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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시민 불복종 (합본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41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이종인 옮김, 허버트 웬델 글리슨 사진 / 현대지성 / 2021년 12월
평점 :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콩고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첼름스퍼드에서 하버드 대학 4년 동안에는 인근 케임브리지에서, 1843년 후반부에 스태튼섬에서 보낸 몇 달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콩코드에서 살았다.
저자는 자연을 사랑하고 동식물에 관심이 많았다.
1837년 소로는 초월주의 철학자 랄프 왈도 에머슨을 만나면서 문학 활동에서 큰 전기를 맞는다.
나도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기 신뢰를 읽기는 읽었다.
그 사람과 저자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또 알았다.
에머슨은 소로를 자기 집에 집사로 취직시켰다.
집이 얼마나 넓길래 집사가 필요할까,,
미국을 생각하면 넓은 초원부터 생각난다.
어릴 때 어떤 노래를 들었는데 그 노래를 들으면 초원이나 작은 호수, 푸른 하늘이 떠올랐다.
그 노래는 스티븐 포스터가 작곡한 스와니강이라고 했다.
메기의 추억을 들어도 초원이 떠오른다.
미국 민요는 찬송가 같고 차분해서 어릴 때 많이 들었다.
켄터기 옛집, 꿈길에서,
소로는 에머슨의 집사로 있으면서 현실적으로 도움도 많이 받고 서재의 책도 읽었다.
그때 중국 철학과 인도 철학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19세기 미국 문학의 초월주의 운동을 이끌어나갔다.
콩고드에서 교사도 했지만 형 존과 콩고드 강과 메리맥 강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교사는 적성에 안 맞고 자연을 탐구하는 시인이 어울림을 확신했다.
소로는 하버드 동창생 찰스 휠러가 오두막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월든 호수에 오두막을 지었다.
책 제목의 월든이 호수이름이었다.
1845년 부터 호숫가에 살면서 「월든」초고를 쓰고 매일 일기를 쓰고 호수 주변의 동식물과 자연을 관찰했다.
1847년 문명 생활로 돌아온 이후 초월주의에 대한 관심이 옅어지고 행동주의쪽으로 기울어져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다.
도망 노예들을 캐나다로 탈출시키는 지하 철도 운동에도 가담했다.
『월든』과 『시민불복종』은 비슷한 시기에 썼고 그의 삶에 관한 정신적 기초가 충분히 녹아 들어가 있으며 두 책은 하나로 읽힌다.
이 책은 두 권을 합쳐 놓은 것이다.
추운 겨울에 숲속에 들어가 나무들을 관찰하다가 기관지염에 걸렸고 이후 폐병으로 악화해 1862년 사망했다.
스승 에머슨은 제자를 위한 추도사에서 "소로의 영혼은 고상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는 그 짧은 생애 동안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탐구했다. 지식이 있고, 미덕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매력적인 인물이라서 인터넷에서 찾아 봤는데 책 2페이지만 넘기면 소로의 초상화가 나온다.
음,,외모는 지적이고 부드럽게 생긴 것 같다.
이 책에 미국의 경치에 대한 사진 66장이 실려 있는데 미국의 전문 사진 작가 허버트 웬델 글리슨이 1899-1920년 사이에 소로의 발자취를 따라 매사추세프주와 메인주를 여행하면서 월든, 메인 수프 케이프 곶, 일기등에서 소로가 묘사한 장면들에 기초해 찍은 흑백 사진을 월든 본문 순서에 맞게 재배치한 것이다.
일러스크레이티드 월든에 포함된 이 사진들은 글리슨이 애초 소로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출간하려던 수백 장 중에 엄선한 작품이다.
이 책에 나오는 사진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흑백 사진이라도 미국이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가졌다는 걸 알겠다.
흑백이라서 사진이 잔잔하게 느껴진다.
이 책은 사진만 봐도 좋다.
이 책은 월든과 시민불복종 2권이 합쳐져 있다.
저자가 살았던 월든은 사색뿐만 아니라 진지한 독서를 위해서도 대학교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다.
사진을 보니까 독서가 그냥 될 것 같은 아름다운 곳이다.
