 지구 주위를 돌며 시간을 관리한다고 여겼다.

동양철학을 근간으로 하는 음양오행에서는 자연의 이치를 음양(일원)과 오행(목화토금수)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요일 이름과 관련이 없다.

요일 이름은 서양의 태양력에서 유래했을 뿐 음양요행과 전혀 관련이 없다.

과거에는 천체가 운명을 결정하고 시간을 지배한다고 생각해서 요일을 정할 때 사람이 관측할 수 있는 태양,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활용했다.

아름다운 자연의 비율이라는 황금비에 따르면 직사각형의 비율이 1:1.618로 이루어졌을 때 가장 균형 잡힌 안정감을 준다.

A4용지는 가로세로 길이가 210X297밀리미터인데 이 비율이 1:1.1414다.

A 시리즈 용지는 아무리 접거나 이어 붙여도 가로세로의 비율이 1;1.414로 유지된다.

그래서 절반으로 잘라도 그것을 또 절반으로 잘라도 잘라서 생긴 직사각형이 서로 닮아서 낭비되는 부분이 없다.

A시리즈 용지 규격은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로 1909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프리드리히 오스트발트가 고안했다.

1919년 오스트발트가 그 비율을 제안한 이후 1922년 독일공업규격위원회에서 이를 채택해 가장 긴 규격의 용지 넓이는 1제곱미터로 정했다.

그래서 지금 처럼 A시리즈 용지 비율이 정해진 것이다.

종이에 A자 말고 B자가 붙는 것도 있는데 B형은 A형을 기준으로 할 때 변형된 크기로 종이 비율은 A형과 같다.

A형 각 단계의 중간 크기가 B형인데 A3와 A4종이 크기의 중간으로 A3.5에 해당하는 종이 크기가 B4다.

B형은 A형 종이를 다양하게 활용하려고 만들어낸 것이다.

B5도 A4와 A5의 중간 크기로 A형과 비율이 같다.

펄프 재료로 만든 종이는 기원전 50~기원전 40년대 중국 전한시대에 발명되었으며 105년경 후한의 채륜이 품질 좋은 종이를 생산하면서 지금처럼 흔히 사용하게 되었다.

엿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구체적인 기록은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처음 보인다.

이규보는 우리 엄마 조상이다.

엄마랑 관련이 있으니 나의 유전자 절반에도 이규보의 피가 흐르는 것이다.

엿은 중요한 시험을 앞둔 사람에게 찹쌀떡과 함께 선물하기도 한다.

엿은 보통 딱딱하지만 온도가 높아지면 녹으면서 끈적거린다.

그래서 시험에 끈쩍끈적하게 착 붙으라는 뜻으로 엿을 선물하며 응원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유생들이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엿을 가져갔고 시험장에서 상인들이 엿을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좋은 의미로 사용된 엿이 1964년 12월 서울의 한 명문 중학교 입학 시험 문제가 논란이 되면서 바꼈다.

엿을 만들 때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을 고르는 문제가 나왔는데 보기에 디아스티아제와 무즙이 같이 제시되었다.

정답은 다아스타아제였지만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었고 이런 내용은 교과서에도 있었다.

교육청에서는 무즙을 오답으로 처리하면서 교육감이 무즙을 엿을 만들어온다면 정답으로 인정해주겠다고 했다.

이 문제는 1점짜리였는데 0.8점에 당락이 걸린 수험생이 30명이 넘었다.

흥분한 학부모들은 무즙으로 만든 엿을 들고 교육청을 방문해 "엿 먹어라, 무즙으로 만든 엿이다"라고 했다.

재판까지 가서 학부모들이 승소했고 무즙을 답이라 한 학생들은 모두 원하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무즙파동으로 알려진 이 사건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엿먹어라가 욕이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또 다른 얘기는 엿이라는 말이 조선시대 팔도를 떠돌던 남사당패가 쓰던 은어였다고 한다.

여성의 성기나 남성의 성기를 엿이라는 속어로 불렀으며 엿 먹으라는 말은 곧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하거나 이 관계로 봉변을 당하라는 욕이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얘기는 조선시대 군역 제도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당시 강원도 일부 지역의 군역 대상자들이 서울로 뽑혀가 왕십리 쪽에서 집단으로 살았다.

일부는 군역이 끝나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초막에서 살았는데 이를 사고팔기도 했다.

글을 모르는 백성이 많다보니 계약서 없이 초막을 사는 경우 동네 사람들에게 엿을 돌리면서 이 초막을 얼마에 샀다고 얘기를 하면서 증거를 남겼다고 한다.

그래서 집과 관련해 문제가 생기면 동네 사람들이 엿을 먹은 일로 쓸데없는 말 하지말라고 자신이 몇 살 때 엿을 먹었다고 증인이 되어 소유를 인정해 주었다.

그래서 엿 먹어라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라는 뜻으로 썼다는 얘기도 있다.

이 책에서 읽은 얘기들은 거의 금시초문이다.

항상 새로운 것은 재미있고 좋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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