저자가 살았던 곳은 순회도서관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곳에 있지만 숲속에 있으면서 온 세상에 유통되는 책들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가 살았던 시대는 19세기 ㅋㅋㅋ
그 책들의 문장은 처음에는 나무껍질 위에 써졌는데 나중에는 리넨 종이 위에 복사된다고 하는데 뭔 얘기지?
시인 미르 카마르 우딘 마스트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정신세계의 모든 지역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것, 미르는 책 속에서 이런 이점을 맛본다고 한다.
마스트는 18세기 인도의 시인이라고 한다.
책이 534페이지인데 이 두꺼운 책을 읽고 있으니까 저자가 소로오빠처럼 느껴진다.
소로오빠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여름 내내 테이블 위에 놓아두고 가끔 들춰본다고 한다.
두 손으로 끓임없이 일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이유로 공부를 깊이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앞으로 그런 독서를 하게 되리라는 전망으로 저자 자신을 달랬다고 한다.
저자는 일하는 짬짬이 한두 권의 가벼운 여행 책자를 읽었다.
하지만 그런 책을 읽다니 저자 자신이 부끄러워졌고 저자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서 사는지 자문했다고 한다.
여행책을 읽다가 왜 부끄러워졌다는거지?
학생은 호메로스나 아이스킬로스를 그리스어 원전으로 읽어도 방탕해지거나 사치에 빠질 위험이 없다고 한다.
학생은 어느 정도 그런 책들의 주인공들과 경쟁 심리를 느끼고 성스러운 마음과 함께 아침 시간을 그 책에 바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웅적인 책들은 모국어로 출판되더라도 타락한 시대에는 마치 죽은 언어처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각 단어와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무던히 애써야 하고 그 책에서 파악되는 지혜, 용기,관대함의 상식적 범위를 훨씬 뛰어넘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번역서가 많이 나와도 고대의 영웅적인 작가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는 일은 거의 하지 못했다.
저자가 자신이 부끄러웠던 것은 쉬운 책을 읽어서였구나,,
책을 잘 읽는 것, 참된 정신을 발휘하여 참된 책을 읽는 것은 고상한 행위다.
독서를 잘하려면 운동선수가 거쳐 가는 것과 같은 훈련을 해야 한다.
평생에 걸쳐 꾸준한 의도를 가지고 그 훈련에 임해야 한다.
책들은 그 저자가 힘들여 신중하게 쓴 것처럼 똑같이 힘들여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
구어는 일시적이고 소리이자 말이고 방언이어서 우리가 어릴 적에 어머니에게 무의적으로 배운 것일 뿐이다.
그러나 문어는 무의식적인 구어가 성숙해지고 또 체험을 거친 언어다.
구어가 우리의 어머니 언어라면 문어는 아버지 언어다.
저자는 강 위에 놓을 다리 하나를 취소하고 약간 더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를 둘러싼 무지의 어두운 심연 위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고 한다.
그게 독서다.

저자는 가장 적게 통치하는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라고 한다.
저자는 아예 통치하지 않는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라고도 한다.
사람들이 이런 정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결국에는 이런 정부를 갖는다.
정부는 시민 편의에 봉사하기 위한 조직일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 정부는 이런 편의에 그다지 봉사하지 않는다.
상비군에 대해 제기된 반대 의견들은 다양하고 또 신중한 것이므로 받아들일 만한데 그와 똑같은 반대 의견들을 기존 정부에 대해서도 제기할 수 있다.
상비군은 상비 정부의 오른팔이다.
국민이 자기 의견을 실천하기 위해 선택한 운영 방식 중 하나인 정부 자체도 상비군 못지않게 남용되고 왜곡되기 쉬우며 국민은 그 정부를 통해 제대로 된 행동을 하기가 어렵다.
미국 정부는 저자가 살던 시대에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으로 하나의 전통일 뿐이다.
정부는 후손에게 자신을 온전하게 전하려고 하나 매 순간 그 정직성을 일부 잃어버리고 있다.
정부에선 살아 있는 사람의 활력과 힘을 단 한 명의 것이라도 찾을 수 없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정부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정부 개념을 충족시키기 위해 복잡한 기계가 필요하고 그것이 작동하면서 내는 소음을 들어야 비로소 만족한다.
정부들은 자기 유리한 쪽으로 시민을 적절히 강요할 수 있고 심지어 시민이 알아서 스스로 강제를 가하도록 유도한다.
정부는 스스로 어떤 사업을 촉진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고 그 사업에서 재빨리 몸을 빼내는 일에만 능하다.
정부는 국가를 자유로운 상태로 유지하지 않는다.
미국 국민에게 내재한 좋은 성품이 지금까지 미국에서 이루어진 일을 모두 해낸 것이다.
국민 성품이 자유롭게 발휘되는 것을 정부가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많은 일을 해냈을 것이다.
정부는 각 개인이 서로 방해받지 않으려고 만들어낸 편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국민을 간섭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둘 때 정부는 가장 편리한 조직이 된다.
무역과 상업은 탄력이 아주 좋은 인도 고무로 만든 게 아니라면 입법가들이 계속 만들어내는 장애물을 결코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입법가들의 의도를 일부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그들의 행동이 일으킨 효과만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철로에 장애물을 설치한 악의적인 사람들과 동급으로 처리해 처벌해야 한다.
저자는 정부를 바로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요구하는 것은 정부가 더 좋은 정부가 되어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권력이 국민 손에 있는데 정부가 통치하도록 허용하는 이유는 그들이 정의롭다거나 소수에게 가장 공정할 것처럼 보여서가 아니라 그들이 물리적으로 가장 힘이 세기때문이다.
정부는 정의에 바탕을 둔 조직이 아니다.
저자는 우리가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 먼저 국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성상납이나 받는 대표가 있는 당을 지지할 수는 없다.
그 대표는 사람도 아니고 국민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의보다 법률을 더 존중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저자가 인정하는 의무는 언제 어디서라도 저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결사체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구성한 결사체는 양심을 가진 결사체가 된다.
법은 인간을 더 정의롭게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이 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선의를 가진 사람들도 불의의 대행자가 된다.
대부분 사람은 한 인간이 아니라 신체를 가진 기계로서 국가에 봉사하고 있다.
도덕적 판단이 자유롭게 내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흙, 나무, 돌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한다.
의회의원, 정치가, 법률가, 장관, 공직자 등은 주로 그들의 잔머리로 국가에 봉사한다.
소수의 영웅, 애국자, 순교자, 진정한 개혁가, 사람다운 사람은 그들의 양심으로 국가에 봉사하고 그런 만큼 필연적으로 정부에 저항하게 된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한다.
동료 인간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사람은 소수의 양심적인 사람이 볼 때 오히려 쓸모없거나 이기적인 인간이다.
부분적으로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은 남을 이롭게 하는 은인이면서 박애주의자다.
저자는 정부와 관계를 맺는다면 불명예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저자는 노예제를 지지하는 정부를 한순간도 저자의 정부라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저자의 마음을 이해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짓을 하는 정부는 인정할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이 혁명의 권리를 인정한다.
정부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거나 정부 자체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정부의 독재나 베효율성이 너무나 극심하여 참을 수 없는 경우에는 저항해야 한다.
정권 심판론이라고 하더니 심판한다는 당이 자기들끼리 싸우면 어떻게 되는거야?
정말 한숨만 나온다.
투표는 서양 장기나 주사위 놀이처럼 일종의 게임이다.
투표에는 도덕적 색채가 있어 도덕적 주체로 옳고 그름을 따지며 놀이를 벌인다.
게임이니까 당연히 내기가 따른다.
하지만 투표자의 인격을 판돈으로 걸지는 않는다.
저자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투표를 한다.
정의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면서 적극 개입하자는것은 아니다.
저자는 정의를 다수결에 맡기려는 용의가 있다.
투표 의무는 편의성의 의무를 뛰어 넘지 않는다.
정의를 위해 투표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정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된다.
그것은 정의가 승리하면 좋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두 달 있으면 정의를 위해서 또 투표를 해야 한다.
저자의 시대에도 통계 수치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세기가 바뀐 지금도 통계 수치가 문제가 있는 건 바뀌지 않았다.
19세기의 저자가 얘기한 문제들이 지금과 비슷하다는게 신기하기도 하고 아직도 해결을 못한 걸 보면서 사상이 많이 발전하지는 못한 것 같다.
